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망각 사진관]
나는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다. 아무것도 잊지 못한다는 뜻이다. 무슨 훈련을 통해 카드 한 벌의 순서를 외울 수 있게 되었다든가 하는 차원이 아니다. 고도로 활성화된 두뇌가 누구나 가지고 있으나 사용하지 않는 능력을 잠금 해제시킨 것이다. 게다가 감각 신경의 통로들이 교차했는지 숫자와 색깔이 연결됐고 시간도 그림처럼 눈에 보인다. 색깔들이 불쑥불쑥 생각 속으로 끼어든다. 나 같은 사람들을 ‘공감각자’라고 부른다. 나는 숫자와 색깔을 연결 지어 생각하고 시간을 ‘본다’. 사람이나 사물을 색깔로 인식한다.
-데이비드 발다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P39~40-
“싹 다 지워주세요.”
“필름에 있는 먼지들을 지워달라는 말인가요?”
사진관 아저씨는 초상사진을 복원하러 온 손님인줄 알고 말했다. 부모님 얼굴 사진을 복원하거나, 필름에 먼지를 제거하기 위해 스포팅(spotting)을 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필름을 삭제해달라는 말인가요?”
“아니요, 제 머릿속에 있는 필름(정보)들입니다.”
길 모퉁이에 허름한 사진관이 있었다. 그 사진관의 이름은 오필리아(Ophelia) 사진관이다. 왜 오필리아 사진관이라는 이름을 썼는지는 주인장이 아마도 햄릿의 등장인물인 오필리아를 꽤나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2018년 영화 <오필리아>에서 오필리아역을 맡은 데이지 리들리(Daisy Ridley)가 오른손에 꽃가지를 들고 호수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오필리아를 손에든 꽃은 기억이고, 호수의 수면은 망각이다. 기억과 망각의 늪에서 사진은 기억을 소환하기도 하지만, 망각(Oblivion)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D는 사진관을 찾았다. 그가 사진관을 찾은 이유는 자신의 기억들을 지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어떤 기억들은 너무나 생생해서, 그런 순간들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다. 조금만이라도 희미해지거나, 알 수 없는 그림처럼, 추상화처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잊으라고, 나쁜 기억들은 잊어버리라고 말은 하는데, 잘 되질 않는다. 기억의 상처는 아물기는커녕, 더 세세히 기억되니 말이다. 내가 오필리아 사진관을 찾은 이유는 그런 기억들을 지우고자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관을 찾은 이유가 부모님의 사진들, 또는 부모님과의 어린 시절 추억을 소환하기 위해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서 찾아온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사진은 변색되어 갔고, 찢어지기도 한 사진들을 복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나에게는 어떤 감흥도, 어떤 의미도 없다. 오히려 나에겐 그런 기억들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는 어두운 기억들이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으신가요.
얼룩진 기억을 깨끗하게 바꿔드립니다.
당신이 상상하는(Imaginary) 것 그대로
당신의 이미지(Image)를 확장시켜줍니다.
당신의 어떤 기억도 새롭게 탄생시켜 줍니다.
-사진관 주인 백-
‘코끼리는 절대 잊지 않는다(An elephant never forgets)’는 속담이 있다. 평생 동안 머릿속에 기억된 기억들을 다 기억한다면 이것은 재앙이다. 인공학습된 AI는 문명의 진보일지도, 문명의 재앙일지도 모른다. 기억의 저주를 풀지 못하고, 꾸역꾸역 머릿속에 집어넣어진 기억들이 엉켜진 그물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복사에 복사, 또 재복사, 재생산되는 기억들, 너무나 많이 덧칠해진 그림들.
“싹 다 지워주세요!!!”
“제가 디지털 장의사(digital undertaker)도 아니고, 다 지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진관 아저씨는 내게 의자에 잠깐 앉아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커피 한잔을 들고 내게 권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는 동안 말을 건넸다.
“무엇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기억인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든 기억들을 망각하는데 말이죠, 저는 그 기억들이 너무나 생생해요.”
한참동안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내 머릿속은 어지럽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