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중에 심하게 아픈 사람이 있으면 인생을 더 빨리 배운다. 일찍 알아봐야 도움 되지 않을 냉혹하고 차가운 뒷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떠올리는 듯하다. 우리는 싫든 좋든 주변에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간다. 아무리 내성적인 사람도 곁에 사람을 한 두 명을 두고 산다. 물론 핏줄로 이어진 친척들도 거기에 포함된다. 나는 아빠의 병간호를 하면서부터 그 관계들의 진실과 마주했다. 고작 이런 마지막인가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외로움과 싸워야만 했던 한 남자를 보면서 관계가 두려워지기도 했다.
아무리 좋은 취미를 나눠가진 사이라도 쓸모에 따라 만나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어린 시절 나는 아빠를 보면서 항상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 또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난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 생생하지는 않지만 식사를 하러 여기저기 다녔던 기억도 있고, 아빠 사무실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아빠가 자리를 잃고 지갑을 열 수 없는 상태가 되자 가까운 친척들부터 하나씩 떠나기 시작했다.
한 때 같은 업종에서 일했지만 지금은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고 대놓고 아빠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모습이 기분 좋지는 않았다. 존경할 만큼 완벽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빠 자식인지라 그냥 싫었던 거 같다. 물론 아빠의 태도에서 큰 잘못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을 알면서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 떨어져 나간 관계에서 남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게 된 이유는 바로 말기 간암 진단이었다. 초반에 병문안이 조금 왔다.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그 옆을 지키는 것은 가족이 전부였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결국 남는 것은 가족이라는 사실을. 주변의 친했다고 하는 사람들 모두 아빠를 보고 걱정해 주었지만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그게 전부였다. 사실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서운함은 느끼면 안 되는 감정이었다.
아빠를 보내고 엄마는 위암 진단을 받았다. 초기라서 우리는 잘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위암 수술 후 5년이 지날 때쯤 나는 직감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직감은 중증치매라는 진단서로 우리 인생에 남겨졌다. 그 사이에 수많은 일이 있었다. 엄마는 사람답게 사는 것에 멀어졌고, 자신을 잃어갔으며 누가 지우개로 지우듯 미세한 흔적만 겨우 남겨둔 상태가 되었다. 병원과 요양원, 동생집 다시 병원을 오가면서 엄마는 소리내서 말하는 방법을 잊었고, 이제는 밥을 먹는 법도 몰라 콧줄로 영양분을 섭취하는 초라한 삶의 한 가닥을 붙잡고 있다. 글로 표현하면 이렇게 몇 문장이지만 벌써 6년이 훌쩍 넘어버린 일이다.
치매 진단 초기에는 아주 가끔 엄마의 친구분들께 안부 전화가 오곤 했다. 그분들의 사연을 엄마에게 들어서 알기에 나는 하나같이 힘들게 살고 계신 분들께 그저 감사하곤 했다. 그냥 이렇게 마음 써주는 것이 감사할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이길 것은 없다고 엄마는 점점 그분들의 인생에서 지워지는 듯했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니 잊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엄마의 인생이 조금 안쓰러웠다. 아무리 나와 동생이 애를 써도 그 채울 수 없는 슬픔은 우리를 삼켜버리곤 했다.
가끔 술을 먹고 동생에게 아주 가까운 지인들 욕을 하기도 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궁금하지도 않냐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그냥 그렇게라도 엄마는 괜찮은 인생을 살았다고 대신 말하고 싶었다. 별 볼 일 없어서 그 인생이 초라했기에 엄마를 보러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들 너무 바쁘고 그냥 하루하루 넘기기 버거워서 그러는 거라고.
그러던 어느 날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친구분께 연락이 왔다면 이름을 말해줬다. 우리는 모두 이모라고 불렀기에 지역을 붙여 00 이모가 맞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했다. 술을 먹고 취해서 엄마를 향해 울며 우리에게 전화를 하셨던 유일한 분이었다. 그렇게 말하다가 자기가 미안하다고 하며 전화를 끊던 이모는 항상 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바쁘게 사는 것을 알기에 그 말로도 충분했다.
몇 년 전 치매 초기 때, 엄마가 그래도 두 발로 걷고 조금 사람을 알아볼 때, 이모가 부탁을 했었다. 자기 집에 엄마를 데리고 와주면 안 되겠냐고 말이다. 하룻밤 엄마랑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며 우리 형제도 조금 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 멀지 않아서 나는 엄마를 모시고 이모집에 갔다. 그냥 보내기 뭐 했는지 저녁을 먹고 가라고 차려주며 멍한 눈으로 앉아 있는 엄마를 계속 어루만졌다.
그리고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이모는 병원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이모가 다녀간 후 동생에게 전화해서 물었다. 이모는 넘어져서 허리를 크게 다쳐 한동안 고생하셨다고 했다. 딱 봐도 아직도 아파 보였다고 동생은 말을 전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움직임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 먼 길을 왔다는 사실에 너무 고마웠다.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 이모는 엄마를 보러 와줬다.
아마도 엄마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처럼 초라하고 처음부터 부모에게 환영받지 못했던 인생이라도, 남편 복도 없어서 자식을 키우는 동안 계속 죄인의 모습이었더라도, 죽음으로 가는 문턱도 가볍지 못해 온갖 고통을 달고 어렵게 넘는 가여운 삶이라도, 내가 곁에 있다고. 너의 친구가 바로 옆에 있다고.
엄마는 이모를 보고 웃었다고 했다. 그 불편한 콧줄 아래로 몇 개 남지 않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엄마는 애써 미소 지었다고 했다. 이모는 그 모습에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라며 좋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어쩌면 엄마의 인생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가치 있고 행복한지도 모른다.
과연 나를 찾아올 저런 친구가 있을까? 그것도 내 형편이 좋지 않음에도 애써 시간을 써줄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있을까? 확실하게 말할 자신은 없다. 공평하지 않은 삶이라는 것을 너무 빨리 배운 탓도 있지만 기대는 실망을 부르기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가 온다면 나도 엄마처럼 기억 못 할 테니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엄마에게는 이런 친구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울리지 않는 핸드폰에서 엄마의 연락처를 지우고 엄마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고 단정 짓고 살아도 괜찮다. 엄마의 젊은 시절과 인생의 이야기를 품고 엄마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이모가 있어서 고맙고, 엄마의 체온을 나눠가질 수 있도록 힘든 걸음을 해주셔서 더 감사하다.
우리 엄마는 충분히 충분히 잘 살아온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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