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흑사병(Black Death)은 유럽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14세기에 처음 발병했던 이 죽음의 역병은 이후에도 몇 세기에 거쳐 간헐적으로 발발해 유럽인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그로부터 6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전 세계는 또다시 코비드-19라는 바이러스의 창궐로 삶을 위협받고 있다. 코비드로 삶의 그림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선생은 학생들을 만나지 못하고 연인들은 늦은 밤 카페에서의 낭만을 잃어버렸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부모를 요양원에 모신 자식들은 마치 교도소 면회하듯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부모를 향해 유리창 너머로 소리를 내지르다 돌아서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렇듯 나약한 존재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위협에 속수무책인 우리가 과학과 기술의 혁명적 발전을 자랑할 수 있는가? 마치 격세유전(隔世遺傳)처럼 반복되는 저 가공할 자연의 보복에 인간들은 그저 공포에 떨 뿐이다. 문학 속에서 표현된 역병의 모습은 언제나 예언적이다. 사실 수많은 문학 작품 속에는 위협적인 전염병들이 주제로 다루어지거나 주요 사건의 배경 속에 등장하고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소포클레스의 비극 ‘외디푸스 대왕’, 보카치오의 단편집 ‘데카메론’, 카뮈의 ‘페스트’ 등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병은 문학의 주요한 소재를 이루고 있었다. 사실 역병 이야기는 문학보다도 오래된 것이다. 전 세계에 걸친 고대의 신화와 의식(儀式) 속에 이미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스트’(La Peste, The Plague, 1947)를 쓴 카뮈는 역병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을 겪은 그는 전쟁의 참화를 페스트에 의한 파괴로 전환해 그로 인한 다중의 죽음과 그에 대처하는 인간의 모습을 지극히 냉소적으로, 어두운 풍자의 형태로 그려내고 있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역병의 발발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리하여 부조리한 혼란만이 가득한 채 소설은 시작된다.
30대의 젊은 의사 리외(Bernard Rieux)는 한 마리 쥐의 죽음을 통해 페스트의 조짐을 직감한다. 강력한 촉구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그는 친구 타루(Jean Tarrou)와 함께 페스트의 침략에 맞서는 자원봉사 조직을 만든다. 마치 프랑스를 침공한 나치에 대항했던 레지스탕스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역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인간 군상들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페스트의 재앙을 신의 징벌이라고 주장하던 가톨릭 신부 파넬루(Paneloux)도 리유와 타루의 헌신적인 노력을 보면서 자원봉사 조직에 참여한다. 하지만 그는 한 어린아이의 허망한 죽음을 목도하면서 무고한 죽음에 대해 하늘을 향해 탄식한다. “이 애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당신도 그것을 알고 계시잖습니까.” 결국 신부는 역병과의 싸움 가운데 희생된다. 헌신적인 타루도 페스트의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리외는 살아남아 역병과 싸웠던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게 되고, 페스트의 와중에서 아내를 구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기자 랑베르(Raymond Rambert)는 역병이 끝난 후 아내를 만나 뜨겁게 포옹한다.
부조리 작가라 불렸던 카뮈는 인간이 부조리함을 느끼는 상황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첫째는 기계적인 일상의 반복에서 오는 권태로움, 둘째, 시간에 의해 모든 것은 파괴되고 만다는 사실, 셋째, 낯선 이들의 세상에 홀로 던져져 있다는 느낌, 넷째, 비인간성과 잔인성으로 더욱 악화된 소외의 감정. 소설 ‘페스트’에 깔린 짙은 부조리의 감정은 이 모든 상황의 결과였다. 그리고 오늘날 코비드를 통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지금의 우리 역시 부조리의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 속 역병은 인간의 노력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스스로 소멸되어 갔을 뿐이다. 인간의 능력과 노력이 미치는 한계는 명확했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것을 향해 안간힘을 쓰는 부조리한 모습에서 작지만 인류의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역설이다. 그 역설적이고 비극적인 희망 앞에서 카뮈는 여전히 극복할 수 없는 공포의 위협을 경고하고 있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외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수 십 년 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도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그곳에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