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편(內篇) ------------> 빛(Lighting)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음 음 음....”
-조동진, 제비꽃 노래中에서-
남해 바닷가에 네 명의 벗이 모여 있었다. 자사(子祀), 자여(子輿), 자리(子犁), 자래(子來)였다. 그들은 서로에게 물었다. “누가 무(無)를 머리로 삼고, 생(生)을 등뼈로 삼으며, 죽음을 꼬리로 삼을 수 있는가. 누가 삶과 죽음, 존재와 무(無)존재가 하나임을 아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와 벗이 되리라.” 네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 모두 친구가 되었다. 빛과 어둠은 하나이다. 빛이 있기 때문에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빛이 있다. 삶의 명암은 빛이 있었던 기쁨의 시절도 있지만, 어둠이 있었던 슬픔의 시절도 함께 공존한다. 사진은 빛과 어둠을 다루고 있다. 빛의 변화는 사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진인(眞人)의 경지
장자는 진인(眞人)을 이렇게 묘사한다. “옛날의 진인은 삶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싫어하지도 않았다. 태어남을 즐거워하지 않고 죽음에 들어감을 거부하지 않았다. 홀연히 가고 홀연히 올 뿐이었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잊지 않았고, 어디로 가는지 구하지 않았다. 받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돌려보낼 뿐이었다.” 계속해서 진인의 특징을 설명한다. “진인의 숨쉬기는 발뒤꿈치에서 나오고, 보통 사람의 숨쉬기는 목구멍에서 나온다.” 사진(寫眞)의 경지는 진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사진이 빛의 그림, 광화(光畵)로 번역되지 않고 사진(寫眞)으로 번역되어 있다. 실물과 똑같다는 의미에서 사진은 외적인 의미외에도, 내면의 정신도 나타내야 한다는 진(眞)의 측면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용어에서 보듯이, 정신적으로는 참된 것(眞)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장자는 “‘참된 사람(眞人)’이어야만 ‘참된 앎(眞知)’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참된 앎의 과정이 진인(眞人)의 과정이고, 사진의 과정이다.
‘참된 사람’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옛날의 ‘참된 사람’은 적은 일에도 거스르지 않고, 성공을 뽐내지 않으며, 일을 꾀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은 잘못 되는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으며, 잘 되어도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다... (중략) 그는 삶의 시작을 꺼리지도 않거니와 삶의 종말을 바라지도 않는다. 삶을 받아도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잃어도 또다시 그러하다. 이것이 자기 마음으로써 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며, 사람으로서 하늘의 돕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를 두고 ‘참된 사람’이라 부른다. ‘참된 사진가’가 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여(子輿)의 변화 – 형체를 넘어선 자유
얼마 후 자여가 병이 들었다. 자사가 문병을 가니 자여가 말했다. “위대하구나, 조물주여! 나를 이렇게 구부러지게 만들다니.” 그의 등은 굽고, 다섯 장기가 위로 올라가고, 턱은 배꼽에 숨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고, 목덜미는 하늘을 향했다. 자사가 물었다. “마음이 싫으십니까?” 자여가 대답했다. “아니다, 어찌 싫겠는가. 만약 내 왼팔을 변화시켜 닭으로 만든다면 그것으로 새벽을 알리게 할 것이고, 오른팔을 변화시켜 활로 만든다면 그것으로 새를 잡아 구워 먹을 것이다. 엉덩이를 변화시켜 바퀴로 만들고 정신을 변화시켜 말로 만든다면, 그것을 타고 다닐 것이니 어찌 다시 수레가 필요하겠는가.” 장애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존재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이다. 자일스 둘리(Giles Duley)는 1971년 영국 태생의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글을 쓰는 작가이다. 그는 전쟁으로 인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가 중동지역에서 잔혹한 전쟁의 참상과 전쟁으로 인한 시민들의 피해와 아픔을 사진을 통해 세상에 알려왔다. 그 또한 201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폭발물로 인해 왼팔과 두 다리를 잃었다. 그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사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누구보다도 높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매번 사람들을 ‘운이 없는 희생자’로서 묘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서) 끊임없이 제가 빈번하게 목격할 수 있었던 것들은 그들의 ‘강인함’과 ‘유머’, ‘웃음’, ‘사랑’이였습니다. 전 이러한 것들을 사진에 담습니다.”
자리(子犁)의 깨달음 – 삶과 죽음의 하나됨
다음에는 자리가 병들었다. 자래가 문병을 가니, 자리의 가족들이 울고 있었다. 자래가 말했다. “쉿! 물러가라! 변화를 방해하지 마라!” 그리고 자리에게 말했다. “위대하구나, 조물주여! 그대를 무엇으로 만들려는가. 쥐의 간으로 만들려는가, 벌레의 팔로 만들려는가.” 자리가 대답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동서남북 어디로 가라 하면 자식은 오직 명을 따를 뿐이다. 음양은 사람에게 부모보다 더한 것이니, 그것이 나를 죽음에 가까이 가게 하는데 내가 듣지 않는다면 나는 거역하는 것이다. 무릇 대지는 나에게 형체를 싣고, 삶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고,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하고,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하니, 내 삶을 좋게 여기는 것이 곧 내 죽음을 좋게 여기는 이유이다.” 사진은 그 자체로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 또한, 1초에 24번의 죽음을 경험한다. 사진은 찍는 동시에 필름에 고정된다. 필름에 고정된 사진을 자로우스키(Szarkowski)는 ‘불연속적인 시간의 한 부분’이라고 부르며 ‘동결(凍結)’된다고 말하고, 롤랑 바르트는 앵커(anchor)라는 개념으로, 바쟁은 미라(mummy)라는 개념으로 죽음, 존재, 시간을 고정시킨다고 말한다. 어쨌든 사진에는 삶과 죽음이 함께 고정된다.
