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책갈피에 꽂아둔 기억]
작가는 자기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대가로 처음으로 돈을 받거나 처음으로 칭찬을 듣는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그는 자기 핏속에서 허영이라는 달콤한 독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한다. 또한 재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문학의 꿈이 머리 위에 지붕을 드리울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된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그때 문학의 꿈이란 바로 일과가 끝날 무렵 먹는 따뜻한 음식이며 동시에 그가 가장 염원하는 것, 즉 허름한 종잇조각에 인쇄된 자기 이름이 틀림없이 자기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작가는 그런 순간을 떠올리도록 선고받은 사람이다. 그 순간에 그는 이미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있을 테지만, 그의 영혼만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천사의 게임, P13-
나는 가끔 무엇을 위해서 사진을 찍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낙서장에 날적이를 하고 있는 것인지, 습관적으로 메모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인지, 이도 저도 아닌 사진으로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인지 모를 때가 많다. <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이란 글도 그런 이유에서 쓰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어쨌든 누군가에게 말하기 보다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해서이고, 잊혀지는 기억들의 기록일 것이다. 아무도 관심 같지 않는 것들일지라도, 내가 경험했던 것들을 기록해 두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모든 삶이 그러하듯이 사라지고 말 기억들이지만.
순간적으로 생경(生硬)하기도 하지만, 꿈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 할려고 했지만 못했던 아쉬운 것들, 그리고 잘못된 행동을 했던 것들의 보상 심리로, 작용할 때가 많다. 데자뷰(deja vu)는 상상했던 현실일지 모른다.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이 되는 것,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은 아마도 그 경험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Reality)이 상상(Imaginary)이고, 상상이 현실이 된다. 리얼리티와 이미지 사이의 경계는 아마도 종이 한 장 차이일지 모른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영화는 코미디같은 상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상상이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될지도. 그런데, 이런 상상력은 점점 흩어진다. 현실은 현실일 뿐이라고, 로또를 맞는 상상은 허황(虛荒)된 꿈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이 없는 예술가는 아마도 죽은 예술가이고,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이 없다는 것의 다름 아니다. 생각 없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살고 있지 않는가. 생각을 많이 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은 더 문제가 심각하다.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누른 셔터의 숨소리만 들리는 듯하다.
며칠 전 들렀던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책 한권을 발견했다. 중고서점이지만 거의 새책일 많은 알라딘의 한 코너에는 <버리기 아까운 책> 코너가 있는데, 여기에는 정말 누렇게 변한 책들이 있었다. 그중 눈에 띈 책 한 권이 있었다. <껍데기를 벗고서>라는 책이었다. 어느 자취방에서 나온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책을 살펴보았다. 책의 중간에 뭔가가 있었다. 필름 한 조각이었다. 예전 흑백 필름은 파일에 끼우기 위해서, 6컷트(cut) 씩 잘랐는데, 그중 한 부분이었다. 책의 주인장은 필름의 한 부분을 책 사이에 끼워 놓고 있었던 것이다. 뭔 필름이지? 한참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흑백필름 티맥스(T-Max)로 현상된 것이다. 트라이엑스(Tri-X) 필름을 주로 썼었는데, 티맥스는 그 이후에 나왔던 브랜드로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흑백필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오버랩(overlap)되었다. 필름은 내 기억 속에 남겨져 있는 인물들을 소환하게 만든다. 흑백은 이 인물들이 입었던 옷이 어떤 색일지, 어떤 장소였는지, 나무의 잎은 무슨 색인지, 시기적으로 가을인지, 봄인지, 주변 모습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정보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지, 다채로운 현실에서 남겨진 것이 모두 상실된 모습으로 결국 상징만 남았다. 남아 있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사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실 많지 않다. 찍은 사람만이 알겠지.... 당시의 현실은 필름의 현상과정을 통해서 사진작가의 기억과 함께 정착액(Fix) 속에서 휘발된 채 남겨져 있다.
돈이라는 것이 돌고 돈다는 의미에서 돈일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시계바늘의 시침과 분침은 계속해서 원안에서 돈다. 필름의 현상도 현상탱크의 위와 아래의 용액이 골고루 섞이게 하기 위해서 30초 당 교반(agitation)을 해야 한다. 남기려는 사람과 지우려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