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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아들, 박사 논문 심사 통과했어. 좋지?

by 고용환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쏟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끄집어내면서 혼자 끙끙거리기도 했다. 아니 '화가 났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누가 억지로 시켜서 한 일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물론 엄마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래도 박사 과정 3학기까지는 뇌출혈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집에 가서 엄마를 보고 같이 근처를 잠시 다니곤 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그런 엄마한테 아들 지금 박사 되려고 공부하고 있다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건강하셨다면 분명 좋아하셨을 테니까. 엄마는 분명 좋아하셨다. 직업군인되고 틈이 나면 계속 학교를 다니고 자격증을 따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셨다. 내게 단 한 번도 왜? 공부하냐고, 목적이 뭐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엄마는 그 모습을 지켜만 봐주었다.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한 발짝 뒤에서 아들을 바라보고 속으로 응원하는 것이 엄마의 사랑표현법이자, 응원이었다.


무엇보다 겸손을 가르쳐주셨기에, 나는 뭔가 태도를 달리하거나 거만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물론 사람인지라. 고등학교 자퇴했을 때보다 발전한 내 모습을 보며 우쭐할 때도 종종 있었지만 그런 우쭐함은 나이가 들면서 천천히 자리를 양보했다. 군대에서 나름 보직도 잘 풀리고, 원하는 것을 척척 얻어냈다. 그럴 때면 나는 가장 먼저 엄마한테 전화를 하곤 했다. 집에 잘 가지 못하니 안부도 묻고, "아들 잘 살고 있다고 걱정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짧게 고생했다고 잘했다고 말한 남기고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냥 어느 자리에서든 역할을 하고 사는 모습에 만족하셨다. 물론 여기까지 공부를 한 것이 엄마 때문은 아니다. 순전히 내 욕심이고 나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자, 결과로 증명하고 싶은 그런 깊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한 편에는 이일 저일 많았던 우리 집의 일에서 도망치는 도피처 같은 곳이었다.


그렇다고 외면하고 뭔가를 방치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생각이 많은 터라 뭔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겨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안 그러면 이미 터져버린 바꿀 수 없는 무언가에 모든 신경을 다 집중하는 게 바로 나라서 그래서 이렇게 온 힘을 다해서 정신 둘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박사과정과 논문은 내게 충분한 역할을 했다. 수료하고 바로 다음 학기에 심사를 볼 수 있게 모든 준비를 미리미리 했고, 5학기에 최종심을 통과했다. 국립대 교수님들의 깐깐하고 날카로운 지적을 받아내고, 수정하고 본심발표까지 단 한순간도 마음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도 모자랐다.

중간에 엄마 생일도 있었는데 올라가지도 못했다. 의미가 없어서 그랬다기보다는 더 큰 선물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엄마한테 천 번을 말해도 뭔가 반응이 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엄마가 이 세상에 존재할 때 성과로 만들어두고 싶었다.


아빠를 먼저 보내서 그런지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큰 차이를 잘 안다. 모든 연결이 끊어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은 돌아가신 아빠한테 느껴진다. 보고 싶어도, 만지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허하면서 허전한 감정의 집합체가 바로 작별인 거 같다. 하지만 엄마는 아직 이 땅에 존재하기에 마음이 조금은 다르다. 병세가 심한 것 때문에 서로 주거니 받거니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끔 엄마가 우리의 마음과 말을 알아듣는 것은 아닌가?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어쩌면 엄마의 치매가 보통 치매와 조금 다른 것은 아닐까? 이런 말을 동생과 종종 하곤 했다. 물론 검증할 방법은 없다. 어쩌면 그냥 우리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이렇게라도 엄마라는 끈을 잡고 싶은 마음에서 만들어낸 허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사실은 진실이다.


28일 본심을 통과하고 모든 정리와 인사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올라가기 위해 차를 앉았다. 그리고 제일 먼저 동생에게 문자를 보냈다. "형, 박사 통과했다. 이거 최종 마무리하고 곧 올라갈게." 엄마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첫 문자를 보내는 사람이 엄마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이 잠시 머릿속에 머물렀지만 현실로 곧 돌아왔다.


기분은 좋다. 뭔가 달라지거나 나아진다는 확신은 없지만 앞으로 나아갔으니. 하지만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은 여전하다. 특히 마흔이 넘어가면서 뭔가 성취에 대한 욕망도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피곤함이 따라다닌다. 좋은 것을 먹고, 숙면을 해도 이제는 그냥 몸과 하나가 된 것 같은 이 불편한 상태가 지속된 지 오래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도 늙었구나' 젊지 않다는 것의 첫 신호가 마흔부터 슬슬 오기시작하는구나. 깨달았다.


그러면서 이렇게 온전하지 않은 몸으로 우릴 보살피겠다고 아등바등 살았던 부모님이 떠올랐다. 얼마나 피곤 곤했을까. 내가 현재 처한 상황보다 더 막막한 상황이 많았던 그들의 인생인데, 도대체 무슨 재미로 이 피곤함을 억누르고 살았을까.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수 없기에 혼자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오늘도 동생이 엄마의 병실 사진을 보내줬다. 항상 똑같은 장소에서, 항상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우리 엄마.

우리 엄마 덕분에 아들이 죽기 전에 박사학위도 받아보고, 학회 같은 곳에서 발표도 하면서, 이렇게 하루하루 의미를 부여하며 살고 있으니 너무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고맙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이다.


이상하게도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엄마와 아빠가 그리워진다. 이 그리움이 나는 반갑다. 돈은 없고 가난했어도 이렇게 그리움으로 떠올릴 수 있게 해 주신 두 분이 계셨기에, 조금 힘들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았던 거 같다.


아들 다음 달에 올라가면 우리 엄마 손을 꼭 만지고 싶네. 그냥 온기만 전해줘요. 말하지 않아도 다 느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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