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치매지만 엄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할 겁니다.

2년만에 엄마와 함께 한 외출

by 고용환

뇌출혈로 병원 입원을 한지 일 년 하고도 반년이 넘어가고 있다. 시간에게 말을 걸어 늦추려 해도 시간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시간이 어찌나 빠르던지 나는 거울 속에 비치는 흰머리를 뽑으며 실감한다. 늙어간다는 거 참으로 서럽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그렇게 그냥 밥 먹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지만 서글퍼진다. 엄마의 반쪽이 마비되면서 엄마를 모시고 어디를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치매가 아니라면 모를까 힘이 들어 감히 생각도 못했다. 물론 이번에 짧은 나들이가 진짜 순수한 목적의 외출은 아니었다. 치매 진단을 받고 산정특례로 의료비 혜택을 보던 것이 끝이 나서 어쩔 수 없이 모시고 나와야 했다.


엄마를 이동시키는 것이 불편할 것 같아 다른 교통수단을 활용하려 했는데 동생이 내 차로 모셔도 될 거 같다고 말해서 병원으로 향했다. 키가 적당히 큰 아들 두 명이 엄마를 들고 내리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이 마비된 상태에서 모든 체중을 우리에게 의지하는 엄마는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병실 침대에서 휠체어로 들어서 앉지는 것도 힘들었다. 차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지만 차에 엄마를 태우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주차장 구석에서 끙끙거리며 안에서 밖에서 엄마를 잡고 끌며 겨우겨우 엄마를 차에 태웠다.


다행히 목에 힘을 줄 수 있어서 엄마는 조금 불안한 자세지만 차에 앉을 수 있었다. 나는 운전을 하고 동생은 엄마 옆 뒷자리 앉아서 우리는 오랜만에 김여사를 놀리며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는 가끔 눈을 크게 뜨기도 하고 삼키는 법을 잊어 입술 사이로 침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름 봄을 즐기는 듯했다. 건강할 때 동네를 종종 걷곤 하셨다. 아니 엄마는 걷는 것을 좋아했던 거 같다. 조용히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는 나무들을 사랑했던 거 같다. 다행히 동네에 벚꽃이 참 많았다. 엄마는 키가 큰 우리를 두 손을 잡고 위를 올려다보며 떨어지는 꽃잎을 보았다. 표현이 서툰 사람이었다. 아니 사랑받지 못해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아픔을 담고 살았기에 그 아픔이 가슴을 턱 막고 있어서 사랑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차 안에서도 말 한마디 없이 뒷자리에 겨우 앉아 있지만 나는 거울 속에 비친 엄마에게 사랑을 느꼈다. 엄마랑 오랜만에 밖을 나와서 그런지 우리들도 기분이 좋았다. 헛소리를 하며 밝은 톤의 목소리를 유지했다. 병원에 도착 후 집에서 가져온 휠체어를 펴서 엄마를 앉쳤다. 사실 그 모양새가 썩 좋지는 않았다. 정확한 표현은 아마도 살짝 끌었다가 맞을 듯하다. 그렇게 엄마는 진료를 보기 위해 대기표를 받고 선생님을 만났다.


예전에 다니던 병원에 선생님이 다른 곳으로 가셔서 우리는 동생 병원 지인의 도움으로 병원 새롭게 소개받았다. 엄마의 뇌를 연구하고 싶다던, 기증해달라고 부탁하던 그 선생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엄마는 여전히 아프지만 사라졌다는 점이 조금은 서운했다. 환자와 연구 대상의 차이를 곱씹으면서.


동생이 쓰려졌을 때 한 번 선생님을 뵈었다. 연세가 있으신데 상당히 환자에게 적극적이었다. 가끔 이런 분들을 보면 놀란다. 보통은 차가웠기 때문에. 지극히 업무적인 태도로 바라보고 말했기 때문에. 하지만 이분은 동생 때도 그렇도 이번에도 참으로 마음으로 다가왔다. 엄마의 상태를 보고 말을 아끼셨다. 누가 봐도 너무 좋지 않은 엄마의 모습에 잠시 말을 멈추고 엄마가 최대한 검사를 빨리 마칠 수 있도록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제도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을 먼저 꺼내며 보호자의 입장까지 살펴주셨다. 심리검사와 MRI가 없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검사가 의미 없는 분이라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한다고 말해주셨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에 답답했던 응어리가 조금은 가라 내려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엄마를 모시고 검사실 몇 곳을 다녔다. 조금 오래 기다리긴 했지만 그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멀리서 엄마를 보고 가까이 엄마를 보고 사진도 찍어가면서 그 시간을 담으려고 애썼다. 분명 나중에 이 시간이 그리워 눈물을 흘리며 보내게 될 것을 알기에 더 그랬다. 그렇게 병원에 몇 시간을 머무는 동안 내 눈에는 다른 환자분들과 보호자 분들이 들어왔다.


