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플랫폼 (5)

어리석어서 지혜로울 수 있다면...

by 최용훈

어리석으라고 한다. 이 척박하고 비정한 세상에서 어리석으라고 한다. 500년 전 네덜란드 출생의 인문학자 에라스뮈스는 ‘우신예찬’이란 책을 통해 종교와 정치 그리고 현학적인 학자들을 풍자하고 비난하면서 ‘어리석음’의 미덕을 강조한다. 어리석지 않다면 왜 결혼해서 산고의 고통을 치르고, 가족을 부양하는 멍에를 지겠는가. 어리석지 않다면 누가 가난한 시인이 되겠는가. 어리석지 않다면 어째서 남들이 다 ‘예스’라고 하는데 ‘노’라고 말하며 왕따를 자처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뮈스는 어리석으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인연을 맺은 사람이면 무조건 아름답게 보고 좋아하는 어리석음이야말로 인생을 즐겁게 하고 유대를 강화시킨다.” 모두가 영악하고 그래서 서로를 믿지 못하고 남을 헐뜯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한 번은 어리석고 싶다.


15 년 전 스티브 잡스도 그렇게 말했다. 애플의 창업자였던 그는 누구보다도 인문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소크라테스와 한 끼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다면, 애플의 모든 기술을 넘겨줘도 좋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인문학이 창조적 사고를 키우는 관건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창의성이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보다 풍요롭고 행복한 인간의 삶을 열어주는 길임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에라스뮈스의 ‘우신’을 다시 예찬한다. “우리가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뭔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벌거벗고 태어난 우리가 스스로 마음 내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배고파하십시오. 어리석으세요.”


아놀드 로벨이라는 사람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어린이를 위한 동화에 ‘밍로는 어떻게 산을 옮겼을까?’라는 책이 있다. 주인공 밍로와 그의 아내는 집 뒤에 있는 커다란 산 때문에 고민이다. 툭하면 돌이 떨어지고, 산꼭대기 비구름 때문에 마당은 그늘져 풀 한 포기도 자라지 못했다. 어느 날 밍로의 아내는 “여보, 이 집에서 마음 놓고 살려면 저 산을 다른 데로 옮겨야겠어요.”라고 말했다. 밍로는 마을의 지혜로운 노인에게 가서 산을 옮길 방법을 알려주길 간청한다. 그리고 노인의 말 대로 ‘통나무로 산을 힘껏 밀어내기,’ ‘소란을 피워 산을 멀리 쫓아내기,’ ‘산신령에게 제물을 바쳐서 산을 옮겨 달라고 부탁하기’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지만 산은 여전히 제 자리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밍로와 그의 아내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지혜로운 노인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로부터 산을 보고서서 한 발 두 발 뒤로 가는 춤을 추라는 얘기를 듣는다. 그들이 춤을 시작하자 과연 산은 그들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바보 같은 그림이야기를 보며 생각했다. 밍로의 어리석음 속에 어떤 지혜가 있을까? 산을 옮길 수 없다면 내가 물러서는 것도 때론 현명한 방법이 되는 것일까? 이 우화 같은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려 했던 것일까? 어리석은 것은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다. 이 영악한 세상을 어리석음 하나로 대적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가. 애당초 산을 옮기겠다는 생각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 어리석은 짓 아니었던가. 밍로가 산을 옮겼다고 믿고 스스로 행복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일까? 주변의 사물은 모두 그대로인데 나만 변했다고 믿고 만족한다면 그것이 행복일 수 있는 걸까? 그런데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그 바보 놀이가 내 마음에 들어와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 산을 옮기지 못하면 내가 물러선들 어떤가. 남들이 바보 같다고 비웃을 지라도 아예 산을 옮기지는 못할 것이라는 세상의 상식보다 더 멋지지 않은가.


지혜로움이 세속의 영악한 처세를 뜻하는 것이라면,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느끼는 우월함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그런 지혜로움보다는 어리석음을 택해도 좋을 것 같다. 남들이 보지 못하고 가지 않는, 그래서 고통스럽고 두렵지만 새롭게 나 자신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길이라면 굳이 어리석어도 괜찮을 것 같다. 어리석음으로 생기는 열정, 남의 잘못을 보지 못하고 남을 비난할지 모르는 어리숙함, 남들의 길을 맹목적으로 뒤 쫓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묵묵히 가는 성실함. 그것들이 어리석음이라면 기꺼이 그것들을 받아들이리라. 유안진 시인이 친구가 되고 싶었던 그런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지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 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 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 듯이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지란지교를 꿈꾸며---유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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