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점례 할머니는 어제도 오늘도 무엇인가를 수집한다. 문서의 조각, 말 그대로의 조각이기보다 신문 스크랩 등의 일부 내용, 대체로 전체 내용을 알 수 없는 텔레비전 뉴스와 여타 프로그램의 짧은 정보들, 주변의 노인에게 주워들은 얘기들이 전부이다. 그것들을 같이 사는 첫째 딸 세희 씨의 손에 쥐어주거나 들은 얘기는 말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중이다. 사실 90세의 김 할머니는 문맹이다. 그나마 50대 중반에 종로5가 소재 한글 학원에서 바쁜 시간을 쪼개어 몇 자 배운 덕에, 신문 기사 제목이나 읽을 정도이다. 읽어도 그 뜻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것을 모두 모아 국회로 보내, 법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 김 할머니의 정보 수집 목적이다.
무슨 법을 만들어달라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세희 씨는 그 법이 어떤 법인지 알고 있다. 김 할머니는 벌써 몇 년 전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노구를 이끌고 지자체 구청을 찾아가 지면 작성하여 제출해 놓았다. 이후 그것은 ‘연명의료정보처리시스템’의 데이터베이스에 올라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접속하면 그 내용을 볼 수 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는 김 할머니 스스로가 디지털 등록 내용에 접근할 수는 없다. 구청을 혼자 찾아가 작성 제출한 사람이 모친 당사자였기 때문에 가족이라 해도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PC 옆에 김 할머니를 앉혀 놓고 겨우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가입이 완료되었지만, 제출 당시 ‘가족 열람’을 허용하지 않아 직접 국민건강보험공단 인근 지사를 방문했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홈페이지에서도 가족 열람의 가부를 체킹할 수 있지만 세희 씨는 직접 김 할머니와 함께 지사를 방문했다. 김 할머니가 알고 싶은 것, 어쩌면 세희 씨가 더 알고 싶은 것을 상담원에게 직접 듣기 위해서였다. 세희 씨 또래의 늙수그레한 상담원이 통상의 업무 공간 외 작은 사무실에 홀로 앉아 모녀를 맞았다. 상담원에게 용건을 말하자 그는 ‘연명의료결정제도’라 적힌 팸플릿을 내밀었다. 돋보기를 꺼내 쓴 세희 씨는 그것을 빠르게 일독했다.
“왜 이 항목에 뇌사는 없나요?”
세희 씨가 상담원에게 대뜸 물었다. 옆에서 듣고 있는 김 할머니는 ‘뇌사’라는 단어 뜻을 알지 못한다. 두 눈만 멀뚱멀뚱 뜬 채 상담원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 말없이 세희 씨를 바라보던 상담원이 길게 뜸을 들이다 겨우 입을 떼었다.
“그건 의사들이 판단하는 ‘기타’ 항목에 있습니다.”
팸플릿의 정중앙에 ‘연명의료중단 항목’이 적혀있다. 심폐소생술부터 혈액투석‧수혈 등등, 마지막 여덟 번째 항목이 기타다. ‘환자의 최선의 이익 보장’이라는 비구체적 문구가 그 내용이다. 한 마디로 의사가 환자를 대신하여 삶과 죽음을 가른다는 소리, 어떠한 경우에도 판단의 주체는 의사라는 소리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효력’란에 ‘의식’ 관련 내용이 있다. 그것에 따르면 의식이 있든 없든 자연사를 제외하고 의사가 모든 사람의 임종을 결정한다. 모든 경우 의사가 환자의 생각 대리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존엄사를 반대하는 많은 의사들이 타인의 생명을 자기 것인 양 양손에 쥐고 있다.
“모두 의사들이 판단하네요. 그럼 이 의향서를 왜 작성하나요?”
상담원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작성 안 하셔도 되고, 작성하신 내용을 철회하셔도 됩니다.”
“그런 말이 아니고요, 왜 우리나라에는 존엄사가 없는지 묻는 겁니다.”
상담원이 무슨 죄가 있다고 밑도 끝도 없이 세희 씨는 쏘아붙인다. 김 할머니가 뇌사 상태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희 씨는 그 질문을 하기 위해 굳이 지사를 방문한 것이다. 세희 씨를 바라보는 상담원의 눈동자가 다소 커졌고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그건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 가능합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김 할머니가 존엄사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들은 것은 아니지만, 무슨 새로운 희망이라도 생긴 듯 세희 씨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스위스, 스위스’를 반복한다.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장난기 섞인 눈웃음을 가득 담고 있다. 목소리도 마치 노래하듯 리드미컬하다. 상담원이 어머니를 힐끗 쳐다본다.
