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37. 수잔 손택-플라톤의 동굴에서 광장으로

by 노용헌

사진은 허상일까? 실상일까? 우리는 사진이 실재를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믿는다. 마치 증명사진이 그러하듯이. 사진은 물론 실재를 찍고 있지만 실재의 반사된 빛을 담고 있다. 실재의 아우라를 찍는 것인지, 푼크툼을 찍는 것인지, 시뮬라르크를 찍고 있는 것인지? 철학가들은 자신의 언어로 설명한다.


수잔 손택(Susan Sontag)의 ‘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에서는 플라톤의 동굴(Plato's cave)로 시작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로 시작해서 이어지는 그녀의 책은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책 중의 하나이다. 나도 한때는 사진비평가가 되고자 꿈을 꾸게 만든 책이다.

철학자 플라톤은 가상의 한 동굴에 대해 묘사한다. 오로지 사람들은 동굴에서 동굴의 창문을 통해 비치는 모습을 볼 뿐이라고, 그들의 실체는 볼 수 없지만, 실체에 비친 그림자, 허상만을 볼수 있다는 것이다. 이데아의 세계, 우리가 아는 것은 정말로 제대로 알고 있는 세계인가. 동굴은 우리가 설정해 놓은 관념의 틀에서 만들어진 허구적인 동굴이다. 그 허구적인 동굴에서 우리는 세계를 바라보고, 판단한다. 그 잘못된 믿음들이 세계를 나의 잣대로 이리저리 재단한다. 또한 동굴의 밖에서 경험한 세계는 어두운 동굴에서 바라본 세계와는 사뭇 다를 수 있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에서 수잔 손택이 말한 동굴로 들어가 보자.


사진의 기본적인 본질은 ‘바라본다’는 것이다. 마치 동굴 속(카메라라는 암상자)에서 동굴 밖(렌즈를 통해서)을 바라보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바라보는 행위로 해석한다. 카메라를 둘러메고 세상 곳곳을 여행하며 자신의 경험을 사진으로 담아 인증샷으로 남긴다. ‘카메라를 든 사냥꾼들’은 수없이 셔터를 눌러대며, 동굴 속에서 동굴 밖으로 총을 난사하듯이 폭력적으로 플래시를 터뜨린다. 세상은 점점 사진의 홍수로 넘쳐나고, 관광객인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사회의 표면(그림자)만을 찍어댄다. 제3세계의 가난도, 전쟁도, 이젠 하나의 구경거리로, 그리고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했다. “산업화된 사회는 시민들을 이미지 중독자로 만들어 버린다. 사람들은 경험한다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으로 자꾸 축소하려 한다. 우리는 결국 세계의 고통의 본질을 제대로 모르면서 ‘아는 사람’이 돼 버렸다.”고 손택은 말한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사진의 내용이 어떻게 보여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어떤 특정한 내용을 드러내야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늘 자신들이 다루는 주제에 대하여 특정한 기준을 적용하기 마련이다. 카메라가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회화나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교적 무분별하고, 혼란스러우며 또 자아파괴적인 사진을 찍는 경우에도 계몽주의적인 요소는 감소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 기록 작업에 갖는 특성인 수동성과 편재성은 바로 사진의 ‘메시지’이자 사진의 공격적인 요소와 일맥상통할 수도 있다.” <손택의 사진론>


나의 카메라를 통해서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값싼 지식으로 값싼 연대를 한다고 착각한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굴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세계에 대하여 사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우리의 인식을 자극시킬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진이 주체적으로 윤리적 혹은 정치적인 지식을 공급해 주지는 못한다는 데 한계가 있다.”고 손택은 말한다. 스틸 사진 한 장으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사진이 가지는 매력적인 요소는 여운을 남긴다. 사진 한 장이 주는 이미지 쇼크는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을 시켜준다. 그것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진이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사진일지라도 그러하다. 내가 가 본적이 없는 어느 시골의 아름다운 풍경사진은 내가 여행을 하면서 아 이곳이 내가 어디서 본 듯한, 언제 내가 다녀온 적이 있지 않았을까하고 착각하게 만든다. 데자뷰되어 풍경이 내게 다가온다.

“사진은 포착된 경험이며, 카메라는 경험을 포착해 두려는 심리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해주는 의식의 도구이다. 카메라는 일종의 약이자 병이며, 현실을 전유하고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는 수단이기도 하다. 사진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피사체로 둔갑시켜 소비품으로 변모시킨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통해 현실을 구매하거나 구경하게 된다.”고 손택은 말한다. 손택은 사진가의 바라보는 행위에 대한 윤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연 사진가는 동굴 속에서 세계를 바라본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이창 Rear Window>에서 다리를 다친 남자(제프)는 꼼짝없이 집안에 갇혀 자신의 아파트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본다.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과 사진 주제와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 카메라는 피사체를 강간할 수도 또 소요할 수도 없다. 그러나 상황을 상상하고, 관여하고, 침해하고, 왜곡시키며, 이용하고 가장 먼 곳에 있으면서도 은유적인 표현으로 피사체를 암살할 수가 있다. 성정(性的)인 강요나 공격과는 달리 사진을 찍는 행위는 모든 활동들과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를 둔 상태에서 진행된다.” <손택의 사진론>


“사진가는 약탈하면서도 보존하고, 고발하면서도 신성시한다.”고 손택은 말한다. 그리고 또한 사진을 찍는 작업은 피사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며, 세계와의 일정한 관계에 자기 자신을 참여시키는 것이고 말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며, 세계와의 관계속에서 얼마만큼의 참여를 하며 사진을 촬영하는가? 나의 사진이 폭력적이지 않으며, 상황에 개입되지 않으며, 중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하며 또한 방관자와 관광객이 아니라 동굴 밖으로 광장으로 나와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 사진가인가?


“지금 우리는 향수(鄕愁)를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사진은 우리의 향수를 활발하게 부추기고 있다. 사진은 소야곡과 같은 예술이며 여명(黎明)의 예술이다. 사진으로 찍혀지는 주제들은 대부분 사진으로 찍혀진 덕택에 정념(情念)을 띠게 된다. 추하거나 이상스러운 주제들까지도 사진찍는 사람의 시각에 포착되면 그때부터 존엄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감동울 줄 수가 있게 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주제라 할지라도 회환스러운 감정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또 아름다운 대상도 낡게 되거나 소멸되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은 ‘죽어버린 순간’(memento mori)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혹은 다른 사물)의 죽음, 상처, 무상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 작업은 그러한 순간을 정확하게 도려내어 응결시킴으로써 속절없이 흘러가 버리는 시간을 증거하는 행위인 것이다.” <손택의 사진론>


사진은 향수(Nostalgia)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사진에 찍혔다는 것은 찍혔다는 그 사실로써 이미 향수를 띠게 된다. 사진은 ‘죽어버린 순간’을 찍었기 때문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허상, ‘지나간 기억’을 찍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은 만질 수 없는 존재, 실상을 대변하는 허상을 담고 있기 때문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사진은 증명사진과도 같이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을 증거하며, 실상을 대변하는 강력한 표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