자여(子輿)와 자상(子桑)이 친구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마침 장마 비가 열흘 동안 내리니 자여가 “자상이 병이 났을지도 모르지”하고 말하면서 밥을 싸 가지고 그에게 주러 갔다.
자상의 집 문 앞에 이르니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곡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거문고(琴)를 타면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버진가, 어머닌가? 하늘의 짓인가, 사람의 짓인가?”
그는 힘겹게 나오는 듯한 소리로 가사만을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자여가 들어가 말하였다.
“자네의 노래가 어째서 이 모양인가?”
자상이 말하였다.
“나는 나로 하여금 이런 궁지에 몰리게 한 것이 누군가 생각해 보았으나 알 수가 없네. 부모라면 어찌 내가 가난하기를 바리시겠는가? 하늘은 사사로이 어느 개인만을 덮어 주지 않고, 땅은 사사로이 어느 개인만을 길러 주지 않으니, 하늘과 땅도 어찌 나를 가난하게 만드셨겠는가?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던 것이네. 그러니 이토록 궁지에 놓이게 되었으니 이것이 운명이란 것인 모양일세.”
장자와 해골의 대화 – 죽음의 역설
장자가 초나라로 가는 길에 해골 하나를 보았다. 그는 말채찍으로 해골을 두드리며 물었다. “그대는 삶을 탐하다가 이치를 잃어 이렇게 되었는가, 아니면 나라가 망하여 도끼에 죽은 것인가?” 그날 밤 장자는 해골을 베개 삼아 잤는데, 꿈에 해골이 나타나 말했다. “그대의 말을 들으니 변론가 같구나. 그대가 말한 것은 모두 산 사람의 걱정이지, 죽음에는 그런 것이 없다. 죽음에는 임금도 없고 신하도 없으며, 사계절의 변화도 없다. 천지를 봄가을로 삼으니, 왕의 즐거움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장자가 믿지 않고 말했다. “내가 조물주로 하여금 그대의 생명을 되살리고, 형체를 돌려주며, 부모와 처자와 이웃을 돌려준다면 원하겠는가?” 해골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찌 왕의 즐거움을 버리고 다시 인간의 수고로 돌아가겠는가!” 목이 말라 바가지인줄 알고 해골에 든 물을 마셨던 원효대사의 깨달음의 이야기도 생각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는 사상이다.
좌망(坐忘) - 도와 하나가 되는 수행
안회가 공자를 찾아와 말했다. “저는 진보했습니다.” “무엇을 얻었는가?” “저는 인의(仁義)를 잊었습니다.” 안회는 자신이 배워온 도덕적 규범을 내려놓은 것이다.
며칠 후 다시 와서 말했다. “저는 또 진보했습니다.” “무엇을 얻었는가?” “저는 예악(禮樂)을 잊었습니다.” 안회는 이제 외적인 형식마저 버린 것이다.
또 며칠 후 안회가 말했다. “저는 좌망(坐忘)했습니다.” 공자가 놀라 물었다. “좌망이란 무엇인가?” 안회가 대답했다. “몸을 떨어뜨리고 총명을 물리치며, 형체를 떠나고 지식을 버려 대도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고 합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자, 좌망(坐忘)인 상태. 가끔 나는 사진이 왜 이리 진전이 없을까 싶다. 욕망이 앞서다 보면 놓치는 것들이 있다. 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좌망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사진은 기다림의 미학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그러한 기다림이 빛의 변화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순간, 빛의 적절한 순간을 좌망의 상태로 보는 것. 그것이 사진과 내가 하나되는 순간이다. 그 합일의 순간이 까르띠에 브레쏭이 말한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일지도.
도추(道樞) - 변화의 중심축
장자는 말한다. “도의 중심축을 얻은 자는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도추(道樞)는 문의 회전축처럼, 모든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중심점이다. 도추(道樞) 개념은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저것과 이것이란 상대적인 개념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편과 저편에서 치우친 시선이 아니라, 중심을 가진 축에서 도추의 시선은 좌망의 시선과도 같다. 노자의 도덕경에 “삼십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곡에 모인다.(三十輻共一殺)”라고 했듯이 수레바퀴의 중심축과 같은 것이다. 나와 너, 아름다움과 추함, 옳음과 그름, 삶과 죽음, 이분법적인 대립관계에서 중심축이 없다면 우리의 시선은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 다름만 치중하다보면, ‘색다름’만을 추구하다보면, 예술은 사실 그 중심된 의미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무엇이 중한가?’를 잃지 않기 위해선 도추의 시선이 필요하다.
천지정신과의 합일
“천지는 큰 용광로이고, 조물주는 큰 대장장이다. 어디로 가든 어찌 좋지 않겠는가.” 자연 속에 사는 인간은 우주의 일부이며, 인간의 죽음은 다른 형태로의 변화이다라는 인식이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게 된다.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 소멸의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 그렇다고 영원히 산다면 과연 행복하겠는가? 말이다. 유한하기 때문에 소중하고,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변화하는 것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이 역설적인 진리. 대종사(大宗師)편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변화를 받아들이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과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https://youtu.be/PRVfmdek-XI?si=JvjB5ncJh9mbFm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