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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엄마가 없는 박사학위 수여식

by 고용환

나의 이기심과 욕심은 끝이 없었다. 만족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아서 채워도 채워도 계속 모자람을 느끼게 된 것 같다. 이런 아들을 보면서 엄마는 항상 안타까워하셨다. 이제는 부모가 된 입장에서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이해할 수 있기에 내 이기심을 돌아보면 고개가 숙여진다.


누구의 탓도 아닌 내 선택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그것도 통보식으로 엄마에게 내 결심을 전했다. 어떠한 이유도 묻지 않고 내 손을 잡고 학교에 가던 그 길 위에 엄마 표정이 아직도 가슴에 생생하다. 엄마는 걱정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앞으로 경험할 혼란과 어려움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 그냥 뜻을 따라줬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20대 입대한 군대는 내게 기회처럼 느껴졌고, 아빠가 반대를 했지만 엄마의 지지로 부사관이 되었다. 견디고 버티고 애쓰며 자리를 잡아갔고 그 모습을 보며 안쓰러워하면서도 큰 아들인 나를 믿어주셨다. 하지만 나는 또 이탈을 시도했다.


진급도 포기하고 갑자기 휴직을 신청해서 해외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처음으로 떠나는 해외였다. 들뜬 마음도 있었고 두려움도 있었다. 그런 아들을 보며 엄마는 자신의 무지를 자책했고, 식당에서 어렵게 번 소액의 돈을 내게 내밀었다. 마이너스 통장까지 만들어서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떠나는 아들에게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떨궜다.


캐리어를 끌고 현관문을 나서 언덕을 내려오는 동안 길에은 산동네 높은 언덕에서 엄마는 한없이 손을 흔들었다.

잘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몸부림을 안쓰러워하며.


그 엄마의 뒷모습이 가슴에 남아 비행기에서 나는 한없이 울었다.


나는 이렇게 엄마의 무한한 지지와 응원을 받으며 차츰 어른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 사이 엄마는 자신의 젊음과 인생을 잃어갔다.


박사학위 수여식. 불가능할 것 같은 목표였다. 과정 중에도, 코스가 끝나고, 논문을 쓰면서도 계속 의심하고 불안해했다. 취업도 불분명한 이 학문에 이토록 많은 시간과 열정을 넣어서 내게 돌아오는 것이 크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내 몸은 앞으로 쏠려 달리고 있었고, 멈추지 않았다. 4학기 코스를 마치고 다음 학기 학위논문 청구심사를 봤다.


그 사이 엄마는 치매를 넘어 뇌출혈로 쓰러져 다시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매정하게도 하늘은 엄마의 뇌도 모자라 반쪽의 자유마저 가져가버렸다. 엄마의 거동이 불가능해졌을 때 박사학위 수여식에 엄마를 모시고 올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학위수여식 당일 나는 부모님의 빈자리를 다시 한번 느꼈다. 나도 모르게 수여식 오신 수많은 어르신들을 쳐다보며 그들을 부러워했다. 엄마의 축하를 받지 못해서 서운해서 바라본 것이 아니다. 그냥 그들이 부러웠다. 그중에는 어린 시절 나처럼 부모님께 짜증을 내는 졸업생도 있었고, 행복하게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을 보며 부모님과 소통과 연결이 되는 그 따라할 수 없는 관계속의 평범함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 자리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여식 단상에 올라가서 나는 엄마가 이 자리에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무표정에 나를 바라고 있을 그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주변을 둘러보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해서 동생과 말싸움을 했을 것이고, 어색하게 같이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보통은 잘 웃지 않는 김여사는 아마도 애써 밝은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기쁜 마음도 잘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고 나보다 엄마와 스킨십을 잘하는 동생의 팔에 잡고 돌아가신 아빠의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식당에 가서는 분명 반찬을 평가하며 뭔가 지적질을 했을 것이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짜증을 냈을 것이다. 10살이 된 손녀딸을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을 것이고, 외국인 며느리 잘 이해 안 되는 질문에 대답을 하며 밥을 먹었을 것이다.


짧은 순간 내 상상 속에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렸다. 수많은 기억들이 고속도로 위해서 빠르게 흘러갔다. 붙잡을 수도 없는 소중한 것들이 기억 저편에 있었다. 눈을 감고 아빠와 엄마가 건강히 우리 형제 곁에 계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재미없고 답답하고 때로는 미련해 보였던 그 모든 순간이 앞에 잡힐 듯 선했다. 그리고 미치도록 붙잡아서 내 옆에 두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표정이 심각해졌는지 동생이 운전을 하며 내게 물었다. 행복하지 않냐고.

나는 그냥 쓴웃음을 지으며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아마도 가슴에 난 구멍으로 행복이 빠져나가서 그런 것 같다.


반년만에 콧줄을 빼고 조금은 자유인인 된 엄마는 곧 반쪽자리 그 자유를 박탈당할 거라고 했다. 더 이상 음식을 삼킬 수가 없어서 다시 콧줄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 아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나를 짓눌렀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고통 속에 혼자 허우적거리는 엄마를 두고 내가 어찌 행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동생에게는 엄마 생각이 나서 별로 기쁘지 않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부모라는 존재는 평생 자식의 가슴속에 살아계시는 듯하다. 그 기억이 좋던, 나쁘던, 지루하던, 한심하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눈앞에서 사라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속에 그리움은 커져만 간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따라 목소리도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엄마랑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 쓸데없는 이야기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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