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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Dec 12. 2020

아버지를 취조하는 아들

아버지와 반대로 살기로 했다

도대체 이 얼마예요?


  저녁 10시가 넘어서야 아버지가 집에 오셨다. 나는 동생에게 이런 상황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잠시 게임방에 가서 있으라고 밖으로 내보냈다.     

아버지에 말을 했다.     

“여기 앉아 보세요.”     

정말 힘없이 앞에 앉은 아버지에게 별것도 없는 자식이 취조하듯이 묻기 시작했다. 질문에 답변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호통을 치면서 말을 이어갔다.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는 어머니도 이렇게 벌어진 모든 상황도 정말 도망치고 싶었다. 차라리 남의 집 일이고 내가 술한잔 먹으면서 조언이나 해주는 그런 역할이 였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나는 앞에 노트북을 두고 아버지의 부채내역을 상세하게 적어 내려갔다. 독촉장 이외에도 더 많은 부채가 있었다. 대략 모든 부채를 금융회사별로 정리를 다 했을 때 조심스럽게 아버지가 말을 꺼냈다.     

“사실, 이건 내이름은 아닌데 내가 부탁해서 내 친구가 자기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서 빌려준 돈도 있어. 근데 이건 급한거 아닌거 같아.”     

더 이상 평정심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난 참고 참다가 오열을 하고 말았다.

고함을 치고 도대체 10년 가까이 일하면서 집에 돈이라고 80만원 가져다 주고 그것도 다시 빼서가고 아들에게 전화해서 돈 좀 달라고 하서 몇 백만원씩 가져가놓고 무엇을 하느라고 이런 을 만들었냐고 한없이 고함을 치고 나니 눈물이 났다.      


사실은 아버지가 도박 비슷한 것을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경마인 것 같아서 그냥 스트레스 푸는 것이구나 하면서 넘어 갔었는데 오로지 경마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이 생긴 것에 대해서 나는 도무지 납득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을 다 확인하니 대략 2억 가까운 금액이었다.     

한바탕하고 다음날 나는 부대에 복직을 하겠다고 보고를 했다. 왜이리 일찍 복귀하냐는 말에 그냥 웃으며 일이 생겨서 복직한다고 하고 성급히 전화를 끊었다. 복직은 현재 상황으로 바로 할 수 없기에 한 달 뒤에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사장이자 예전에 아버지 친구였다.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만나러 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되냐고 말했다. 당황한 듯이 아저씨가 말했다.      

“니가 왜? 나를 보려고 하냐?”     

그래서 아버지 문제로 여쭙고 싶은게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의 전 재산인 내 명의로 된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들고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생각했다. 내가 아버지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이유는 그래도 한 때는 같이 석유배달을 하면서 많은 돈도 벌고 주변 친척들도 같이 일하게 도와주고 하면서 몸뚱이 하나로 열심히 살았는데 돈 관리 잘 못하고 시기 판단을 못해서 장사는 망하고 그렇게 되다보니 주변 친척들로부터 질책을 들으면서 살았던 아버지였다. 그리고 같은 업종에 종사했던 사회 친구인데 누구는 큰 주유소가 몇 개나 있는 사장이 되었고 아버지는 몇 년을 백수로 보내며 자식의 협박 아닌 협박에 할 수 없이 친구 밑에서 일을 해야 하는 남자의 입장을 생각할 때 불쌍하게 느껴졌다. 나또한 어린 나이부터 사회생활을 접하면서 얼마나 이 세상사는 것이 더럽고 어려운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부사관이 되어서 아버지보다는 어리지만 대선배들이 어린 지휘관들에게 굽신 거리며 하루 하루를 버티는 모습을 보면서 그 누구라도 가장이 된다면 그 무게감과 고독감은 어떻게 충족할 수 없는 것 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이 감정은 동정심이거나 내가 어른이 되고 있다는 증거인거 같았다.


일산에 도착해서 주유소로 향했다. 도착하니 아저씨는 방으로 들어오라고 말을 했다. 나는 궁금해 하는 아저씨에 내가 여기 온 목적을 설명하였다.


부채 때문에 왔고 개인적으로 경마로 이 많은 빛이 생긴 것이 이해가 되지 않기에 혹시 다른 살림을 차린 것이 있냐고 알고 있다면 말해달라고 했다. 사실 오래 전 일이지만 아버지가 외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자퇴를 하고 일을 하고 있을 때 였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차에서 다른 여자와 내리는 것을 보았다. 물론 당장 뛰어가서 뭐라도 물었어야 했으나 그렇지 않겠지 하면서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아 보였다. 물어보니 안방에서 다른 여자 머리카락이 자꾸 나온다는 것이 였다. 그때 나는 그 여자가 내연녀라는 확신을 하였다. 이후에 정신 없이 시간이 흘렀고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아서 나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것을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아저씨는 자신이 알기로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였고 친구처럼 지내는 아줌마가 있는데 그건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단정하셨다. 그리고 나는 집문서를 아저씨에 건냈다.

   내 명의로 되어 있는 23평짜리 경기도에 있는 소형 아파트였다. 집없는 서러움 때문에 한푼도 아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거지같이 입고 다닌다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모은 돈으로 매입한 아파트였다. 투자를 해서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한 것은 아니였다. 단지 난 내이름으로 된 집을  가지고 싶었다. 좋지 않은 환경탓인지 집에 대한 애착은 더 심해졌고 누구를 만나든 결혼을 하면 최소한 어디에 살아야할지 걱정하게 말들고 싶지 않았다. 발품을 팔고 틈나는대로 확인해서 오래된 아파트지만 그래도 쾌적하고 나중에 신혼집으로 해도 될 것 같은 나의 전 재산 이였다.

