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이 기억을 본다

[18화 기억의 문을 열고]

by 노용헌

삶의 작은 비극들을 이겨내고 살아가기란 고되다. 비극들은 뇌 속에 있는 커다란 싱크홀 안으로 푹 빠졌다가 다시 올라오고, 그 사이에서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삶의 수렁에 무릎까지 빠져있을 때는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거기서 헤엄쳐 나오고 싶고,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 같다고 아우성치고 싶을 뿐이다. 게다가 당신이 수영에 능한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때 저쪽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발견한다. 그 어떤 패턴도 없는 파도에 밀려 올라간 사람들은 머리만 둥둥 떠서 이쪽저쪽으로 부유하는데, 그 바보처럼 까딱거리는 머리들을 보며 할 수 있는 일은 흐느끼다가 웃는 것뿐이다. 웃음은 상실의 슬픔으로 착란 상태에 빠진 당신을 흔들어 깨울 수 있다.

-리디아 유크나비치, 숨을 참던 나날, P16-


문을 열었다. 바닷물이 밀려들어온다. 바닷속 심연이다. 수면의 끝도 보이지 않는다. 바닷속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헤엄치고 있다. 나도 따라서 숨을 참고 헤엄을 친다. 손과 발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진다. 블랙홀에 빠진 것마냥, 헤엄칠 뿐이다. 내가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숨을 쉴 수 없었던 시간들, 내게 있어서 숨을 마음 놓고 쉴 수 있던 시간이 어쩌면 행복을 잊고 있던 것인지 모른다. 어쨌든 이 깊은 바닷속을 벗어나야 한다. 한참을 헤엄쳐서 올라간 것 같은데도, 수면이 보이질 않는다. 깊은 수면에 빛줄기가 비친다. 빛은 생명이고, 기억이다. 그 빛을 향해서 나는 올라가는 중이다. 그런데 자꾸만 힘이 빠진다. 언제까지 헤엄쳐 올라가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다 나는 어느 해변의 백사장에 누워 있다. 상의는 벗겨져 있고, 하의만 입은 채로, 그리고 신발도 신고 있었다. 그런데 눈이 떠지질 않는다. 소리가 어디서 윙윙 거린다. 아이인지 어른인지 모를 옹알대는 소리도 들리고, 사람들의 몰려오는 소리도 들린다. 보이지는 않지만 귓속에 많은 소리들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파도소리와 함께. ‘아이고’ 곡(哭) 하는 소리도 들린다. 내가 죽었나보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손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것처럼 내 몸은 고정되어 있다. 표류해온 걸리버(Gulliver)가 된 듯하다. 눈을 뜨려고 했지만 여전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사지가 묶여 있고, 천에 덮여 사람들에 의해 어느 병원인지 모르는 장례식장으로 옮겨졌다.


나는 차디찬 흙에 묻혔다. 그리고 문은 닫혔다. 눈을 뜨고 소리를 질러본다. ‘밖에 누구 없나요?’ 사방이 문으로 구성된 사각형이다. 그런데 문을 여는 손잡이가 없다. 걸쇠도 없는 것 같았다. 밀어내려고 했지만, 무거운 힘으로 눌려져 있었다. 안과 밖의 경계는 나무로 된 문짝이다. 그 문과 같은 벽이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고 있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었다. 출구는 막혀 있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듯 했다. 내가 사방이 벽으로 된 곳에 갇혀 있구나. 다행히 춥지는 않았다. 단지 밀폐된 이 공간에서 내가 얼마만큼 숨을 쉴 수 있을까. 한참을 발버둥을 쳐 보았다. 문과 문 틈사이가 조금 벌어지는 듯싶었다. ‘여기서 설마 내가 죽는 것은 아니겠지....’ 밖에서 누군가가 이 거대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계속해서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건가. 틈 사이로 물이 조금씩 들어오는 듯 했다. 이쪽을 계속해서 밀어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문 틈이 좀 더 벌어졌다. 이번에는 흙과 물이 섞인 채로, 밀려드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땅강아지가 된 것 같은 굴을 파고 흙을 헤쳐나가야 했다. 한참을 땅의 터널을 만들고 지상으로 올라가야 했다. 팔과 다리에 아무 감각도 들지 않았다. 오로지 굴을 파내는 일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만.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그리고 내가 지상에 나온 곳에서 나는 어지러웠다. 사방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학교 운동장 같은 곳에 있는 것 같았다. 해질 무렵이다. 햇빛이 어스름해지고 있었다. 붉은 햇살이 비친다. 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려보니, 내가 다녔던 학교 교정인 듯했다. 지나치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도 생경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가 아닌가. 건물은 낯이 익다. 그대로이다. 원형광장을 지나 건물들. 저쪽이 실기동이고, 여기는 학과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려고 했지만, 문들은 모두 도어락으로 채워져 있다. 비밀번호를 알 수가 없다. 어두워졌고, 학교는 을씨년스러웠다. 건물 사이로 저 길을 따라 가면 술집 골목들이 나오겠지. 그리로 가봐야겠다. 배도 고파오고 뭐좀 먹어야 겠다. 근데 돈이 있을려나. 바지춤을 뒤적여 봤다. 돈이 조금 있는 듯 했다. 꺼내보니 5000원짜리 지폐 한 장, 1000원짜리 지폐 세 장이 있었다. 이거면 한 끼는 할 수 있겠지 하고, 내리에 아마도 서울집이 있을 거야. 그리 가 봐야겠다. 막걸리도 한 잔 할 수 있겠지.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쪽 구석에 학생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자리 한 켠에 앉았다.


“저기요, 사장님, 주문 좀 하려는데요.”

“파전 하나하고, 막걸리 한 병 주세요.”

“그런데 오늘은 며칠이에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손님을 보는 술집 주인은 어이없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이 며칠인지도 몰라요. 8월 19일입니다.”

“몇 년도에요?”

“이 사람 이상하네, 어느 나라에서 온 거에요. 올해가 몇 년도인지도 몰라요?”

“1989년 아니에요?”

“아니요. 2026년이지요.”


술집 문을 열고 나갔는데 다시 앞이 안 보이질 정도의 칠흑같은 어둠 속이다. 저멀리 어둠 속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정릉동 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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