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 방학 일정이 나오자 아내는 분주해졌다. 일정을 확인하고 비행기를 알아보았다. 코로나로 4년 동안 가지 못한 친정에 가기 위한 준비였다.
이방인의 모습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아내가 잠시 자국민으로 돌아가는 짧고 행복한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5년 전에 딸아이와 함께 캐나다를 갔을 때 아내는 행복해 보였다.
오랜만에 고국에 온 아내에게 이곳저곳에서 연락이 왔고, 스케줄을 조율하느라고 약간 스트레스도 받아 보였지만 한국에서 거의 아무 연락도 안 오는 것과 비교할 때 행복해 보였다. 나름 심심했지만 어린 딸을 돌봐주고 아내를 따라다니는 것으로 캐나다 일정을 마쳤다.
내게는 큰 감흥이 없었다. 여행자의 모습이기도 하면서 다문화 가정을 핑계 삼아 직장에 말하고 장기간 휴가를 눈치 안 보고 가는 정도였다.
그리고 올해는 어머니 문제, 대학원, 직장 등등 아내가 같이 가자고 해도 딸과 아내 둘만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끝까지 내게 같이 가자고 묻지 않았다.
지난 5년이라는 세월 동안 딸은 3살에서 8살이 되었고, 나는 삼십 대 중반에서 사십이 되었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고 우리 부부의 관계는 더 악화되었다. 자녀 양육 문제는 아이가 크면 클수록 의견충돌로 이어졌다.
캐나다 양육방식과 한국의 방식은 말과 글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달랐다. 누군가 양보하기에는 살아온 모든 정체성과 방식을 바꾸는 일이기에 우리는 누군가 손만 대면 끊어질 것 같은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기싸움을 했다.
정답이 아닌 것은 알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회피를 선택했다.
이유는 딸아이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최대한 보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지금 와서 보면 그런 노력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 같이 가면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린 스스로를 원망하려고 노력했다. 서운함을 가지는 것조차 과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첫 방학 중 거의 대부분 시간 동안 딸아이를 보지 못하는 것이 짜증났다. 그리고 아내가 상의도 없이 그 소중한 시간을 내게 빼앗아간 것처럼 느껴졌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지만 사이가 좋지 않고 소통이 멈추면 감정은 끝도 없이 추락한다. 아이와 추억을 많이 만들고 싶어도 평소 바빠서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고, 벌써 8살인 것에 세월을 실감하고 있었다.
조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여자 아이라서 아빠와 곧 거리감이 생길 것 같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마음을 아내에게 이야기 전혀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찾아왔다. 내 심정을 말하는 것인데 아내는 과격하게 반응했다. 물론 언어적 문제가 소통의 장애물인 것은 알고 있지만 결국 한쪽이 언제나 폭발했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아내는 출국날을 기다리면 준비를 하였다. 나는 무관심하게 지켜봤는데 어느 날 아내가 내 방으로 와서 카드 결제가 안된다고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언제나 아쉬울 때만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그 모습이 썩 반갑지는 않았지만 군소리 없이 확인했고, 결국 외국인 명의로 만든 우리나라 신용카드가 문제였다. 그래서 내 카드로 아내와 딸의 비행기 표를 샀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비행기 값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아내는 집에 가는 것이고, 딸아이는 어학연수를 간다고 심플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이 정도 돈은 충분히 아직은 가족이자, 남편인 내가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월급 받으면 꼭 돈을 주겠다고 덧붙이며 쌀쌀한 흔적은 남기고 방을 떠났다.
하지만 출국을 며칠 앞두고 월급이 안 들어온다고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원래 조금 밀려서 들어오던 곳이라서 나는 놀랍지 않았지만 그 돈을 포함해서 경비를 계산했던 그녀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불안은 딸에게 과민한 행동으로 나타났고 나는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내가 줄게. 나중에 천천히 돌려줘."
난 이렇게 말하고 계좌로 추가로 돈을 입금했다.
