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플랫폼 (3)
목마른 이에게 물 한잔 건네는 꿈
나는 가끔 꿈을 꾼다. 벌거벗은 채로 사람들 곁을 지나가는 꿈을 꾼다. 얼마나 당황스럽고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낭떠러지에서 작은 바위를 딛고 천 길 아래를 내려다보는 꿈도 꾼다. 그 긴장감과 공포감은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잠시 계속된다. 그리고 느껴지는 안도감. 내 꿈을 해석하려 하지 말기 바란다. 프로이트가 뭐라고 했던, 그것은 살면서 느끼는 내 감정의 일단이 잠을 자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단순한 증거일 뿐이니까.
2005년 어느 날, 나는 중국 길림성 퉁화라는 곳에 있었다. 당시 대학마다 중국 유학생 유치에 열심이던 때여서 국제교류를 담당하던 내가 그곳에 유학생 면접을 갔었던 것이다. 시내로 들어가는 차 속에서 보니 길가에 제법 큰 언덕이 보였다.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조선족 안내인이 눈치를 챘는지 포도주 저장고라고 설명해주었다. 아! 퉁화 포도주. 그곳에서 제법 많은 양의 포도주가 생산된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난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한 음식점의 넓은 공간에서 수 십 명의 중국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학교 소개와 유학 자격, 한국에서의 생활 등을 설명하면서 난 그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뿐이었다. 그곳에서 몇 명의 젊은이들을 선발했는지, 그들과 무슨 말을 나눴는지는 이미 내 기억에 없다. 마치 꿈속에서 본 것처럼 희미한 잔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내게 있어 지나간 과거는 그렇게 꿈의 영역으로 이전한다. 내가 지나쳤던---때론 제법 오래 머무르기도 했던---많은 장소들, 만났던 사람들, 나누었던 이야기들, 심지어 웃고 울었던 많은 일들이 한동안 지나고 나면 그렇게 꿈처럼 느껴진다. 망각과 기억의 중간쯤에서 말이다.
뒤돌아보면 참 마음이 아리다. 내게 소중했었을 그 기억들이 그렇게 잊혀가는 것에 가슴이 아파온다. 그리고 찾아오는 그리움. 보고 싶고, 다시 돌아가고 싶고,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 순간들, 사람들, 장소들이 불현듯 너무도 그리워진다. 그날의 중국 청년들 중 몇몇은 나를 따라 한국에 왔고, 공부를 했고, 중국으로 돌아가 지금쯤은 그곳에서 어엿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얼굴조차 희미해진 그들은 이제 나의 현실 속에 있지 않다. 다시 보아도 그 얼굴이 기억날까? 시간이 제법 흐르기는 했지만 내겐 이미 꿈속이다.
그렇게 우리네 인생은 스치는 인연을 뒤로하고 망각의 세계로, 꿈의 세계로 옮겨가는 것인지 모른다. 모든 것이 한바탕 꿈에 불과한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얼마나 쓸쓸할까. 꿈을 깨면 꿈속에서 보았던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저 멀리로 사라져 버릴 테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에 매달린다. 지난 그리움을 잊고, 그 쓸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면서 지금과 내일의 삶을 이어간다. 산 날 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적어서일까? 왜 선명한 기억보다 꿈같은 기억이 더 많은 걸까?
젊은 사람들은 아직도 꿈꿀 날이 많다. 꿈처럼 아득한 기억을 만들 날들도 많다. 그 꿈을, 아득한 기억을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 슬펐던 것, 기뻤던 것, 가슴 저몄고, 뿌듯했던 많은 것들을 추억의 앨범처럼 간직하고 또 다른 꿈을 꿀 오늘을 기대하라. 그리고 이해인 수녀님의 꿈을 배웠으면 한다.
목마른 이들에게
물 한 잔씩 건네다가
꿈이 깨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다시
사랑해야겠습니다
누구에게나
물 한 잔 건네는
그런 마음으로
목마른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