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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May 08. 2021

코로나19 확진보다 더 두려운 것은

 어머니를 보러 서울로 일주일 간 올라갔다. 아직 자식을 알아보시는 감사함과 어머니 친구분이 주말에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해서 모셔다 드리려고 서울에 머물렀다. 30년 넘게 서울에만 살다가 지방에 산지 5년이 되었지만 역시나 고향에 올라가면 언제나 바빠진다. 그동안 밀린 사람들을 만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착한 동생을 위로하기 위해서 별도의 시간을 마련해야 했다.

 

이번 서울 일정도 정신없이 바쁘게만 흘러갔다. 육아 휴직을 하면서 6살 딸과 가까워진 덕분에 아빠가 집을 비운다고 하니 어린이날 전에 와서 같이 놀자고 손가락 걸고 약속을 하고 집을 떠나왔다. 그 약속 때문인지 빨리 집에 가서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종종 들었다. 아픈 어머니를 옆에 두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고 이기적으로 느껴졌으나 부모라는 타이틀 때문에 삶의 우선순위가 변화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 일요일까지 모든 일정을 정신없이 마치고 마지막 날을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보냈다. 요즘 동네 고깃집을 가시는 것을 좋아한다는 동생을 말을 듣고 어머니를 모시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런 흔한 시간조차 나중에 그리움으로 남을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고기를 먹던 중에 갑자기 오른쪽 어금니가 너무 아파서 먹을 수가 없었다. 종종 있던 일이라 무시하고 식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 다 같이 영화 거실에 앉아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 누웠다. 그런데 갑자기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 본 고통이 나를 찾아왔다. 오른쪽 얼굴이 터질 것 같이 아프고 머리는 깨질 것만 같았다. 어떤 포즈를 취해도 고통을 사라지지 않았다. 나의 신음소리에 동생은 방으로 찾아와서 진통제를 주면서 증상을 물어봤지만 설명할 수 없어서 약을 먹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새벽에도 몇 번이나 잠에서 깨서 진통제를 더 먹고 겨우 통증을 다스릴 수 있었다.

아침이 되니 진통제 때문인지 약간 상태가 좋아져서 다행히 운전을 해서 익산으로 내려왔다. 차속에서 통증을 원인을 계속 생각해 보니 아마도 사랑니가 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뿐이 들이 않았다.

 장시간 운전을 해서 겨우 집에 도착을 했다. 현관문을 여니 딸이 한 걸음에 달려와서 안겼다.


"아빠, 내가 정말 많이 많이 보고 싶었잖아..."라고 말하며 내 목을 얇고 부드러운 두 손으로 꼭 껴안았다. 잠시 아픈 것도 잊은 채 딸과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겨우 1주일이 지났지만 1년이 지난 것만 같았다.

딸을 목욕시키고 같이 저녁을 먹고, 동화책을 읽어주고 평소와 같은 저녁을 보내고 침대에 누웠다. 잠을 청하려고 하였는데 약 기운이 떨어지면서 심한 오한과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해열제를 먹고 다시 잠을 청했지만 몇 시간이 지내서 열은 40도를 넘었고 나는 홀로 침대에서 고통 속에서 신음을 했다. 방 세 칸에 세 식구가 따로 잠을 자는 우리 집이기에 내가 아픈 것은 아무도 모르고 다들 평온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 뜬 눈으로 고열과 싸우며 아침 해를 힘겹게 맞이했다.


 다행히도 아침이 되자 열이 조금 떨어졌고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선별 진료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코로나 테스트였다. 말로만 듣던 콧속의 고통을 실감하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집에서 격리하고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는 어린이날이었다. 48시간 안에 결과가 통보된다고 말을 듣고 다시 물어보았다.

 

"혹시 결과를 오늘 안에 받아 볼 수는 없나요?"


진료소에서는 그건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해열제의 효과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온 몸을 떨면서 다시 집으로 운전을 해서 겨우 도착을 했다. 다시 약을 복용하고 침대에 눕자 갑자기 걱정이 밀려왔다.