아내는 싫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온 지 8년이 되었다. 연애까지 11년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 아닌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행동도 살다 보면 적응이 된다. 평소 니 거 내 거를 아주 끔찍하게 구분하는 아내이기에 내 돈을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받는 것이 참 신기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자기 나라 가서 가난하게 지내는 것은 또 보기 싫은 것이 묘한 남편 감정이었다.
게다가 딸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분명 아내 성격에 돈이 부족하면 딸 앞에서 '돈 없어'라는 말을 수천번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싫었다.
이런저런 속마음을 어디에 표현할 곳도 없어서 그냥 직장에서 휴가 계획을 물어보면 나는 3주간 휴가를 받았다고 쓴웃음을 지으면 말했다. 뭐 그리 오래 어디를 가냐고 물어주면 아내가 집에 간다고 말하면서 그냥 수다를 떨었다. 속사정을 잘 모르는 동료들은 부럽다는 눈치로 한국에 남은 3주 동안 무엇을 할 거냐고 묻고 또 물었다.
그들은 정말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사실 평범하게 가족들과 국내 휴양지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그들이 나는 더 부러웠다.
가족들은 다 떠나고 혼자 집에 남아 반려견과있는 것이 행복은 아니었다.
by 고용환
그리고 시간은 흘러 출국 전날이 왔다.
집은 난장판이었다.
퇴근해서 떠나기 전 가족들과 외식을 가자고 말하려고 했다. 근데 마침 영어로 카톡이 왔다.
"짐 싸고 마지막 확인 좀 혼자하게 딸이랑 둘이 나가서 3시간 정도 밥 먹고 와."
명령도 이런 명령이 어디 있나 싶었다. 뭐 딸이랑 보내는 시간이 부족한 것이 맞으니 알겠다고 쿨하게 답장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딸아이는 외출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딸아이 손을 잡고 삼겹살을 먹으러 향했다. 8살이 된 딸은 캐나다가는 것에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 3번째 캐나다 여행이지만 이번 여행은 아마도 평생 기억할 것이 분명했다. 둘이 식당에 가서 딸에게 고기를 잘라서 주었다. 눈물샘이 마른 줄 알았는데 이상한 감정이었다. 눈물이 흐르려고 했다.
딸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자극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지금 사는 꼴이 참 별로라서 그리고 딸에게 미안해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조금 더 행복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래야 이 녀석이 커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 텐데. 미안해서
그래서 눈물이 흘렀다.
아빠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딸은 캐나다 가서 하고 싶은 것들과 고기가 맛있다고 내 앞에서 열심히 먹고 또 먹었다.
다음날 아침
평소 서울에 아픈 엄마를 보러 가자고 하면 장거리 운전은 멀미하고 싫다고 5년 동안 겨우 한 번 올라간 아내인데 이번에는 인천공항까지 데려달라고 당당히 부탁했다.
참 밉상이다 싶었지만 거의 이민 수준으로 싼 짐들을 보면서 딸아이가 고생할까 싶어 휴가를 내고 이른 아침 공항으로 향했다.
차 안에 공기는 차분했다. 아내와 나는 평소처럼 대화가 없었고 그 공간을 딸아이가 조잘거리며 채우고 있었다. 어느덧 2시간 정도 운전을 했고 가족은 내게 반려견 산책이랑 먹이 주는 것 등등 온통 강아지 이야기만 했다. 사람 새끼도 집에 남아 있는데 말한다는 것이 오로지 강아지 이야기라니. 참 그녀 다웠다.
대꾸하기 싫어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미 딸아이는 뒷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그냥 아내도 빨리 잠들었으면 했다. 듣기가 싫었다.
냉장고는 텅텅 비어서 남은 거라고는 곧 버려야 하는 상추와 과일 몇 개가 전부인데 강아지 사료를 꺼내두었다고 말하는 그 입술이 참으로 밉상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 귀를 아주 크게 열고 모든 영어를 독해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아내의 말을 무한 패스시켰다. 스트레스받기 싫어 본능적으로 체득한 되었다.
반려견 걱정을 더 하는 아내의 모습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런 사람이라고 알고 있고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반려견까지 데리고 가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적어도 반겨주는 식구가 남아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