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플랫폼 (6)

내 안의 삼류 배우

by 최용훈

인생을 연극이라 한다. 우리는 서툰 배우이고, 살면서 주어진 여러 가지 역할들을 연기한다. 부모이면서 자식이고, 선생이면서 학생이고, 직장인이면서 동호인 모임의 회원이다. 감정 표현도 연기인 때인 많다. 짐짓 화난 척, 기쁜 척, 괜스레 큰소리치다가 느닷없이 의기소침해지는 우리는 영락없이 배우 놀이를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외국영화를 보고 그 주인공의 표정과 몸짓, 그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을 흉내 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상상 속에서 우리는 영웅이 되고, 천재가 되고, 재벌이 된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을 극적 환상에 기대어 연기하는 재미가 있다.

희곡을 전공하고 연극 공연에 참여하면서 나는 특히 연극적 상황을 좋아하게 되었다. 한 번 밖에 살 수 없는 삶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남의 삶을 연기하며 몇 번이라도 살 수 있으니 말이다. 현실에서도 그랬다. 어색하거나 대처하기 힘든 순간을 만날 때 난 현실을 외면하고 무대에 오르는 배우가 된다. 조명 아래 서서 관객을 향해 대사를 말하는 순간, 긴장감 못지않게 자신감이 솟는다. 마치 가면 아래에서 자유로워진 듯, 나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경험을 한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는 여유롭고 유머러스한 신사가 되고, 소심해질 때면 누구나 좋아할 멋쟁이를 연기한다.

최근 나는 미국 대학의 졸업연설들을 번역하고 영문에 관한 설명을 붙인 책을 출판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 미국 배우 메릴 스트립이 버나드라는 여자대학에서 한 연설문을 읽으며 난 슬그머니 그녀와 나 둘 중 누가 나이가 많은가 궁금했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지만 그녀가 날 따라한 것이 아닐까? 오, 알고 보니 그녀가 나보다 일곱 살이나 위였다! 메릴 스트립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 중의 하나다. 인형처럼 예쁜 여자는 아니지만 왠지 섹시하다. 그 섹시함은 그녀의 얼굴, 몸매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 묘하게 포근한 미소, 그녀의 몸짓, 손짓. 그 하나하나가 내겐 너무 섹시하다. 그녀는 여성성과 함께 모성적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이다. 그녀에게서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맡았던 크림 냄새가 날 것 같다.


그런 그녀가 졸업식을 치르는 젊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척하는 것, 즉 연기는 매우 귀중한 ‘삶의 기술’이고 우리 모두 하는 것이죠. 늘 그렇듯 우리는 연기한다는 걸 들키고 싶어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연기는 우리 인류가 적응해온 한 부분입니다.”


"... 약간 으스대고, 좀 고집스럽고, 시끄럽고, 말 많고, 활발한 제 본래 성격을 교정해서 부드럽고, 쾌활하고, 상냥하게, 천성적으로 보이는 다정함과, 심지어 부끄러워하는 성격까지 의도적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이런 성격은 남자아이들에게는 효과 만점이었죠 “


메릴 스트립은 타고난 배우였다. 그녀는 연기자가 되기 이전부터 연기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매력적인 여고생의 모습을 연구해서 자신의 외모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했고 심지어 말투와 웃음소리까지 변화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성격마저도 연기를 통해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꾸며진 모습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 나름대로의 의상, 분장, 목소리, 표정 등을 갖추고 연기한다면 그 연극이 끝나는 순간 관객의 뇌리에 남는 모습은 무대 위의 우리일 테니까.

그러므로 연기하라. 다양한 표정을 얼굴에 담고, 음성에 활력을 더하고, 모습을 변화시켜라. 그렇게 준비된 채 무대에 오르면 연기하는 내내 자신감으로 충만할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은 위선이 아니다.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삼류배우를 몰아내고 진정한 자기를 만들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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