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에 대하여
작가 한강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 소식은 어제저녁 속보로 전해졌고 오늘 아침에는 모든 언론들이 뉴스로 다루고 있다. 참 자랑스럽고 뿌듯한 마음이다. 오랜 시간 영미문학을 가르쳐온 사람으로서 한국문학이 노벨상과 인연이 없었던 것에 늘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간혹 노벨상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역시 상은 좋은 것인 모양이다. 그 소식에 차오르는 희열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 K-pop의 물결 위에 진지한 문학의 흐름이 더해진 것 같다. 그리고 그 흐름은 대한민국의 젖줄 한강처럼 유유히, 무궁한 세월 흘러갈 것이다. 세계인들은 한국의 문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문학을 통해 한국인의 정서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문학에 한 줌 기여도 못한 영문학자로서, 진정 한강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왜 우리의 문학이 이제야 세계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걸까? 그 많은 뛰어난 작가들과 작품들이 있고, 스웨덴 한림원이 오래전부터 제3세계의 문학에 관심을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제야? 그것은 우리의 작가, 우리의 작품 탓이 아니다. 언어의 장벽 때문이다. 오래전 대학 시절 필자는 광화문 조선일보 건물---지금은 자리를 옮겼지만--- 커피숍에서 소설가 이병주 선생을 학생기자의 신분으로 만나 인터뷰를 했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선생께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당시의 신예작가 한수산 소설가의 글이 번역체의 느낌이 드는 것에 대해 견해를 물은 것이다. 그때 이병주 선생께서는 어린 학생의 질문에 매우 진지하게 답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선생은 그 사실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셨다. 우리글의 문체를 더욱 확장시킬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한글의 표현이 더욱 풍부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넓힌 것이라고. 선생의 그 말씀에 필자는 약간의 충격과 함께 신선한 사고의 지평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과의 인연은 이후 원효로에 있던 선생의 자택 방문으로 이어졌다. 낡은 집 마당 뒤 쪽으로 커다란 창고가 있었는데 그곳에 수만 권의 책들이 꽂혀있었다.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한 선생께서는 방문 선물로 당시에 막 영어로 번역된 자신의 얇은 소설책 한 권을 주셨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문학의 외국어 번역에 대한 필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흘렀다. 일에 쫓기고 삶에 바쁘다 보니 늘 마음속에 있던 그 생각은 현실로 구체화되지 못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능력이 안 되었다고 해야 하나? 긴 소설을 영어로 옮길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말의 그 풍부한 표현이 번역을 통해 훼손되는 것은 아닐까, 서툰 솜씨에 오히려 원작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닐까? 차일피일하다가 선생과의 만남은 벌써 45년 전의 일이 되고 말았다.
우리 문학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압축된 시의 번역이나 구어체의 희곡 번역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번 한강 작가의 작품은 한국어를 아는 외국인에 의해 번역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정답일지 모른다. 그에게는 일종의 외국어 번역이기 때문이다. 번역 과정에서 자신의 모국어 표현 가운데 가장 적확한 것을 찾아내는 일이 한국인에 의해 우리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되는 것보다는 더 원작의 느낌이나 표현에 정확성을 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번역가에 의해 우리말로 번역된 외국의 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충분히 공감하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문학은 한국어를 잘 아는 외국인의 손에 의해 번역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문학을 영어로 번역해보고자 하는 필자의 꿈은 결국 퇴직 후의 시간적 여유로 조금은 가능해졌고 지난 몇 년간 우리 시 500여 편을 영어로 옮길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이 영문이 의미의 전달 외에 우리 시가 갖는 그 맛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AI가 번역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한강 작가의 수상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그의 창작활동이 이를 계기로 더욱 활발해지고 원숙해지길 기대한다. 더불어 우리의 문학이 전 세계 독자들에 의해 더욱 넓게 읽히고 확산되길 바란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문학의 외국어 번역에 대한 보다 효율적인 방식의 도입이 구체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학계와 문학계 그리고 21세기 문화정책을 수립하는 정부의 체계적이고 진취적인 노력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