“스위스가 어디야?”
세희 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상담원에게 다시 물었다.
“의사들은 뭐하는 거예요? 왜 죽음 직전에 의료 관광까지 하게 만드는 거지요?”
세희 씨는 괜스레 실버 상담원만 닦아세운다.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는 상담원은 묵묵부답이다. 다소간의 불쾌감도 그 얼굴에 보인다.
“스위스로 가자. 스위스로….”
김 할머니가 세희 씨의 손을 잡아끌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다. 상담원이 또다시 김 할머니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눈길을 거둔다.
“엄마, 일단 집으로 가자.”
세희 씨는 팸플릿을 읽느라 코에 걸쳤던 돋보기를 벗어 안경집에 넣으며 에코 가방을 챙긴다. 가방 안에는 김 할머니가 좋아하는 로제 떡볶이가 포장되어 담겨있다. 냄새가 조금 새어 나와 상담원에게 다소 미안했지만 세희 씨는 모른 척했다. 날씨가 영상 5~6도, 춥다면 추울 수 있는 가을 날씨에도 상담원은 선풍기를 내담객 방향으로 틀어놓고 있었다. 김 할머니와 세희 씨가 상담원을 마주해 의자에 앉아 있을 때부터 그 선풍기는 돌아가고 있었다. 에코 가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를 날려버리기 위해 중간에 켠 상황은 아니었다. 별일이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든 세희 씨는 김 할머니를 일으켜 세워 워커에 두 손을 얹어주었다.
김 할머니는 스위스, 스위스 하며 세희 씨 옆에 딱 붙어 워커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사 사무실을 떠나기 전, 김 할머니 본인 확인을 거쳐 ‘가족 열람’에 체크하고 나서야 비로소 김 할머니가 제출해 놓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볼 수 있었다. 김점례라는 이름 석 자가 어린아이 그림처럼 이리저리 누워 겨우 글자임을 알아볼 수 있다. 지금은 지자체뿐 아니라 국민건강보험공단 각 지사에서 작성 등록할 수 있다. 연명의료 중단 항목에 김 할머니가 콧줄이라고 부르는 비위관(鼻胃貫) 연결 중단은 없다. 김 할머니는 비위관이 제일 견딜 수 없다는 듯, 향후 그런 일이 발생하면 절대로 연결하지 말라고 예전부터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환자가 허락할 때만 비위관 연결이 가능하지만 한국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세희 씨는 이미 알고 있었다. 김 할머니가 비위관을 이용해 경관 영양액을 위(胃)로 직접 흘려 넣은 적은 없다. 아마도 텔레비전 저녁 드라마에서 보았거나 주변 노인에게 들은 듯하다.
90세의 김 할머니는 체력이 몇 년 전만 못하다. 자식 넷을 홀로 키우며 얻은 지병은 한두 군데 수술로 해결되지 않을뿐더러 후유증만 남겼다는 것이 옳다. 수술 전이나 수술 후 먹는 진통제와 위장약, 진경제 등 약의 내용은 변동이 전혀 없다. 어쩌면 안 할 수술을 했는지도 모른다. 7시간 전신 마취로 척추 5, 6번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 모두 10개의 핀으로 고정하여 발 저림과 둔부 통증을 고쳐보려 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있다면 허리를 굽히는 행동을 전혀 할 수 없다는 것, 로봇처럼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걸어야 하고 좌식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정도다. 누가 보면 허리 짱짱한, 평생 노동과는 거리가 먼 노인이라 볼 것이다.
하지만 수술 전 집도의의 한 마디는 세희 씨의 뇌리에 박혀있다. ‘혹 농사 일 하셨어요?’ 김 할머니의 자식들은 집도의의 그 말을 들으며 쥐구멍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식들은 지나간 세월, 어찌해 볼 수 없는 자괴감과 김 할머니의 통증을 사라지게 할 묘안이 자신들에게는 없다는 미안함으로, 소리 없이 각자 한숨을 삼켰다. 그런 김 할머니가 척추관협착증 수술 4~5년 후부터 세희 씨에게 은근슬쩍 묻기 시작했다.
“어떻게 편안하게 갈 방법이 없을까?”