아픈 사람, 아픈 사람을 보살피는 사람. 그리고 치료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병원. 환자와 보호자 입장에서 병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자주 오다 보면 이런 모습이 적응된다. 그리고 내 상황에 따라 보이는 장면이 달라진다. 내 눈에는 우리 엄마보다 심해보이는 분은 별로 없어 보였다. 물론 더 힘든 몇 분들을 보기는 했지만 연세가 아주 많아 보였다. 그래서 환자이고 모두 아프지만 보호자들이 부러웠다.


가끔 아니 사실은 많이 이런 이야기를 동생과 나눴다. 만약 아빠가 그리고 엄마가 충분히 더 사시다가 이렇게 되었다면 우리 심정이 지금과 같을까? 물론 슬프고 아플 것이다. 하지만 억울함은 조금 덜 하지 않았을까. 충분히라는 말이 참 애매하지만 그냥 평균 정도만 되었더라도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 술안주 삼아 몇 백번은 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물론 이런 경험이 우리 형제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또는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삶에 쳐들어왔다. 덕분에 태생이 겁쟁이인 내가 전역을 하고 제2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이 오십까지 얼마 남지 십 년도 안 남았으니 내가 사랑했던 두 분은 육십 대의 삶을 즐기지도 보지도 못했으니 나 역시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오늘을 쏟아낸다. 마치 내일은 환자가 되어 세상과 이별할 것을 아는 사람처럼. 내가 하루하루를 아주 꽉 채우는 이유는 내가 겁쟁이라서 그렇다. 무서워서 그런다.


병원에서 엄마를 옆에 두고 나는 불효를 저질렀다. 그 순간 아픈 엄마를 옆에 두고 어린 내 딸을 생각했다. 아니 걱정했다. 외동딸, 내게는 이 세상보다 우주보다 큰 존재. 아직 한참 어리지만 나는 미래를 상상하며 아파했다. 혹시 내가 늙어 이렇게 아프게 된다면 나 때문에 힘들어할 그 어린 딸의 미래를. 내 눈앞에 있는 너무도 망가지고 힘들어하는 엄마를 앞에 두고 나는 내 딸아이를 걱정했다. 내 몸뚱이가 아플까 봐 걱정한 것이 아니고 그 아이가 나 때문에 힘들고 짜증 나고 번거로울까 봐 그것이 걱정되었다. 생각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노력했지만 현실로 돌아오려 했지만 나는 오지도 않은 불확실한 미래에 매달렸다. 아픈 엄마를 앞에 두고. 외동딸이라서 이 모든 짐을 혼자 감당할까 봐 계속 신경을 썼던 거 같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이 생각을 종종 해보았다. 동생도 없고, 나 혼자였다면. 아마도 나는 수천번은 무너지고 원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두렵다. 엄마처럼 또는 아빠처럼 내가 아플까 봐.


내가 잡생각에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엄마는 대소변을 보신 것 같았다. 어디선가 올라오는 그 냄새가 내 동생 코를 자극했다. 움직일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싶었지만 이곳에서 어떠한 조치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입원했던 병원으로 돌아기기 전까지 엄마의 엉덩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다.


모든 검사를 마치고 결과 확인과 특례를 받기 위해 다시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MRI 사진을 보며 약간은 미안한 듯한 말투로 말을 꺼냈다. 뇌출혈이 운동신경을 마비시킨 것은 맞지만 이미 치매가 너무 심해서 뇌출혈로 인한 영향은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뇌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쪼그라들어 사리진 부분들을 알려주셨다. 우리 형제는 그 사진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우리가 조금은 안쓰러웠는지 선생님은 이렇게 말하셨다. 지금 엄마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고. 그러니 혹시 엄마가 자신의 상황 때문에 스스로 힘들어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엄마는 지금 모든 것이 지워지고 아주 행복한 상태로, 아기와 같이 모든 것이 신기하고 행복한 그 상태라고.


그러니 엄마를 보고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나도 모르게 감사하다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선생님은 위로가 안 되겠지만 만약 뇌출혈이 오지 않았다면 그래서 어머니가 그 연약한 몸으로 계속 움직였다면 더 큰 사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쩌면 뇌출혈 때문에 반쪽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더 좋은 거라고.


그 말이 묘하게 공감되었다. 요양원에서 동생집으로 엄마를 모시고 온 후 우리는 크고 작은 사고를 계속 경험했기 때문이다. 24시간 감시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일들이 눈앞에서 그리고 우리가 잠이 든 그 시간에 벌어졌었다. 다행히 실종을 포함해서 모든 사건이 잘 해결되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우리 형제 가슴에 죄책감으로 남았을 것이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엄마를 태우고 병원으로 출발했다. 엄마는 봄을 느끼는지 가끔 밖을 보기도 하고 눈에 힘을 주기도 했다. 엄마를 뒤에 태우고 이렇게 도로 위에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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