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남긴 글이 흔적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를 직접 알고 있는 사람이 내 글을 꾸준히 읽고 있다면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을 짐작해 본다. 왜냐면 어떤 관점에서는 안타깝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이 글이 소설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상상 속에 시나리오라면 어떤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죄책감이 적을 것이다. 그런데 속이 아프고 안쓰럽다. 이유는 소설이 아니고 현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억울하다. 태어나서 이보다 억울하고 화가 나면서 미묘한 분노와 함께 수많은 감정이 스쳐간 적이 없었다. 아침 출근길 운전하면서 숨이 막히면서 호흡 곤란도 경험했다.
운전 중이라서 핸들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내 심장은 계속 요동쳤다. 신호등도 느리게 변하는 것 같고 급기야 머리에 두통까지 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차를 갓길에 주차하고 잠시 심호흡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집에서 늦게 나왔기 때문에 차를 멈추면 바로 지각이었다. 이런 대우를 당해서 늦었다고 지각해서 상사에게 사실대로 말하기도 싫었고, 거짓말로 꾸미기도 싫었다.
아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이렇게 힘든 출근길은 20년 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처음이었던 거 같다.
살면서 수 없이 많은 일을 경험했다. 물론 그 시간들도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과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도착했는지도 모르게 겨우 직장에 도착해서 책상에 앉아서 심호흡을 했다.
역시 진정되지 않았다. 동료들이 오가는 모습도 슬로우 모션으로 느껴지다가 갑자기 빨리 감기를 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이건 악몽이라고 내게 체면을 걸어도 현실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기관지 내시경하고 최근에 속이 좋지 않아서 약 먹으며 두려움 속에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 내가 당한 일은 아직 원인 불명인 그 병을 더 키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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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아주 하찮은 말 한마디로 시작되어 말 한마디로 나를 고통속에 몰아 넣었다.
어머니 집을 이사하기 위해 오늘 반가를 시작으로 금요일까지 이틀 동안 휴가였다. 그래서 아침 출근길에 짐을 싸서 분주히 움직였다. 이런 행동을 서로 관심 가지거나 대화를 하면서 지내는 부부사이가 아니기에 나는 짐을 샀고 가족은 딸과 식탁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내게는 전혀 먹으라고 말도 안 하는 그 아침식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서운한 감정도 없었다. 그냥 난 빠진 것이 있나 체크하고 가장 두 개를 꾸려서 현관 앞에 섰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적어도 딸에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한국어로 말했다.
"딸! 아빠, 할머니집에 다녀올 거야. 학교랑 학원 잘 다녀오고."
딸은 그냥 식탁에 앉아 있었다. 배웅은 우리 집에 없는 문화였다. 나는 그냥 딸에게 의무감에 말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내가 영어로 소리쳤다.
"왜 자기에게는 말을 안 하냐고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일들을 서로 공유했는가? 그리고 엄마가 치매든 요양원이든 언제 한번 시어머니가 괜찮냐고 물어나 봤는가?
전혀 관심도 없던 사람이 내가 딸에게만 한국어로 말했다고 시비를 거는 것이 황당했다.
나는 그냥 한국어로 말했다고 말을 던졌다. 그런데 버럭 짜증을 냈다. 본인이 분노조절 장애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람 듣기 싫은 말로 시비를 걸고 모른 척 뻔뻔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오는 그 행동은 나를 너무 지치고 미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현관문에서 다시 집으로 들어가 식탁에 가서 설명했다. 그런데 아내는 딸 앞에서 나를 무시를 했다. 마치 육아는 자기한테 모두 떠넘기고 내 맘대로 사는 그런 하찮은 남자쯤으로.
무시하는 아내, 문법도 발음도 다 엉망이 된 영어로 말하는 우리 모습을 보고 딸아이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고개를 식탁에 처박고 있었다.
처음 보는 장면은 아니었다. 이 장면을 몇십 번은 봤다.
딸은 우리가 이야기하다가 다툼으로 가면 어느 순간부터 이런 행동을 반복해서 보였다.
이제는 엄마 아빠가 그냥 대화 비슷한 것을 해도 이렇게 반응했다.
나는 우리 부부가 딸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망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래서 더욱 매듭을 짓고 가기 위해 딸에게 방에 가 있을라고 했다.
3일 동안 집에 못 들어오는데 이렇게 불편하게 출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가 무언가 잡았다는 눈치로 딸아이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들어가지 마! 네 아빠가 나한테 소리치려고 하는 거야!"