“엄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세희 씨는 김 할머니의 질문에 노여움으로 답한다. 결혼하여 갓 20살에 낳은 첫째 딸 세희 씨도 김 할머니와 함께 늙어가는 중이다. 재작년 5월, 간 초음파 소견상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회백색의 얼룩이 보이고 고선량 폐 CT 상 폐기종은 좀 더 진행된 상황이다. 작년에는 치과 임플란트 시술과 백내장 수술 등으로 가지 못했지만 매년 5월이면 간‧폐 관련하여 이런저런 검사를 하면서 1년 또 1년씩 삶을 연장하는 중이다. 세희 씨는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병원 검사하고 그 결과 기다리며 벚꽃 흩날리는 5월을 보낸다. 검사 다 마치고 진단의랑 컴퓨터 화면 보며 관련 설명을 듣는 시간이 가장 길고 무서운 시간이다. 검진 결과 확인하고 장미가 흐드러질 무렵 세희 씨는 그간 미루어 두었던 겨울옷 정리 등 집안 대청소를 하고 새로운 1년을 살아가곤 했다.
어느 날 김 할머니는 ‘청려장’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잠이 안 오면 텔레비전 이 채널 저 채널 돌려가며 보고 듣는 내용 중 하나이다. 마침 그날이 노인의 날이었다.
“그거 100살 장수 기념으로 나라에서 주는 지팡이야.”
“어쩔라고 100살까지 살려둔다니….”
“그럼 100살 되면 집단 자살이라도 시키라는 거야!”
세희 씨는 또 입이 거칠어진다. 김 할머니의 질문 방식도 그 질문에 답하는 세희 씨의 말투도 일종의 가족 화법이다. 세희 씨 가족은 그런 거친 화법을 서로 이해하려 노력하고 노력하지만, 그런 화법을 이해하는 주변 사람은 많지 않다. 게다가 경도인지장애 판정까지 받았으니 헤아려서 들어야 한다. ‘엄마는 죽을 때까지 살아있어야 해요’라고 말하려다가 겨우 입을 닫았다. 더 정확하게는 ‘엄마는 죽는 날까지 아프다 죽을 거예요’가 맞는 말이다.
“그런 소리가 아니라, 왜 그렇게 오래 사냐고?”
김 할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 얘기처럼 한다. ‘나’라는 1인칭 없는 김 할머니의 화법을 알아차린 것은 10여 년 전 김 할머니와 세희 씨가 합가한 이후였다. 김 할머니의 예전 화법이 어떠했는지 떠올려보았지만 세희 씨에게 특별한 기억은 없다. 합가 이전 모녀간의 삶이 분명 존재했지만 두 사람은 처음 만난 듯 대화할 때마다 부딪힌다. 세희 씨는 처음에 김 할머니의 1인칭 부재 화법을 이해하는 것이 난감했지만 그래도 이젠 제법 많은 것을 이해하고 알아듣는다.
그 1인칭 자리에 들어간 다른 1인칭은 4명의 자식들이다. 1인칭이 사라져 버린 김 할머니에게 ‘나’를 주어로 말하라고 말한 적도 있지만 김 할머니는 그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수년 전 보행이 수월했던 시절 인근 복지관의 노인대학에서 각자의 자화상을 4B 연필로 그려 집으로 가져온 날 세희 씨는 깜짝 놀랐다. 그 그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멍한 눈으로 자화상을 한참 바라보았다. A4 도화지 안에 세로로 그려진 김 할머니의 얼굴, 두 귀가 얼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양쪽 광대뼈와 코 사이에 두 귀가 그려져 있다. 왜 그런 자화상이 그려졌는지, 그렸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그것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세희 씨의 숙제다. 김 할머니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몰라, 왜 그랬는지’가 답의 전부였다. 지금 세희 씨는 김 할머니의 말을 헤아려서 듣는, 말귀 바로 알아듣는 착한 장녀로 살려고 매우 노력 중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의술‧의학이 발달하여 생명 연장에는 관심 많은 의사들이 삶의 마지막에는 제 잇속만 생각한답니다. 안 그런 의사들도 물론 있습니다’, 김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세희 씨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도 오래 살아야지, 그래야 저 지팡이 선물 받지. 명아주로 만든대.”
“명아주? 싫다, 금은보화로 만든 지팡이도 싫고, 매일 약을 한 주먹씩 먹는 것도 싫고….”
