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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아름다움으로 파괴된 영혼

by 최용훈

인생의 절정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까? 모든 사람이 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나의 사랑을 갈구한다면 빛나는 삶을 탐닉한다 해서 누가 뭐랄 수 있을까? 그 지고의 아름다움이 계속될 수만 있다면!


오스카 와일드가 창조한 ‘도리언 그레이’(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The Picture of Dorian Gray, 1891)가 그랬다. 그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노(老) 화가 바질 홀워드가 그린 그의 초상화는 도리언이 젊음을 유지하는 동안 그 대신 늙어간다. 스스로 변치 않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취한 도리안은 방탕과 타락의 세월을 보낸다. 쾌락에 빠진 그에게는 사랑도 진심도 없다. 그를 사랑했던 여인은 그에게 버려진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된 도리언은 비로소 자신을 대신해 늙어가는 초상화의 뒤틀린 모습을 발견한다. 결국 그는 발작적으로 추하고 사악한 자신의 초상화를 찢는다. 그 순간 초상화는 원래의 모습으로 변하고 도리언은 늙고 추한 모습으로 죽어간다.


아름다움은 거죽에 불과하다(skin-deep)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는 스러지게 된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시간에 의해 모든 것이 파괴되는 순간 삶의 부조리를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사실 흐르는 세월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젊음과 늙음은 그저 시간의 문제일 뿐이고, 아름다움과 추함은 그 시간 속의 변화일 뿐이니까.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젊음의 파괴가 늙음의 추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빛나는 피부와 붉은 입술, 가는 허리만이 아름다움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공자)


파우스트 박사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얻고자 자신의 영혼을 판다. 도리언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자신인 초상화를 파괴한다. 파우스트가 영혼을 대가로 치렀다면 도리언은 영원한 아름다움과 그에 따른 쾌락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타락시킨 것이다.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갈구가 결국 영혼의 파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혼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젊은 시절의 외면적 아름다움이 자신의 삶의 목표라는 편견을 갖는 것이고, 내면의 진정성과 순수함을 상실하고도 슬퍼하지 않는 것이다. 소설 속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유혹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오늘의 수많은 도리언 그레이들은 영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유혹을 쫓아 방황하고 스스로를 타락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길이 아름답다면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묻지 말라.”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의 말이다. 그래야 할까? 아름다움이라는 신기루를 따라 목적 없이 삶을 낭비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오늘의 우리는 외면의 아름다움과 화려함만을 추구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소설 속 헨리 워튼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요즘 사람들은 모든 것의 값은 아는데 그것의 가치는 모르고 있어.”


우리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외면의 아름다움, 삶을 치장하는 부와 권력, 자신을 합리화하는 수많은 궤변들... 그런 것들에서 자신의 값을 정하고 나를 대신해 초상화가 늙어가기를 바라는 비열한 겁쟁이로 살아가는 일은 분명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외면하는 일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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