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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슬픔도 감춰주는 AI 지브리 스타일

by 고용환

모든 것은 결국 자리를 잡아간다. 자기가 돌아갈 곳을 향해 이동한다. 2월 초 새로운 터전으로 이사하고 추운 날의 연속이었다. 바람은 모든 것을 날려버릴 듯 거침없이 불었고, 익숙하지 않은 주변 환경은 마음까지 서늘하게 만들었다. 세 달이 조금 넘어가는 지금 이 모든 것은 천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나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어린 딸아이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서 어색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 편안해졌다.


그 사이에 아파트 풍경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아무것도 없이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던 가지에서는 초록색의 무엇인가가 다시 떨어질 날을 기다리며 나기 시작했고, 남들보다 조금 앞서 가고 싶은 벚꽃은 이미 그 짧고 찬란한 여생을 땅에 떨궜다.


이런 신선하면서도 감격스러운 변화를 잠시 고요하게 만드는 시간이 내게는 매일 존재한다. 그건 저녁 6시 30분 정도에 동생이 보내주는 사잔 한 장이다. 침대에 누워서 콧줄을 달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다.

엄마의 모습은 언제나 같은 것처럼 보인다. 아마 자식이 아니라면, 가족이 아니라면 모든 사진이 다 똑같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같은 침대, 같은 병실 그리고 매일 거의 비슷한 포즈.


그런데 우리 형제는 그 사진 속에서 달라진 엄마의 작은 모습을 찾아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것이 우리를 이어주는 마지막 끈이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이 순간을 나중에 미친 듯이 그리워할 것을 아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거짓만은 아니다. 사실 엄마는 사진 속에서 항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인상을 쓸 때도 있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바라볼 때도 있고, 정말 모델처럼 무표정으로 벽면에 시선을 줄 때도 있다. 그리고 마음 아프게 어쩔 때는 정말 아프다고 힘들다고 표정으로 말할 때도 있다.


나는 동생이 보내는 주는 사진이 너무 나를 힘들게 한다고 고백한 적 있다. 힘든 건 사실이다. 눈에 안 보이면 그저 상상으로 존재시킬 수 있는데 눈으로 그 가혹한 현실을 보면 그 상상조차 무의미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 고통 속에서 엄마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는지 알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다. 예전처럼 나와 몇 시간씩 전화통을 붙잡고 아빠 욕부터 동생 걱정, 직장 동료들 험담을 늘어놓고 싶지 않은지 알고 싶다. 그리고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의 목소리를 더듬더듬 떠올려본다.


사진을 받고 동생에게 안부를 전하고,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나는 이런 시간을 매일 갖는다. 물론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 적막함을 아는지 딸아이가 방해꾼으로 항상 등장하고, 언제나처럼 외국스러움을 풍기며 뭔가 공감하기 힘든 일들을 식탁 앞에서 늘어놓는 가족 때문에 나는 다시 빠르게 내 일상으로 돌아온다.


2025년도 어느덧 4월의 중간 문턱을 넘어가고 있다. 무서울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감을 마흔 초반이 되어서 더욱 실감한다. 뭐를 한 것도 없는데 돌아보면 시간은 나를 떠나 있다. 떨어지지 말고 붙어 있어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고, 그렇다고 뭔가 특별히 내면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도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몸이 서서히 어느 마지막 순간을 위해 천천히 준비를 시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체력도 그렇고 시력도 그렇고 정신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저 그렇다. 그러면서 나는 엄마의 사십 대를 떠올린다.


이십 대 중반 나를 낳고, 이십 대 후반에 동생을 낳은 엄마의 인생... 엄마가 내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엄청나게 엄마를 힘들게 했다. 멀쩡히 다니던 인문계 고등학교를 하루아침에 자퇴했고, 방황했으며 엄마에게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때 엄마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빠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밤새도록 일하고, 허리 디스크로 홀로 시술을 받으러 갔으며, 주간에는 다른 일을 했다. 나는 어쩌면 그 엄마의 고통을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엄마가 힘들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엄마 옆에서 같이 드라마를 보며 엄마의 현실 도피에 같이 박수를 쳐주며 화려하면서도 약간의 고난이 있는 주인공의 삶을 같이 응원했는지도 모른다. 응원의 가치는 충분했다. 웬만하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행복해지는 결말로 삶을 마치기 때문이다.


엄마의 유일한 탈출구가 남의 인생을 부러워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갈 때쯤 그리고 그 부러운 인생의 작은 조각이라도 내가 도워줄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나는 잠시나마 그 작고 작은 조각을 엄마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더 큰 조각을 선물해 줄 수 있기를 바랐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엄마의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정말 내가 예상했던 그 어떤 시간보다 엄마의 시간은 짧았다.


엄마의 흘러가버린 그리고 지금도 멈춘 듯 퇴행하는 그 시간을, 나는 조금이라도 이쁘게 간직하고 싶었다. 그래서 동생이 보내준 사진을 지브리 스타일로 변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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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요양원에서 보시고 온 후 집에 온 엄마를 기념하기 위해 셋이서 찍은 사진이다. 새롭게 마련해 드린 엄마방 벽에 기대서 우리는 셀프로 사진을 찍었다. 오래오래 같이 살자고 말이다. 겨우 1년이라는 시간이 허락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뇌출혈로 다시 입원하게 될지 알았다면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을 텐데 후회는 참 끝이 없는 대기선 같다.


사탕으로 유인해서 같이 찍은 이 사진의 원본은 지브리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와 동생은 행복하고, 엄마는 사탕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 또한 남들이 보면 최악이라고 어찌 치매환자를 집에서 모시냐고 난리가 났던 순간이었지만, 우리 형제는 이 시간을 그리워하며 목욕탕에서 반신욕을 하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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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지브리 형식으로 전환하면 기존 이미지보다 더 좋아 보이기 마련이다. 주름도 사라지고, 작은 눈도 더 커지고, 표정도 좋아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마도 너도나도 챗 gtp를 사용해서 사진은 변환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AI도 그 슬픔을 아는지 슬픔을 그대로 담은 이미지를 내게 제시했다.


한쪽이 모두 마비된 상태에서 재활치료를 하러 매일 고단한 일정을 소화한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생각했지만 동생은 언제나 기적을 기도하고 있다. 엄마는 콧줄 때문에 그나마 자유롭게 움직이는 한쪽 손도 봉쇄당한 채 이렇게 이끌려서 이동한다.


몇 번 엄마의 재활현장에 갔지만 나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삶이 너무 안쓰러워서 보기 싫었다. 어쩌면 나도 동생처럼 기적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병원이 아닌 집에서 도란도란 지지고 볶으며 엄마를 목욕시키고, 냉장고 시위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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