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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흔적

잃어버린 이름

소설의 서두/초안

by 그래

매일 아침은 정신이 없다. 세 식구 밖에 없는데, 뭐든 찾아 달라는 아이 같은 남편과 나를 닮아 스스로 준비는 잘하지만, 덜렁거리는 딸을 챙기다 보면 어느새1시간은 금방 지난다. 모든 준비를 하고 끝나면 그들은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다. 일일이 물어 오늘 일정을 물어야 겨우 대답을 한다.

“여보, 오늘 늦어요?”

“오늘 회식이 있어서. 늦을 것 같아.”

“민희는?”

“미안해요, 나도 친구들이랑 약속 있어서 오늘 늦어요.”

“그래. 둘 다 차 조심하고, 조심해서 다녀와요. 일찍 오고요.”

언제부터였던가? 늘 밥을 혼자 먹었다. 혼자 먹는 음식이 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거르고 거르다 배고프면 겨우 한 끼를 챙겨 먹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거르는 날인가 보다. 두 사람이 나가면서 어질러 놓은 것들을 치우고, 소파에 앉았다.

“아침 드라마가 어떤 내용이었더라.”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 텅 빈 집안에서 아무 말도 안 하는 시간이 늘어나더니, 어느 순간 혼자 말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드라마도 재미없다. 읽던 책도 재미가 없고, 한숨 자기로 했다.

TV를 끄고, 선풍기 바람을 쐬며 눈을 감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잠은 금세 왔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꿈이 기다리고 있었다. 20살, 내가 민희 나이였다. 몸에 딱 붙는 청바지를 입고, 크롭티를 입을 만큼 날씬했다.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캠퍼스를 누비고 다니면 남학생 몇 명의 시선을 끌었다. 대학생 경희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딘가를 가고 있다.

“안녕하세요.”

내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아줌마, 무슨 일이세요? 도와드릴까요?”

‘아줌마?’

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시간을 맞춰 둔 선풍기는 이미 더 이상 작동을 하지 않았고,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찝찝했다. 방금 낭랑한 내 목소리로 들리던 아줌마라는 말이 귓가에 울림처럼 메아리 쳐 두통까지 왔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거울 속에 나와 마주했다. 그 속에 나는 아줌마였다. 이경희는 사라지고, 코끼리 같은 다리, 볼록 나온 배, 짧은 커트 머리의 아줌마가 서 있었다. 적나라한 몸매를 거울로 직관한 나는 힘없이 침대에 앉았다. 웃음 섞인 울음이 터져 나왔다. 수건으로 누가 들을까 입을 막고, 아이처럼 울었다. 속이라도 시원해지길 바라면서 얼마나 울었을까? 오히려 답답함만 더 가중되었다.

“이대로는 안 돼. 나는 아줌마가 아니야. 이경희라고. 이경희. 이름이 있단 말이야.”

이경희라는 이름으로 불린 게 언제였더라? 아무리 더듬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민희 엄마, 윤 부장 사모님, 형수님, 재수 씨. 태호 와이프 그 어디에도 나의 이름은 없었다. 나는 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내 이름을 불러줄 누군가를 찾아 핸드폰을 뒤졌다. 친구! 그래, 친구를 만나면 날 불러주지 않을까? 그런데 핸드폰 어디에도 친구의 이름은 없었다. 집과 집안 대소사만 챙긴 나에게 친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때 예전에 왔던 카톡이 기억났다. 오래된 카톡을 뒤져 그때 그 알림을 찾았다.

[경희야, 너 경희 맞지? 이지 대, 문창과 이경희! 나야, 오순정? 기억나?]

언제 온 건지 한참 지난 카톡이었지만, 처음으로 내 이름을 찾아서일까? 반가웠다. 순정? 누구였더라. 기억을 더듬어 본다. 작은 키의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해서 못난이 인형 같다고 남학생들이 놀리던 오순정, 너무 착해서 웃기만 하고 화도 내지 않던 친구였다. 이게 몇 년 만인가? 학교 졸업하고 처음이니, 20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기억나지! 어떻게 지내?]

답장을 보냈다. 그 순간 스팸이거나 사기꾼이면 어쩌지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받은 문자 날짜가 벌써6개월이나 지나 있었다. 혹시 다른 사람이면 너무 실례이지 않을까? 염려하며 뒤늦게 카톡 글을 삭제하려고 했지만, 아뿔싸 할 줄 몰랐다. 인터넷을 열어 발송 취소를 알아보고 있는데 카톡 알림이 뜬다.

[기억나? 너 경희 맞지? 어쩌면 그때 얼굴이 그대로 있니? 여전히 예쁘구나!]