소리 친적이 없는데 몰아세웠다. 그 말을 듣고 동상처럼 굳어서 식당 뒤에 서서 딸과 아내를 몇 십 초간 응시했다. 그랬더니 가족이 딸을 앉고 무섭다고 딸을 앉고 베란다고 갔다.
뭔 짓을 하냐고 내가 뭘 했다고 그러냐고 말해도 전혀 듣지 않았다.
나는 베란다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고 아내는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무섭다고 말했다. 딸아이는 아내 품에서 울고 있었다. 누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폭력적이고 폭행을 몇 번 한 사람을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난 그런 집안에서 성장도 안 했고, 학창 시절에도 그렇게 지내지 않았다.
더 나를 무너지게 한 건
울고 있는 딸을 앉고 경찰에 나를 신고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경찰이라는 말에 어린 딸은 나를 쳐다뵜다.
그 작은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나를 원망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서로 소리 지르며 싸운 적은 있다. 없다고 할 수 없다. 부부싸움보다 감정이 더 진하고 묵직하며 서로를 증오하는 언행으로 몇 번이나 자녀 앞에서 싸웠다.
나는 엉망이 된 마음으로 하루 종일 업무에 집중을 못했다. 아니 집중이 전혀 안되었다. 동생은 이사 문제로 문자랑 언제 출발하냐고 톡을 했다. 그조차 나는 무시하고 싶었다. 결국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날 것 같은 불안감에 나는 정말 믿고 지내는 대선배 사무실로 찾아갔다. 이토록 나약한 인간이라는 게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앉았다. 상사는 내가 건강문제로 찾아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내 표정을 보고 사무실 문을 닫았다.
"무슨 일 있어?"
나는 그 질문에 처음에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부끄럽고 쪽팔리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꼴로 살고 있다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나름 한 직장에서 아랫사람들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내가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느꼈다. 이 상태로 누가 누구를 관리하고 일을 처리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살기 위해 한참 딴 이야기를 하다가 상황을 설명했다. 상사는 깊게 한숨을 몰아 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아픈 것도 이런 상황과 큰 관련이 있다고 봐. 이거 사람이 살 수 있겠어? 나라도 못 살지. 몸도 마찬가지고."
나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냥 시선을 사무실 모서리에 두고 멍하니 말을 듣고 있었다. 선배는 말을 이었다.
"아마 본인이 충분이 예전부터 알 것 같은데. 이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건 딸도 자네 가족도, 그리고 자네도 모두 불행하잖아.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아. 물론 딸아이 양육권 때문에 계속 이렇게 사는 건 알지만 그래도 너도 살아야지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쉽다."
이혼이라는 말이 다시 나왔다. 숨기고 감추고 덮어도 어느 정도 기간이 흐르면 내 마음속에서 아니면 주변 지인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요즘 세상에 흠도 되지 않는 그 이혼이라는 단어가 말이다.
나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선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 원짜리 캔커피만 서로 마실 뿐이었다.
알고 있다. 나와 가족은 절대 회복이 불가능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부부사이가 이렇게 흘러가면 남보다 아니 원수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이혼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혼 변호사까지는 아니어도 아는 사람을 통해 알아보고 인터넷으로 양육권과 절차에 대해서 살펴봤다.
국제이혼이기에 더 조심스럽기도 했다. 자녀를 캐나다로 데리고 가면 나는 어찌 살란 말인가? 그냥 이 나라에 두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니 다시 쿨하게 새 출발하고 지난 10년 가까운 시간을 지우면 된다고 싶게 말할 수는 없다.
나의 삼십 대에 내 딸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 시간은 내가 아무리 집이 싫어도 매일 들어가서 쪽방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출근하게 해 준 원동력이자 삶 그 자체였다. 그리고 딸은 아직까지 아빠를 필요로 한다.
엄마의 모성애가 무슨 신의 영역처럼 여겨지지만 아빠의 부성애도 사랑이고 그 역할이 확실히 자녀에게 필요하다.
특히 강압적으로 자녀를 키우는 딸에게 나는 가끔 숨 쉬는 공간이 되어준다. 딸은 참다가 정말 답답하면 나를 출구로 활용한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내 삶이 다 망가지고 의미가 없어져도 그 공간이 되어 주고 싶었다. 혼자 충분히 견디고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는 한 집에서 지켜주고 싶었다.
아마 보통 엄마들의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아마 나는 우리 때문에 힘들어하는 딸을 보기 싫어서 진작 이혼을 했을 것이다. 로봇처럼 자녀를 양육하고 자기 방식이 모두 맞다고 세상 속에 외톨이로 사는 가족 방식이 아니었다면 나는 천 번도 이혼했다. 문제는 내가 사라지만 가족은 정말 자기 맘대로 자녀에게 할 것이다.