과장법이 심하다, 이것도 김 할머니 언어 특징 중 하나다. 대부분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다. 곧 세상이 끝날 듯 곧 죽음을 맞이할 듯 김 할머니의 화법을 확실하게 아는 자식도 있지만 같이 사는 세희 씨만큼 아는 자식은 없다. 김 할머니가 하루에 먹는 약은 한 주먹은 안 된다. 고지혈약, 경도인지장애약, 진통제, 진경제, 위장약, 철분제, 칼슘제, 가끔 변비약과 수면제 등 모두 합쳐도 10알도 되지 않는다. 세희 씨도 이런저런 약과 영양제 합쳐 하루 5~6알 정도는 규칙적으로 먹고 있다. 김 할머니는 실버카를 벌써 두 번째 바꾸었다. 처음 것은 흰색 바탕에 갈색 체크 문양의 아담한 실버카였는데 좌우로 훌렁훌렁 넘어간다며 다른 것을 요구했고 새로 마련한 실버카는 브레이크 손잡이가 무겁다며 쓰지 않았다. 곧 바퀴 4개 달린 워커를 원했지만 다소 위험할 수 있어 바퀴 2개짜리 워커를 준비했지만 김 할머니는 곧 바퀴 4개짜리를 원했다. 앞바퀴 2개는 크고 뒷바퀴 2개는 작은 것이다. 그것도 이내 트집을 잡아 안 쓴다 해도 세희 씨는 그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자식 된 도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스위스라는 나라 이름을 처음 들은 김 할머니는 그날 이후 며칠 동안은, 그 이름을 잊지 않았다. 눈만 뜨면 스위스 얘기를 한다. 세희씨는 여행 가이드북과 세계 지도 등을 펼쳐놓고 검색에 검색을 거듭했다. 디그니타스(Dignitas & Exit)와 라이프서클(Lifecircle)을 포함하여 스위스에만 4개의 단체가 있고 그 외 10여 개 나라에서 제도화되어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 상담원 말로는 ‘신청’하고 ‘승락’ 혹은 ‘승인’ 절차를 거쳐 허락한다고 한다. 그 나라가 어디인가? 비행기로 최소 13시간 이상 걸릴 나라이다. 그 나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김 할머니는 좁은 비행기 의자에 앉아 비명을 지를지 모른다. 척추관협착증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며 밤새도록 질러댄 비명 때문에 회복실 7인 모든 환자들이 거의 한숨도 잘 수 없었던 그 밤이 떠올랐다. 모르핀이 주기적으로 계속 투여되는 상황이었다. 바로 다음 날 새벽, 가격이 두 배인 1인실로 옮겨 다른 환자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 김 할머니를 제외한 7인의 환자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수술 후 회복기를 병실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 환자와 보호자들이 미간 주름을 잡아가면서도 말없이 김 할머니의 계속되는 비명 소리를 밤새도록 참아 주었다. 고맙다. 사람 소리인 듯 아닌 듯 헛소리까지 섞인 비명을 고스란히 들으며 날밤을 샌 세희 씨, 사람이 그런 소리를 밤새도록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김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그날 경험한 듯했다. 세희 씨는 사람이 정말 존엄한 존재라면 그렇게 고통스러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두 귀를 막았다. 아침 여명이 다가오고 세희 씨는 완전 에너지가 바닥 나 남동생을 급하게 호출했고 병실을 허겁지겁 벗어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이후 별반 달라진 것 없는 김 할머니의 일상적 통증은 이런저런 패치형 1주일짜리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하며 동시에 매일 여타 약물을 지속적으로 경구 투여한다. 그것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중이다. 아침마다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키는 김 할머니의 첫 마디는 반복되는 카타스트로피다.
“죽을 것 같다.”
세희 씨는 아무 대꾸가 없다. 모친보다 일찍 일어나 이런저런 가사일을 시작하는 세희 씨는 처음엔 김 할머니의 안색과 걸음걸이를 살피며 안부를 확인했다. 물론 김 할머니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모두 반응했다. 그러나 이제는 반응의 횟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있다.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다.”
“어제 못 잤으니까, 오늘은 잠이 잘 올 거야.”
“니가 그걸 어떻게 아니?”
시비조다. 그런 식으로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모녀간의 대화는 끝도 없이 이어지지만 세희 씨는 지칠 대로 지친다. 이제는 꼭 필요한 말만 한다.
“오늘도 못 자면, 이따 수면제 줄게.”
“그것도 매일 먹으면 안 되잖아.”
