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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Dec 12. 2020

너희들 신세 안 진다.

아버지와 반대로 살기로 했다

  그 감정도 잠시 뿐이었다. 치료에 사용 가능 한 보험금을 확인했다. 큰 아들인 나는 슬픈 감정에 잠겨서 추억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보장금액을 확인했다. 요즘의 암보험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보장이 되는 보험이었다. 보험회사에 최종해 보니 보장금액은 170만원였다. 그리고 다른 보험은 300만원였다. 그래도 보험이라도 가입해 둔 어머니에게 고마운 마음도 잠시였다. 아주 오래전에 가입한 보험이었다. 그것도 만기가 한참 지났던 신혼일 때 가입한 보험이다. 생가해보면 물가상승률과 그 당시 암을 치료하는 것이 흔하지 않았기에 보장금액이 낮게 설정되어 있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바쁘게 사는 서민이라서 그 누구도 보험을 갱신해야 한다는 지식이나 미래를 대비하는 정확한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똑똑한 척하면서 가장인 척 위선을 부리던 나조차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시한부 삶을 살게 된 아버지보다 현실적으로 치료비를 걱정했어야만 했다. 그리고 아버지에 본인의 현 상태에 대해서 말을 전했다. 침착했다. 그리고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      


“옆구리가 미친 듯이 아프고 숨도 안 쉬어지고 했는데 여기 와서 치료받으니 하나도 안 아프네. 신기하다.”     

부정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차라리 고함을 치고 오열을 하며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울면서 살고 싶다고 애원했으면 같이 눈물이라도 흘렸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태연하게 본인은 이제 안 아프니 문제없다고 하는 그 낙관적인 모습에서 나는 여러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간이식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오로지 항암 치료를 하면서 경과를 지켜보고 안되면 간에 방사선 치료를 하는 방법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는 백수가 되었다. 이번에는 강제로 백수가 되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에 친척들과 지인들이 병원을 방문했다. 모두 슬픈 표정으로 병원에 와서 그냥 수다를 떨고 다시 돌아갔다. 친척 중에는 갑자기 어색하고 불편한 관심을 보이는 분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원망은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왜? 울 오빠가 이렇게 됐어? 뭐 신경도 안 쓰고 그런 거 아니야?”     


누가 정말 위로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간암 말기인 아버지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가 더 불쌍했다. 안 그래도 고생만 한 그 잡초 같은 인생에 작은 꽃 한 송이 이 세상은 허락하지 않는 거 같았다. 꽃이 피기 좋은 날씨와 햇살을 만나면 어느덧 비바람과 기온은 영하로 떨어지곤 했던 그 인생이었다. 이제 원망을 받고 있으니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서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불쌍한 듯한 모습으로 우리 가족을 바라보는 그 시선도 보기 싫었다.      

나중에 간암의 원인을 알았을 때 너무도 한심했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잘못이었다. 아니면 무관심한 가족들의 잘못일지도 모른다.

사실 B형 간염 보균자였던 것이다. 오랜 시간 방치로 암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직장생활을 10년 가까이하면서 직장인 신체검사를 받게 되어 있는데 그동안 몰랐던 것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일하시던 직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매년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공가를 받아가도 절대로 검사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벌금까지 물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가를 받아서 경마를 하러 갔다고 했다. 한심하다. 무능함을 떠나서 본인의 몸 관리도 철저히 외면한 대가를 받은 것이다. 검사를 받고 피검사라도 했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왔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이렇게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의 반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하게 우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병원에서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 기간은 길지는 않았다. 통원치료였다. 다행히도 부대의 배려도 병원에 입원하는 기간에 격오지에서 휴가를 쓸 수 있었다. 나는 거의 매일 병실에서 잠을 잤다. 그래야만 했다.

어머니와 동생도 일을 하고 있고 모두에게 고통을 나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병원에 있는 시간 동안에 아버지에 나름의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살면서 가장 오랫 시간 같이 시간을 보낸 거 같다.

밤잠이 없던 일을 할 때도 항상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학창 시절에는 학교 가지전에 주무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전부일 정도였다.

가끔 외식을 하거나 친척집에 갈 때를 제외하고 밤에 아버지를 보기는 힘들었다. 일주일 동안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것이 참 어색하기도 했다.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하고 병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어쩌면 평범한 것인데 나에게는 생소했다.      

입원과 통원 치료를 6개월 정도 받았을 때 나는 군에서 선발하는 국외 군사교육에 합격했다. 국외 군사교육은 미국 본토에 가서 일정기간 교육을 받고 오는 것이다. 소수의 부사관이 선발되는 것이고 그동안 공부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느낌이어서 잠시 행복을 느꼈다. 그런데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교육 전에 준비 시간이라도 부대 출근을 하지 않고 급여를 받으며 각종 출국 준비를 하는 시간이 교육과정에 따라서 3개월~6개월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동안 부대 생활과 병간호로 나 또한 지쳐있었다. 잠시 집중에서 아버지를 보살피고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꼭 누군가 나를 돕는 거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치료가 8개월쯤 되었을 때 다시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개인회생은 계속 진행 중이어서 아버지 급여 없이 가족들의 돈으로 빚을 갚아야 했다. 다행히 실업수당이 청구돼서 아버지 수당으로 일부를 충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순간에도 그놈의 경마를 가는 것이다.

고함치고 싶었다. 그리고 같이 가자고 하는 그 아버지 친구도 증오스러웠다. 분노도 잠시 무슨 돈으로 하는지 궁금했다. 그냥 가서 앉아만 있는 다 고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그냥 다니게 했다. 그리고 나도 교육준비로 잠시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준비교육을 받고 있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실업급여로 경마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구나. 그 상황이 어떻게 되든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절대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교육 마치고 가서 또다시 아버지와 대화를 했다.

참으로 한심한 내용 말을 하는 것이다.      


“상속을 포기하면 본인의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들었다고 어차피 죽을 건데 본인이 돈을 쓰겠다고 했다.”      


인생을 포기한 사람의 말이었다.  

이런 무책임은 우리 가족에게 당황스럽고 무한의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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