카톡으로 되어 있는 프로필 사진을 보고 말하는 게 분명한 답장을 보고 생각했다. 사기꾼인가? 내 어디가20살 이경희의 모습이 있단 말인가? 기쁘기보다는 서러웠다. 답장할까 말까 망설이다 어렵게 답장을 보냈다.

[너 진짜 오순정 맞아?]

배꼽을 잡으며 웃는 귀여운 캐릭터로 답장이 왔다. 그리고 말했다.

[요즘 하도 이상한 사람이 많긴 하지? 자, 지금 내 사진. 그리고 우리 그때 약속하지 않았어? 유명한 소설가와 시인이 되어서 만나자고 했잖아. 나 소설가 됐다. 인터넷에 내 이름 써봐. 오늘 책 나왔다.]

깔끔한 커트 머리에 커리우먼 같은 옷차림, 머리모양과 나이를 먹은 외모만 빼면 예전보다 오히려 예뻤다. 그녀의 사진을 보고 검색 창에 ‘오순정’을 찍었다. 그녀의 이름이 적힌 소설책이 나왔다. ‘장미가 된 소녀’, 미리 보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순정이 쓴 책인 것을 말이다. 초고를 대학 때 봤기 때문이었다. 순정의 책은 장미가 된 소녀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외 몇 권의 책이 더 있었으나, 장미가 된 소녀는 베스트셀러 순위에 들어가 있었다.

[나 이번 주 화요일 서울에서 유영 서점15층에서 북토크해. 올래?]

[나 가도 돼?]

[당연하지. 내가 입장권 보내 줄게. 6시에 하는데, 끝나고 오랜만에 나랑 놀자.]

[그래.]

잠시 후 순정이 보내 준 북토크 초대권이 왔다. 작가 초청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앞 자석이었다. 순정과 대화를 마치고, 그녀의 책을 주문하려 할 때 다시 톡 알림이 울렸다.

[책 사지 마라. 내가 줄게. 너한테 주려고 내가 초판 하나 챙겨 놨다. 지금 나오는 건 두 번째 출판이거든.]

[응.]

누군가는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다.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녀가 이제껏 출판한 책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개인 출판으로 만든 책부터 들어본 적도 없는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까지 자기 꿈을 위해 무던히도 애쓴게 보였다. 나는 그동안 뭘 했을까? 순정과 한 약속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 꿈인 시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시를 마지막으로 쓴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없었다. 결국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순정이 제 이름 석 자를 세상에 알릴 동안 바보같은 말이지만, 나는 내 이름을 지우면서 살고 있었다.

한글 파일을 열어두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지만, 한자도 쓰지 못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민희가 와서 나를 부른 것도 몰랐다.

“엄마, 왜 그래요?”

“민희야, 엄마 이름이 뭐였지?”

“그게 무슨 소리에요? 우리 엄마 이름은 이 경자 희자죠. 엄마 어디 아프세요?”

민희가 열을 체크하듯 이마의 손을 올렸다.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민희야, 엄마 이름을 잃어버린 것 같아. 엄마 이름 좀 찾아줘.”

“엄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민희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민희는 영문도 모르고 나를 달래려 노력했고, 언제 연락했는지 남편이 집에 왔다.

“민희야? 엄마 어딨어?”

온 식구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여보, 나 이름을 잃어버렸어요. 어떡해요?”

“무슨 말이야? 왜 그래?”

황당해하는 두 사람과 달리 나는 심각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그저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다는 것뿐이었다. 남편과 민희는 나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일단 좀 자. 자고 일어나서 다시 이야기하자.”

“나, 피곤하지 않아요. 그냥 찾고 싶을 뿐이야. 내 이름을요.”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나는 잠들었다. 꿈속의 나는 캠퍼스를 누비며 글을 쓰고 있었다. 순정과 함께 글에 관해 이야기하고, 밥을 먹다가도 끄적이는 순정의 단편 글을 읽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때 그녀가 다시 내게 왔다.

“아줌마, 또 오셨네요? 누구를 찾으세요?”

“나는…, 그러니까 나는….”

웃는 나에게 나는 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이경희’라는 세글자가 떠올랐지만,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차마 답하지 못하는 나를 20대 경희가 웃으며 바라본다. 어느새 순정은 사라지고 어린 나와 둘만 있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하고, 가위에 눌린 듯이 이 상황이 괴롭기만 하다.


작성일 : 2024년 8월 3일

소설 공집을 위한 초안으로 작성하였으나 무산 되었다. 시간이 지나 좀 여유가 생기면 계속 집필할 예정이다.

해당 글의 저작권은 작가(아루하) 본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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