지금보다 더 일찍 재우고, 자신이 살아온 30년 전의 삶의 방식대로 자녀를 몰았을 것이다. 남의 말은 다 무시하면서 그 아이의 미래를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더 무서운 건 그렇게 하고 자기는 최선을 다했다고 뻔뻔하게 말하며 자녀에게 당당할 사람이기에 나는 내 자리를 지키려고 했다.
근데 이제는 너무 힘들다. 정말 심각하게 소송을 통한 이혼이든, 각방을 떠나서 별거이든 대책을 세워야겠다. 이 시점에 계획대로 내년에 조기 퇴직을 하면 나에게 엄청 분리한 상황이 될 것이 뻔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살다가 내가 추하게 망가져서 딸에게 원망과 고통을 주는 대상이 될 것 같다.
이런 불행 중 다행은 글쓰기라는 나름의 치유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도 키보드를 두드리며 글을 쓰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래서 미친 듯이 글을 쓴다. 어떤 측면에서는 읽는 독자분들께 미안하다.
밝고 희망에 찬 내용으로 글을 읽고 기분이 좋아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재주는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댓글이 뜸한 브런치지만 글을 남겨주면서 위로와 마음을 표현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힘이 된다.
어떤 결말로 마무리기 되어도 후회는 따른다. 그 후회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절대 알 수 없다. 그래서 인생이 다채롭고 힘들고 소중한 것 같다.
마음을 정리하고 동생집을 이사하기 위해 짐을 싸고 또 샀다. 육체적인 노동은 잠시 정신을 깔끔하게 청소시켰다. 그러다 밤이 되면 다시 고통스러웠다. 물론 목요일 저녁까지 가족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이런 꼴로 나를 보내고 그 사람은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이 뻔했다. 그런데 딸아이가 목요일 학원 버스를 타기 전에 내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데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위치 추적을 해보니 딸아이 휴대폰이 학원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핸드폰도 사주는 것을 반대해서 한참 고생해서 딸에게 스마트폰을 사줬다. 적어도 버스를 타고 학원을 가는 아이와 연락할 대책이 필요했다. 나는 나와 이런 일이 있고 가족이 딸의 폰을 빼앗았을까 봐 걱정했다.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전화를 하지 않은 딸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 카톡을 보냈다.
"우리 딸, 휴대폰 학원에 두었네. 전화 안 와서 아빠 걱정했어."
다음날 학원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는 시간쯤 딸에게 전화가 왔다. 이사를 한참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기뻤다. 딸은 평소처럼 무슨 일을 했는지 내게 그 여리고 이쁜 목소리로 말을 해줬다.
나는 알겠다고 잘했다고 대꾸를 하면서 짧은 전화를 했다.
더 이상 말이 없어서 이제 끊으려나 보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딸이 말을 이었다.
"근데 아빠, 왜 엄마한테 소리지리고 화를 냈어? 나 베란다에서 무서워서 울었잖아."
잔잔했던 내 심장은 다시 파도치기 시작했다. 그런 적이 없는데 딸에게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다.
나도 모르게 8살 아이에게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그것은 변명이 되었을 뿐이었다.
더 이상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학원 버스에서 스피커 폰으로 딸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엄마한테 소리나 지르는 아빠가 된 지금 나는 함구하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나는 급하게 알았다고 답하며 내일 집에서 보자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더는 통화를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동생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심장이 멈춘 사람처럼 굳은 표정이 되었다.
동생은 그저 나를 바라봤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떠나기 전날 동생은 짧게 말했다.
"형을 위해 살아...."
엄마라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하고 무서운지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그것은 엄마의 가스라이팅이었다.
맨날 늦게 들어오는 아빠를 찾으면 엄마는 우리를 위해서 밤늦게 까지 일하는 거라고
항상 말했다. 아빠가 집에 오면 현관까지 나가서 꼭 인사를 해야 한다고 말도 해줬다.
그리고 아빠는 우리 형제를 정말 사랑한다고 말해줬다.
그래서 지금도 난 돌아가신 신 아빠가 그립다. 물론 수많은 사고를 쳐서 우리를 힘들게 했고 엄마의 말이
모두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은 알지만 그럼에도 내 기억 속에 아빠는 우리 형제를 사랑하고, 열심히 우리를 위해서 일하고, 존경받아야 하는 가장이라고 엄마의 입을 통해서 몇 십 년을 들었다.
가스라이팅 당한 것이다.
지금 내 딸이 당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내 때문에 범죄자가 되었고, 자녀에게 노력도 안 하고 매일 화만 내고, 위협을 주는 그런 나쁜 아빠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