아저씨는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건 뭐냐?”      

아저씨 에 대해서 잘 조치가 안되면 이 집 아저씨가 사주세요. 집을 급매로 팔아서라도 을 막아야 한다면 시세보다 적게 받게 될 텐데 나쁜 매물아니고 현재 오르고 있느니 제 시세에 사주시면 제가 아버지  이걸로 갑으려고 합니다.     

아저씨는 양주를 한잔 마시며 한없이 문서를 바라보았다.      

“그래, 일단 뭐 해보고 안되면 다시 찾아와라.”    

  

난 친하지는 않지만 그 아저씨와 함께 어릴적에 몇 번 여행을 간적도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큰 부자가 됐는지도 대략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거만해 보이지만 나름 인정있는 분이라는 것도 그날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나를 미워하지 말라고 모든 말이 끝나고 아저씨가 말했다.     

본인 그래도 친구라고 추가로 수당도 챙겨주고 적어도 가장 노릇할 수 있게 10년전부터 급여를 나름 챙겨줬다는 것이었다.

바로 물어보았다.     

“얼마를 주셨는데요? 아버지는 집에 10년전부터 지금까지 80만원 뿐이 준적이 없는데 그래서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았는데 많이 주셨다고요?”     

아저씨는 놀라면서 말했다.   

  

“적어도 10년전에 250만원은 맞춰줬고 최근 월급은 거의 수당포함하면 거의 400만원 가까이 되는데 무슨말을 하는거냐? 그리고 니 영국가는데 돈이 부족하다고 목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또 300만원 정도 줬는데”     

그나마 남아 있던 동정심도 그 순간 산산조각 나서 영원히 사라지는 느낌이였다. 그정도 급여 였으면 꼬박꼬박 성실히 저축하고 아껴 썼다면 다시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돈인데 도대체 어떻게 무엇을 하셨길래 이렇게 된 건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큰 아들까지 팔아서 밖에서 돈까지 받아야 했는지 나는 배신감에 말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걸음이 너무도 무거웠다. 혼자 인생이 힘든 것만 같았고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괜히 만나면 도움도 못 받을거면서 하소연만 하게 되고 스스로 인생만 비참해 지는 느낌을 받을 것 같았다.     

한동안 아버지는 일찍 집에 들어오셨다. 본인도 미안한지 말없이 텔레비전만 보고 있는 모습이 나를 더 화가 나게 만들었다. 나는 정신없이 각 기관별 부채에 대한 연체이자와 원금을 확인하고 있었다. 기간과 함께 확인해 보니 신용카드론 대출을 가장 먼저 받기 시작했고 돌려막기 식으로 다음 카드를 사용하고 그것도 안되니 제3금융권에 고금리 대출을 받아서 연체된 부채를 상환하는 식으로 6년동안 을 늘려온 것 이였다. 중간 중간 날자를 확인하니 나에게 전화해서 급하다고 가져간 금액들도 모두 이곳에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대출을 부탁한 것도 더 이상 추가 대출을 받을 곳이 없기에 부탁한 것이 였다.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이전에 석유장사를 할 때 그렇게 돈 관리를 못해서 남들은 모두 많은 저축을 하면서 일을 하는데 부채가 늘어나서 고생한 기억을 부모님들은 가지고 계신다. 그렇게 고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선을 하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충격적이였다. 새집으로 이사하기 전에 어머니와 단둘이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했다.


열심히 살아도 어떤거 하나 변하는 것이 없는 삶이 힘들다고 했다. 나는 엄마를 위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에게 가장 큰 책임은 아빠보다 엄마라고 말하였다. 이유는 엄마는 아빠에게 아무런 잔소리도 안하는 스타일였다. 거기에 과소비도 안하고 취미생활도 없으며 오로지 가족만을 위하는 그런 헌신적인 여자이다. 하지만 난 이렇게 살기 싫으면 아빠에게 잔소리도 하고 월급에 대한 관리도 전체 금액을 받아서 아빠에게 용돈을 주어야지 돈 관리 못하는 사람에게 매달 생활비 80만원 받아서 살면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을거라고 엄마를 질책했다.      


성격상 힘든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했더라면 최소한 이런 사태는 예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아버지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인생을 살았었다. 연봉이 얼마인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밤 늦게 들어와도 아무런 잔소리도 없고 집안에 자식들은 일치감치 보통사람의 삶을 포기하고 본인들 스스로 살길을 찾아 나셨다. 본인이 걱정할 것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아버지 빛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두 분을 모시고 조용히 거실에 앉아서 종이 한잔을 건네 드렸다. 바로 합의이혼서류였다. 솔직히 이 을 내가 가진 아파트로 상환하든 아니면 현재 어머니 집을 급매로 팔고 상환하든 최대한 능력 범위 내에서 가능한 일였다. 하지만 더 이상 이런 상황을 반복해서 살고 싶지 않았다. 무엇인가 결단이 필요했다. 끌려다니면서 모든 노력과 열정의 대가를 이렇게 낭비하기에는 너무도 소중한 삶이 아까웠다.

아버지는 당황한 표정이였다.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관용을 베풀 듯이 말을 했다.     


“이혼해도 얼굴은 보고 살거니까 걱정하지 마요.”

“그리고 이제라도 아버지도 책임을 지고 사셔야죠. 언제까지 우리한테 고통만 주지 말고요”     


그리고 두 분이 생각을 하시라고 집을 나왔다. 공원을 걷으면서 한없이 생각을 하였다. 참으로 못나고 매정한 자식을 뒀다고 생각하실까? 내가 부모라면 그래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애써가면서 살아온 시간이 있는데 한순간에 잘못 했다고 남남으로 살자고 하는 아들놈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면서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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