수면 장애는 운동 부족과 균형 잃은 식단, 음식물 과소 섭취 등에서 기인하지만 김 할머니의 경우는 매우 특수하다. ‘나’라는 주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또 다른 주체, 자식 넷이 한 몸이 되어 김 할머니의 수면을 종종 빼앗아간다. 이제는 놓아버릴 때도 훨씬 지났건만 김 할머니의 자아를 대신하는 자식 넷이 차지한 머릿속은 엄동설한에도 열대야에도 또렷또렷 말똥말똥하다. 이혼 후 문제 많은 막내딸이 꽤 자주 김 할머니의 수면을 방해했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세희 씨는 ‘이젠 내려놓으라고, 엄마. 이젠 엄마 자신을 위해 명상하고 묵언하며 마음 비우라고, 엄마, 그렇게 잠 못 자면 금방 죽어요’라고 쉬지 않고 몇 년을 설득하고 협박했지만 ‘나’라는 주체를 이미 상실한 김 할머니의 정신세계는 최근 몇 년 사이 걷잡을 수 없이 황폐해졌다. 김 할머니가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다.
“죽었냐?”
김 할머니는 대뜸 질문한다. 마침 텔레비전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양자 이인수 박사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있다. 누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엉, 죽었어.”
“죽기도 잘 죽네. 엄마는 왜 이렇게 안 죽냐.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다.”
세희 씨는 그만 아무 대꾸 없이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아침 약을 챙겼다. 5월이다. 1년에 한 번씩 받던 검사를 건너뛰고 2년째 접어드는 5월이다. 세희 씨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으로 아침 일찍 병원을 방문하여 문진표 작성하고 재작년 5월에 만났던 그 진단의를 마주 보며 ‘작년에는 못 왔어요’라고 말했다. 이런저런 검사가 3~4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숨도 참고, 뻐근한 주삿바늘도 참고, 환자복 입고 대기실에서 오돌거리며 추위도 참고, 얌전한 고양이처럼 구석에 앉아있다 간호사의 호명으로 진단의를 만났다.
“세희 씨, 올해는 재작년과 많이 다르네요….”
세희 씨 이름을 익히 알고 있는 진단의가 말꼬리를 흐린다. 십여 년을 드나들며 같이 늙어가는 중이기도 하다. 처음 병원을 방문했을 때는 비교적 굽 높은 구두를 신기도 하고 흰 가운 안에 가려져있긴 해도 스키니했던 몸매가 좌우로 펑퍼짐하게 불어나 있었으며 크록스 굽 없는 슬리퍼형 신발이 통바지 자락 아래로 보였다. 그 모든 것을 일괄하기도 전에 세희 씨는 진단의 ‘재작년과 다르다’는 한 마디에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다른가요?”
“우선 폐는 폐기종이 심해져 폐암 3~4기로 보입니다. 왼쪽이 재작년 CT고 오른쪽이 올 CT입니다.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네요. 작년에만 오셨어도….”
세희 씨는 앞이 캄캄해져 PC 모니터의 CT 영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정신을 가다듬어 의사에게 다시 묻는다. 흠칫 숨을 들이마신 세희 씨는 겨우 질문한다.
“그럼 간은 어떤가요?”
“간은 재작년과 별 변동이 없습니다.”
“그럼 폐는 어떻게 해요?”
“일단 대학병원으로 가보세요.”
그날 세희 씨는 너무도 놀라 집으로 어떻게 왔는지 하나도 기억에 없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김 할머니는 바로 세희 씨를 붙잡고 늘어진다.
“저 워커 너무 무거워. 가벼운 걸로 바꿔줘.”
“알았어요. 엄마, 나 좀 누워있을게.”
세희 씨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잠이 올 턱이 없었다. 데운 우유 한 잔과 모닝빵 한 개를 먹고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날 검진 결과를 머릿속으로 정리하느라 그저 누워서 천정을 멍하니 바라보던 세희 씨는 비몽사몽 짧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인다. 항암 치료 같은 것은 받지 마, 공기 맑은 곳으로 이사 가, 민간요법으로 시도해 봐, 암보험 청구할 때 절대 보험사에서 추천하는 의사 승낙하지 마 등등 수많은, 그동안 살면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이 개천을 떠내려가는 부유물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개천 주변에 살았던 어린 시절, 장마로 위험 수위를 넘어선 물살 위로 냉장고‧플라스틱 바구니‧스티로폼 등이 지금도 둥둥 떠내려간다. 세희 씨는 혼자 생각했다. ‘난 저것들 중 냉장고일까? 스티로폼일까?’ 별의별 해괴하고 가당치 않은 생각이 세희 씨의 머릿속을 멋대로 헤집고 다닌다. ‘동생들에게 말해선 안 된다’, 그러면 바로 김 할머니에게 그 소식이 들어갈 테고, 간혹 정신 맑은 상태로 돌아오면 목을 놓아 울며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한다고 가슴을 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세희 씨는 방문 밖에서 김 할머니가 지팡이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떡볶이 먹고 싶다.”
