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어 증오
은서가 버스를 타고 사라질 때까지 하린은 버스 뒷모습을 보고 있다.
밤 9시, 오늘따라 무음 손목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9시 1분, 드디어 은서가 몸을 틀었다. 새벽부터 온다는 눈이 벌써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처럼 입김을 내뿜으며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린의 입가가 씰룩거린다.
“흐흐, 재밌다.”
입에서 입김이 새어 나오면 ‘후’하고 날려 보내고, 다시 입김을 만들기를 몇 번. 익숙한 대문 앞에서 입김을 멈췄다. 들어가야 한다. 집이니까. 그런데 가고 싶지 않다. 하린은 눈이 쌓인 계단 위로 아무렇게 앉았다.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교복 치마가 젖어버렸다.
“하아. 또 혼나겠네. 어쩌지?”
듣는 사람도 없건만 소리 내 말하는 버릇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더 여기에 있으면 안 되기에 안으로 들어간다. 2층 단독 주택, 담쟁이덩굴이 칭칭 감고 있는 벽, 다른 집보다 큰 창문, 창문을 막고 있는 두꺼운 커튼. 하린은 2층을 올려다본다. 굳이 커튼으로 가릴 것을 왜 큰 창문을 만든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건물 디자이너 아버지의 집은 유명 잡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왔니?”
항상 열려 있는 현관, 하린이 들어서나 가정부이면서 아버지의 정부인 은영이 아는 체를 한다. 하린은 고개가 바닥에 닿을 만큼 고개를 숙이며, 큰소리로 인사한다.
“다녀왔습니다.”
“어. 머. 니.”
2층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음성, 하린은 마지못해 따라 한다.
“어머니.”
“다시”
다시 들리는 아버지의 호통에 하린은 다시 인사한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그래. 어서 와. 밥 먹게 씻고 와.”
“네. 어머니.”
하린은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은 내려올 수 있을까?”
“뭐라고?”
언제 뒤에 있었던 건지 정부가 귓가에 속삭인다.”
“아니에요. 씻고 올게요.”
하린은 계단마다 들리는 삐걱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총 17개의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어제 부서진 난관이 깔끔하게 고쳐진 것을 확인한다. 그 옆에 떨어진 하린이 좋아하는 핀을 주워 방으로 들어간다. 낡은 경첩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순식간에 날아온 건, 지난겨울 은영이 사준 액자다. 깨진 유리 뒤로 은영과 하린이 웃고 있다.
“왜 어머니라고 안 부르지?”
“엄마는…….”
미처 마치지 못한 말과 함께 다시 어제 부신 난관을 또 부수고 말았다. 하린은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시간은 금방이니까. 그대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린아, 하린아. 일어나.”
얼마 만에 듣는 목소리인가? 아니다. 엄마는 말 안 하는데… 누굴까? 하린은 이내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꿈이라면 마음껏 들어보리라.
“엄마, 엄마. 보고 싶었어.”
“엄마도. 보고 싶었어. 미안해. 하린아. 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진짜 끝났어.”
이해 못 할 엄마의 말과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엄마의 목소리가 희미해진다.
“안돼. 엄마. 가지 마.”
다시 엄마가 사라졌다. 그러나 볼 수 있다. 아버지와 정부는 사라졌다. 다행히 그들은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