'만약 내가 코로나 양성이면 어떡하지? 어제 딸하고 스킨십도 하고 같이 밥도 먹었는데... '

'혹시, 안 그래도 몸도 좋지 않고 인지도 안 되는 어머니가 나 때문에 코로나에 걸리면 어떡하지??'

이런 식으로 생각은 끝도 없이 밀려오면서 두려움이 찾아왔다. 큰일 났다. 제발 양성만 아니기를 바라면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침대는 땀으로 젖어 있었고, 머리는 터질 것 같은 고통과 온몸은 추위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나는 겨우 핸드폰을 들고 가족에게 현재 상태와 코로나 검사를 한 것에 대해서 설명했다. 영어로 보내지 않고 한글로 보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불평을 가지면서 어렵게 문자를 보내고 한 가지를 당부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격리니까, 오늘 퇴근해서 내 방에 절대 들어오면 안 되고, 딸에게 잘 설명을 해달라고 했다."


어느덧 저녁시간이 되고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흘러도 열은 40도를 유지했고 나는 배웅하고 싶어도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나갈 수도 없었다. 검사한 지 7시간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검사 결과는 오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딸은 아빠를 큰 소리로 외치면 찾고 또 찾았다. 이유는 어린이날 선물 때문이었다. 한 달 전에 약속한 선물을 위해서 꼬박 기다려온 딸이었다. 나는 가족에게 영상통화를 하자고 했고 딸에게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6살 딸은 방과 방 사이에서 통화하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내는 온 힘을 다해서 딸을 달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본인들도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온 가족은 코로나 검사 결과만 눈 빠지지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확진이 되었을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해서 나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당연히 온 가족이 격리가 될 테니..... 딸 선물을 사러가 지도 못 할 것이고 그러면 딸이 실망할 것을 생각하니 그 무엇보다 속이 상했다. 물론 그보다 걱정인 것은 나 때문에 혹시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날 밤은 정말 미치도록 길고 무섭고 고통스러웠다. 몸 상태도 계속 아프고 결과는 늦은 밤이 돼도 오지 않았다. 나는 걱정과 고통 속에서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깨고 자고를 반복하면서 작은 내 방에서 어린이날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이 돼서야 열이 내려서 겨우 잠이 들었고 눈을 뜨니 아침 9시였다. 바로 핸드폰을 누르고 문자함을 터치했다.

익산보건소에서 메시지가 와있었다. 두 군 거리는 마음으로 터치를 했다.


"검사 결과는 음성입니다"

나는 너무 기쁜 마음에 아픈 몸도 잊은 채 방문을 열고 딸에게 갔다. 아침 먹고 우리 딸 어린이날 선물 사러 가자! 딸은 함박웃음과 환호를 지르며 내 품에 안겼다.

그리고 깨질 것 같은 머리와 고통스러운 통증을 참으며 장난감 매장으로 가서 그토록 원하던 장난감을 사줬다. 그 작은 선물 하나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하는 딸을 보니 그 순수함에 내 몸도 치유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문득 코로나로 인해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겪었을 불안감과 걱정을 공감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동안 남일 대하듯이 '우리만 아니면 되지'라고 이기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무한의 반성도 하였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고 결국 그 고열의 원인 급성 치주염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소견을 듣고 멀쩡한 어금니를 뽑았다. 염증 때문에 미취조차 되지 않아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면서 이를 뽑고 항생제와 약을 먹으니 신기하게도 열이 내려갔다. 아마도 내 생에 가장 기억에 남는 어린이날로 기억될 것 같다. 그리고 하루빨리 코로나에서 벗어나서 어쩌면 속옷처럼 우리의 한 몸이 돼버린 마스크를 벗고 밖을 돌아다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코로나19 #선별진료소 #코로나음성 #어린이날 #격리대상자 #부모마음


글쓴이의 첫 에세이 #보잘것없는 사람..

이미지 출처: goog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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