로제 떡볶이를 말하는 것이다.
“알았어, 엄마. 나가서 사 올게.”
세희 씨는 겉옷을 대충 걸쳐 입고 피자와 떡볶이를 파는 근처 상가로 향했다. 멀지 않은 곳이다. 평소에는 세희 씨가 좋아하는 치즈 향 풍부한 로제 떡볶이에 군침이 돌았지만 그날 이후 세희 씨는 그 냄새가 싫어졌다, 그토록 좋아하던 치즈를 먹지 않게 된 것도 그날 이후였다. 포장용 용기에 담아주는 떡볶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세희 씨는 거리 중간에 있는 작은 공원, 인조 회백색 돌 의자에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해가 제법 길어진 5월 중순 뉘엿뉘엿 저녁 그림자가 공원을 덮을 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 있던 세희 씨는 벌떡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을 모친 걱정에 언덕길을 급하게 올랐다. 숨이 찼다. 갑자기 목구멍이 좁아진 듯 불편하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 거칠게 숨을 뱉어내며 겨우 집에 도착한 세희 씨는 집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 자리에 쓰러질 뻔했다.
김 할머니가 양문형 냉장고 문을 모두 열어놓고 반찬통을 식탁 위에 펼쳐놓은 채 손으로 반찬을 집어 먹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한두 번은 경험한 일이지만 그때는 입맛에 맞는 한두 개의 반찬통만 꺼내 식탁에 앉아 얌전히 주워 먹었다면 그날 상황은 10여 개나 되는 반찬통을 모두 열어놓고 이거저거 가리지 않고 집어 먹는 중이었다.
“엄마, 배고파?”
“니가 안 오잖아. 나 배고파.”
“알았어, 미안, 엄마. 여기 떡볶이 사 왔어. 손 씻고, 이거 먹자.”
겨우 달래, 김 할머니에게서 반찬통을 모두 빼앗은 세희 씨는 떡볶이 포장해 온 것을 접시에 덜고 플라스틱 포크를 손에 쥐어주었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떡볶이는 치즈와 엉겨 붙어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안 되겠다, 엄마, 이거 좀 데우자.”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생활 지원을 담당하는 박 여사도 그만두었다. 뒤돌아보면 반복되는 이런저런 사고를 거의 매일 수습해야 했던 박 여사는 1년 넘게 김 할머니 집을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병원 동행에도 순순히 따라나서고 아침 식후 복약 지도도 잘 따라주던 김 할머니는 1년 정도 지나자 박 여사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저년이 날 무시하잖아, 배가 고파 죽겠는데, 밥도 안 주고.”
식사를 마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밥을 달라는 김 할머니를 달래는 것도 박 여사의 몫이었다. 그러려니 하고 김 할머니를 달래는 것이 자신의 업무여서 묵묵히 참아내던 박 여사는 어느날 세희 씨에게 통보했다.
“어머니께서 도둑 망상도 있고 하셔서… 더 이상은 좀 어려울 것 같아요.”
“도둑 망상요?”
“얼마 전엔 이불장을 지팡이로 두드리며 저더러 돈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전말은 이랬다. 김 할머니는 실물 현금이 편한 세대다. 젊어서부터 부엌 항아리 아니면 이불장 바닥 등에 현금을 모아놓고 필요할 때 꺼내 쓰던 방식으로 살았던 김 할머니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사실 지금은 가족회의를 거쳐 세희 씨가 현금 관리를 하고 있다. 이제 집에 큰 단위의 현금이 있을 턱이 없다. 그럼에도 김 할머니는 이불장 밑바닥을 뒤지거나 베갯잇이며 침대 패드 등을 헤집으며 현금을 찾곤 한다. 그럴 때마다 세희 씨는 ‘엄마, 거기 있던 돈은 모두 은행에 입금했어. 필요하면 찾아다 줄게’라고 달래곤 했었다. 현금을 김 할머니에게 주어도 쓸 줄을 모른다. 수년 전 현금을 요구해 찾아다 주었더니, 그날로 노인들 모여 박수 치고 노래하는 요즘 말로 하면 팝업스토어로 볼 수 있는 ‘매장’이라는 곳에 가 돈 백을 하루에 다 쓰고 들어왔다. 백만 원을 주고 사 온 것은 대형 패브릭 침대 패드 두 장이 전부였다. 며칠 문을 열고 영업하다 곧 다른 곳으로 이동해버리는 그 매장 사장을 찾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현금 결제였으니. 이후 세희 씨는 김 할머니에게 현금을 주지 않는다.
