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열풍

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355

by 노용헌


기술의 진보는 사고의 진보를 훌쩍 넘어서는 것 같다. 어느 분야에서든 인공지능(AI)의 관련주들은 급상승하고 있는 추세이다. AI 관련주들은 반도체,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자율주행, 의료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어디까지 상한점을 찍을지.


“우리의 예술은 과거에 형성되었으며, 그 유형과 용법은 현재와는 매우 다른 시대에 확립되었습니다. 당시 인간이 사물에 미칠 수 있는 힘은 지금의 우리와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술이 거둔 놀라운 성장, 그 기술들이 갖춘 적응력과 정밀함,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습관들은 머지않아 ‘아름다움이라는 고대의 기술(ancient craft of the Beautiful)’에 심오한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확신하게 합니다. 모든 예술에는 물리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요소는 더 이상 예전처럼 간주되거나 다루어질 수 없으며, 현대의 지식과 힘에 영향을 받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물질도, 공간도, 시간도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예술의 기법 전체를 변화시킬 위대한 혁신을 예상해야 하며, 이는 예술적 발명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치고, 어쩌면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폴 발레리, 『예술론(Pièces sur l'art)』 「편재성의 정복」中-


1928년에 발표된 폴 발레리(Paul Valéry)의 글은 발터 벤야민의 유명한 논문인 『복제기술시대의 예술작품』의 서문으로도 인용되었고, 급격하게 바뀌고 있는 AI 성장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00년 전의 지식인의 느꼈던 기술의 진보는, 인간이 기술 발전을 통해서 과연 얼마나 바뀔 것인지에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발레리는 “마치 물, 가스, 전류가 멀리서부터 우리 집으로 와서 별 어려움 없이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듯이, 미세한 제스처만으로도, 아니 신호 하나만으로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시각적 또는 청각적 이미지들을 우리는 제공받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발레리에게 이런 충격과 영감을 제공한 것은 수도 배관이나 전기 배선이 아니라 철도였다. 1843년 파리-오를레앙을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된 이후 유럽인들은 시공간 의식의 대혼돈을 겪었던 것이다. 어디든 쉽게 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편재성(ubiquitas)이다. 편재성의 정복은 기술대중화, 기술보편화가 주는 전능함이다. 전지성(omniscientia), 전능함(omnipotentia), 신성함(divinitas)은 신의 영역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시공간은 신의 계획인데, 이에 대한 도전인 셈이다.


기술에 대한 찬미는 예술가들에게도 극명하게 갈라서게 된다. 기술에 대한 찬미를 할 것인가, 인간미 없는 기술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과연 예술의 창조성은 무엇인가 말이다.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 등은 ‘기계 미학’을 주장했다. 그들의 심미안의 기계는 참된 것, 좋은 것이다.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는 ‘기술과 문명’(1934)에서 기계현상은 20세기 산업화 및 자본주의와 맞물리면서 급격하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 반대 사고도 있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기계들은 더욱 인간적으로 변화해가고, 인간은 더욱 기계적으로 변한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다. 역발상은 더 창조적이든지, 인간적이든지 말이다.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자고 말한다. 수작업의 시대에 대한 추억, 회고인 셈이다. 편재성과 창조성 사이 인간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편재성의 정복에 참전할 것인가, 아니면 창조성 확보에 동참할 것인가?


“모든 건전한 경제적 활동의 본질적 임무는 창조가 모든 경험에서 일반적 사실이 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 창조를 사회화하지 않고 교육에 알맞은 생산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생산의 기계화된 시스템은 단지 빵과 서커스에 만족하는 굴종적 비잔틴 형식주의로 굳어버릴 것이다.”

–루이스 멈퍼드 『기술과 문명』 中-


1.리얼리티(Reality)

1859년 살롱전에서 샤를 보들레르는 사진의 등장에 강하게 반대했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사실을 그대로 베끼는 ‘기계적 기록’일 뿐, 예술가의 창조성이 결여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사진의 출발은 많은 예술가들의 모방에 대한 개념을 흔들어 놓았다. 미메시스(mimesis, 모방 또는 재현)란 무엇인가? 그 사고의 폭을 오히려 확장시키지 않았을까. 리얼(Real), 실재에 대한 개념은 진보했다. 하이퍼리얼(hyperreal)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Simulation)으로, 가상현실에서 증강현실로 말이다. 존재를 넘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말이다.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리얼리티의 개념은 무엇인가?


2.아우라(Aura)

많은 전통 예술가들은 예술 작품이 가진 ‘단 하나뿐인 원본성’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원본은 진품을 뜻한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 있던 그림이 사진으로 찍혀 수만 장 복제되어 거리의 잡지에 실리는 현상을 보며, 예술이 가진 신비로운 권위(아우라)가 훼손된다고 느낀다. 누구나 소유할 수 있게 된 예술은 더 이상 숭고한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소모품이나 상품으로 전락했다는 엘리트주의적 반감이다. 현장성이 결여된 것은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콘서트홀에서 직접듣는 음악과 레코드판이나, CD, MP3로 듣는 것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3.복제성(Duplication)

기술은 계속해서 재생산(Reproduction)한다. 영원성(永遠性)과 무한복제성(無限復製性), 인간은 무한복제가 가능할까. 인간은 유한하다. 그리고 개인은 유일하다. 복제성과 유일성은 이율배반적이다. DNA를 복제한 클론(Cloning)은 복제양 돌리(dolly)와 같다. 판화나 사진은 복제성이 특성을 가진다. 예술작품이 되고자 했던 사진은 판화나 마찬가지로, 여러장을 찍는 것이 아닌 오리지널 프린트와 에디션 넘버를 두었다. 디지털에서도 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NFT(Non-fungible token)로 이미지나 밈, 동영상, 프로그램 등 디지털 자산을 위한 저작권과 소유권을 입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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