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310. 랑시에르의 '이미지의 운명'을 읽고

by 노용헌

라스코 동굴벽화의 이미지에서 보듯이 인간의 역사는 이미지의 역사일지 모르겠다. 글자또한 상형문자, 알파벳이란 글자 이미지는 인간이 대상을 이해하고, 인식하고, 전달하는 수단인 셈이다. 이미지로 이해하고, 이미지로 연상된 기억들을 서로간의 소통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관념들은 이미지라는 기능이 과연 리얼리티를 수반하는가? 그런 물음에서 랑시에르는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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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리얼리티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이미지만 있다고, 혹은 거꾸로 이제부터 이미지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재현하는 리얼리티만이 존재한다고 주장될 때, 사람들이 무엇에 대해, 정확히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일까? 이 두 담론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아주 초보적인 추론만으로도 우리는 이 담론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이미지들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미지의 타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미지의 타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미지라는 통념 자체가 그 내용을 잃어버리며, 이미지 또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많은 저자들은 ‘타자Autre’를 지시하는 ‘이미지Image’와 그 자체만을 지시하는 ‘비주얼Visuel’을 대립시킨다.

이 단순한 추론은 이미 또 다른 의문을 야기한다. ‘같음(동일자Le Meme)’이 다름(타자)‘의 반대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내세워진 ’다름(타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다. 첫째, 어떤 기호에 의해서 다름(타자)의 현전이나 부재를 분간할 수 있는가? 화면의 어떤 시각적 형태는 다름(타자)이 있으나 다른 형태에는 그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P9-10)


이미지는 과연 그 존재와 유사한 것인가?


요컨대 이미지는 단순히 이중적일 뿐만 아니라 삼중적이기도 하다. 예술의 이미지는 유사성을 낳는 기술과 이미지의 조작을 분리시킨다.....(중략)

원-유사성은 원본적 유사성, 즉 리얼리티의 복제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유래하는 다른 곳을 직접적(무매개적)으로 증언하는(보여주려는) 유사성이다. 이런 원-유사성은 우리의 동시대인들이 이미지에서 요구하는 이타성, 혹은 이미지와 함께 사라졌노라고 비탄해하는 이타성이다. (P22)


사진은 자신의 고유한 기술적 자원을 이런 이중적 시학에 봉사하게 함으로써 예술이 되었다. 즉, 익명의 사람들의 얼굴이 두 번 말하게 함으로써 사진은 예술이 되었다. 그들의 용모, 옷, 생활환경에 직접 새겨진 조건에 관한 무언의 증인으로서, 그리고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의 보유자로서, 그들이 우리에게 누설하는 이미지 자체에 의해 숨겨진 비밀의 보유자로서 말이다. 사진을 사물에서 떼어낸 피부라고 여기는 지표적 이론은 모든 것은 말한다는 낭만주의 시학, 사물의 신체 자체에 아로새겨진 진실이라는 낭만주의 시학을 판타지로 육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스투디움푼크툼의 대립은 미학적 이미지를 상형문자와 의미(방향) 없는 벌거벗은 현전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가게 하는 양극성을 자의적으로 분리시킨다.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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