“네, 여사님, 많이 힘드시지요?”
“따님도 힘드신 거 알아 계속 돌봐드리려 했는데, 저도 이제 힘에 부치기도 하고 딸아이가 출산해 손자 돌봐주어야 할 것 같아요.”
박 여사가 주섬주섬 딸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본인 입장에서도 더는 김 할머니를 보살필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박 여사를 탓할 수는 없다. 천형(天刑)이든 천륜(天倫)이든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든 그것은 가족의 몫이다. 박 여사가 느끼는 피로와 고단함을 능가하는, 높이를 알 수 없는 수미산(須彌山) 꼭대기, 거기에 세희 씨가 올라앉아 있다 해도 그건 세희 씨의 문제다.
“아, 네, 축하드려요. 혹 주변에 아는 분 있으면 추천 좀 해주세요. 여사님만큼만 도와주시면 좋겠는데….”
그러나 박 여사는 누군가를 추천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후 세희 씨는 24시간 김 할머니에게 매달려 살아가는 나날을 보냈다. 세희 씨가 평생 해 오던 작은 액세서리 가게는 다른 사람에게 넘긴 지 꽤 되었다. 동시에 누군가의 액세서리로 살았던 젊은 날도 함께 청산했지만 다채롭게 나름 인생을 즐긴 것은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5월이 다 지나고 6월 말도 지날 무렵, 세희 씨는 동생들과 식사 자리를 따로 마련하여 조심스레 요양원 얘기를 꺼냈다. 셋이나 되는 동생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반응이 없다. 모두가 침묵하며 음식 접시를 되작일 뿐 어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긴 침묵을 깨고 막냇동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큰언니, 엄마 그렇게 심해?”
세희 씨는 막냇동생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넋을 놓고 있다.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두 달 전에 받은 폐암 검진 결과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갈 뻔했다. 막냇동생이 재차 물었다.
“언니, 얼마나 심한데?”
그제서야 세희 씨는 얼굴을 동생 쪽으로 바짝 들이대고는 김 할머니의 증상과 상태를 설명했다. 동생들도 세희 씨에게 들어 익히 아는 사실이다. 같이 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을 세희 씨로부터 종종 전해 듣지만 그것으로 김 할머니의 모든 것을 동생들이 안다고 볼 수 없다. 동생들은 세희 씨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조용히 앉아 있던 남동생이 말했다.
“사람 다시 구해봐.”
“쉽지 않아. 와서 며칠 일하다 가고 그래….”
박 여사가 그만둔 뒤로 다른 루트를 통해 생활지원사를 몇 명 써보았지만 길어야 한 달이었다. 동생들 누구도 김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다. 세희 씨는 알 수 없는 울음이 목구멍에서 넘어오는 것을 겨우 참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며 파트타임 생활지원사에게 맡겨두고 나온 김 할머니를 생각하며 언덕길을 재촉하는 세희 씨는 기침이 넘어와 길거리에 주저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침은 다소 잦아들었지만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싸하게 퍼졌다. 세희 씨는 가방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를 뱉어내고 삐걱거리는 길거리 낡은 의자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대학병원에 가보라는 의사의 말은 처음부터 세희 씨에게는 별반 의미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세희 씨 나이가 70인데 대학병원에 간들, 누구 말대로, 사람들 말대로 항암 치료에다 마지막은 에크모에 의지하여 생명 연장하는 것 외 달리 무엇이 있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학병원 폐암 전문의를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병원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세희 씨는 싫었다. 폐암보다 세희 씨를 힘들게 하는 것은 어쩌면 김 할머니였다.
세희 씨가 동생들을 만나고 귀가했을 때 파트타임으로만 일하는 생활지원사는 김 할머니 샤워 중이었다. 가끔 필요한 때 도움을 청하는 다소 젊은 생활지원사의 말은, 김 할머니가 잘 듣는 편이다. 세희 씨는 생활지원사를 퇴근시키고 김 할머니의 저녁을 챙겨주고 잠자리를 정돈해 주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첫 마디가 ‘죽고 싶다’, ‘다리가 죽었다’, ‘피가 안 통해서 다리가 썩어간다’ 등등의 인사로 하루를 시작하겠지만 어쨌든 잠자리에 눕혀주며 세희 씨는 ‘좋은 꿈 꾸세요’라고 말했다. 그럼 바로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한마디 얹는다. 못 들은 척 세희 씨는 김 할머니의 방을 나선다.
