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엄마의 빈자리: 부재로 채워진 상견례 날의 온기

by 고용환

동생이 오랜 연애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시작을 결심했다. 결혼이라는 것이 어느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눈부신 아름다움으로만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형으로서 그저 묵묵히 곁을 지키며 조용히 응원을 보낼 뿐이었다. 사랑이라는, 세상 그 어떤 단어로도 쉽게 정의할 수 없는 파동 같은 감정을 '결혼'이라는 문서상의 절차로 남기는 과정은 참으로 묘하다.

그것은 단순히 두 사람이 합쳐지는 것을 넘어, 서로를 감싸 안고 아끼면서도 때로는 가장 깊은 상처를 주고받게 될 같은 길 위에 서는 일이다. 세월이 흘러 모습이 변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러지며, 서로를 어루만지던 손길에 거친 흔적이 남을지라도 결코 변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순간. 그 거룩한 약속을 위해 양가 가족이 처음 마주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몇 달 전 상견례 일정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선뜻 기쁜 내색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단지 동생의 든든한 형으로만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었다면 마음이 이토록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마땅히 계셔야 할 그 자리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다른 방도가 없음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 한구석은 계속해서 따끔거렸다.


고민 끝에 고모나 이모에게 동행을 부탁해 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내 생각보다 동생의 마음을 먼저 물었다. 요즘의 결혼은 예전처럼 주변의 시선이나 형식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 간섭으로 고통받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지켜본 보통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예의와 안부만을 나누며 오롯이 둘만의 삶을 꾸려나간다.

동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저 나와 우리 가족이 함께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나는 외국인 아내와 초등학생 딸의 손을 잡고 상견례장으로 향했다. 우리 집안은 남들보다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앞서가는 편이다. 한창 건강해야 할 나이에 서둘러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 너무 이른 나이에 기억의 조각들을 놓치며 자신을 잃어버린 어머니, 그리고 감당하기 조금은 버거웠던 국제결혼을 선택한 나 자신까지.


결국 나는 가감 없이 우리 가족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다행히 상견례장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따뜻한 배려로 우리를 편안하게 맞아주셨다. 내가 우려했던 곤란한 상황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돌이켜보면 일어날 이유조차 없었다.


나는 초면인 신부 측 아버님과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그날의 공기를 마음에 담았다. 대화 중간에 잠시 어머니의 이야기가 스치듯 지나갔으나, 화제는 금방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결혼식장에 오셔서 축복해 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며 나 또한 흘러가는 대화의 흐름에 몸을 실었다.


물론 휠체어에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어떻게든 식장에 머무르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끊임없이 어머니를 살피느라 마음을 졸여야 하고, 하객들의 시선은 온전한 축복을 받아야 할 신랑과 신부가 아닌 아픈 어머니에게로 향할 것이 뻔했다. 무엇보다 엄마는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기에, 그것이 오히려 더 서글픈 하루가 될까 봐 차마 모셔오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 그 자리에 함께 계신 엄마를 느꼈다. 엄마는 분명 우리 곁에 계셨다. 동생이 이토록 예쁜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을 누구보다 기뻐하며 축복하고 계셨다. 비록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다정한 온기만은 식탁 위를 충분히 채우고 있었다.


사실 우리 형제는 어쩌면 심하게 망가졌을지도 모를 시간을 지나왔다. 가난은 마치 그림자처럼 항상 우리 곁에 머물렀다. 잠시 숨통이 트이는 듯한 시절도 있었으나 그마저도 찰나였다. 그럼에도 우리가 비뚤어지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엉성하고 부족할지언정 부모님이 우리 곁을 지켜주셨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부모님이 하나둘 갈라설 때도, 나는 투박한 우리 집이 좋았다.


버거운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와 우리 앞에 거대한 벽으로 서곤 했다. 내 나이 서른 살 무렵부터 우리 집은 '평범함'이라는 단어와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이미 경제적으로 자립했음에도 아버지의 빈자리는 늘 서늘하게 느껴졌고, 집안에 무슨 일만 터지면 나를 찾는 상황들이 때로는 버겁고 싫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내 자리를 이탈하지 않았다. 동생 역시 방황할 틈도 없이 제 자리를 묵묵히 지켜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지탱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기적으로 변하기도 했을 것이다. 아버지를 보내고 난 뒤, 수많은 친척 중 진심으로 우리의 안부를 묻는 이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픈 어머니를 보살피는 긴 고립의 시간 속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차가웠다. 심지어 결혼으로 연을 맺은 나의 배우자조차 도움보다는 서운함을 줄 때가 많았다.


그런 모진 시간들 속에서, 동생의 여자친구는 우리 가족에게 진심어린 마음을 써주었다. 참으로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행복이 차오를수록 엄마가 더욱 보고 싶었다. 만약 엄마가 조금이라도 건강하셨다면 오늘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아마 엄마는 아마 며칠 전부터 엄마 방 작은 책상 앞에 앉아, 낡은 노트에 꾹꾹 눌러 쓴 글자로 막내아들의 결혼을 체크하셨을 것이다. 먼저 하늘로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홀로 아들을 장가보내는 미안함을 담아 조용히 기도를 올리셨을지도 모른다.


비록 현실의 엄마는 기억을 잃고 누워 계시지만, 나는 믿는다. 그날 상견례장에서 우리 형제를 어루만지던 따스함은 분명 막내 아들의 새 출발을 응원하는 엄마의 마음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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