김 할머니가 잠자리에 든 시간이 세희 씨에게는 천국 같은 시간이다. 사위가 조용하고 거실의 작은 실내등만이 희뿌옇게 주변을 비추고 있다. 갑자기 세희 씨는 어떤 영화의 대사 한마디가 떠올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은?’, ‘과일은?’, 세희 씨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나의 모친이다’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 그 반대가 정직한 답이다. 그러나 세희 씨를 삶의 덫에 가둔 사람이 김 할머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덫을 벗어나는 것은 세희 씨 자신의 문제다. 그래 스위스로 가자, 혼자 중얼거리는 세희 씨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고 두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세희 씨는 몇 년 전에 제초제 음독으로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백모가 떠올랐다. 살아있다면 95세 정도이다. 80 중반 넘어 농가 창고에서 음독했고 늦게 발견한 사촌 둘이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응급 후송하며 위세척 등 각종 치료를 했지만 결국 1주일 만에 말 한마디 못 하고 사망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식도를 타고 들어간 농약이 식도‧장기를 훼손하고 목숨을 앗아가는 시간 동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어린 시절 여름‧겨울 방학을 맞이하면 동생들과 함께 자주 방문했던, 일가친척 모여 살던 충남의 한 농촌 마을에서 백모는 백부 몰래 그라목손을 마셨다. 사촌 둘은 지금까지도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며 길게 반목하고 있다.
‘라이프서클’ 영문 사이트에 가입했고 연회비를 납부한 다음, 세희 씨의 상황을 그쪽에 설명하기 위해 대학병원 전문의의 진단서와 의료기록, 세희 씨가 작성한 에세이가 필요했다. 라이프서클에 도착하기까지 의식을 잃으면 안 된다. 자칫 의식을 잃으면 그 상태 그대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서둘러야 한다. 수면제 복용 전 세희 씨는 ‘I am sick, I want to die, I will die’를 직접 자기 입으로 말하고 그 모습이 촬영된다. 같이 갈 사람이 필요하다. 가끔 각혈도 있고 호흡곤란도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혼자서 긴 비행을 감행할 수는 없다. 모든 내용을 확인하고 절차를 마무리한 다음 동생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동생들밖에는 없다.
결혼도 안 하고 홀로 살았던 세희 씨의 주변 정리는 두 달 이상 걸렸고 병은 점점 깊어 갔다. 세희 씨는 여행 준비를 마쳤다. 김 할머니가 왜 가방을 싸느냐고 자꾸 물었다.
“엄마, 나 스위스라는 나라 구경 좀 하고 올게.”
“스위스?”
벌써 잊었다. 상담 직원이 말했던 스위스를 며칠 외우더니 까맣게 잊었다.
“엄마, 잘 먹고 잘 자고 있어야 돼요. 금방 갔다 올게요.”
세희 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김 할머니를 달래고 있지만 그 속은 형언할 수 없다. 세희 씨는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한꺼번에 받고 있다. 집을 나서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김 할머니를 꼭 끌어안는다. ‘엄마, 다음 생에는 내가 엄마의 엄마로 태어날게요. 다시 태어나면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 엄마보다 먼저 죽을 게요, 지금처럼 말고….’ 혼자 웅얼거리는 세희 씨의 목소리가 떨린다. 울음을 삼키느라 상체가 들썩인다. 김 할머니가 뭔가를 눈치 챈 듯 세희 씨 얼굴을 보려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어서 떠나야 한다, 세희 씨는 등을 보이며 현관문 밖으로 빠르게 나선다. 동생들과는 인천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파트타임 생활지원사는 현관에서 세희 씨가 집을 나서기를 기다린다. 등을 보인 채 세희 씨는 김 할머니에게 큰 소리로 말한다.
“엄마, 로제 떡볶이 토요일마다 정기배송 시켜놔서 오후 2시쯤 오니까, 현관문 잘 열어주세요. 아무나 문 열어주지 말고….”
잠시 후 생활지원사가 재빠르게 현관문을 닫았다. 김 할머니의 울음 섞인 비명 소리가 현관문 안쪽에서 새어 나온다. 세희 씨는 발걸음을 멈추고 울음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길게 이어지는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던 세희 씨가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 걷던 세희 씨가 또다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김 할머니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몸부림치고 있다. 그 옆에서 생활지원사가 김 할머니를 힘겹게 붙잡고 시름하고 있다. 서로 엉겨 붙어있는 둘의 모습이 위태위태하다. 세희 씨는 결국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한참 선 자리에 못 박혀있던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