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읽고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유명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복제성의 화두는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에게는 시뮬라르크(simulacres)이다. 시뮬라크르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가 작용한다’는 뜻의 동사다. 시뮬레이션이란 ‘사람들이 연구하거나 사용하도록 어떤 것을 보고, 느끼고, 행동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파생된 의미나 은유적인 의미로는 ‘모의 실험, 모의 훈련, 가장, 흉내, 속이기, 겉치레’등이 있다. 원본과 복사본의 경계가 모호해진 복제에 따른 모든 이미지는 본질과 유사한 이미지를 재생산함으로써 생성되는 개념들이다.
벤야민의 시대는 아직 디지털이 도래하지 않은 아날로그의 시대이다. 그에게 있어서 사진이라는 매체의 혁명은 판화와 마찬가지로 대량복제의 기능에 대한 탐구였다. 그에게 있어서 대량복제는 그 이전 시대에서 특정인들의 향유의 대상이 대중들에게도 누릴 수 있는 예술의 대중화이다. 그리고 그로인한 진품, 원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우라(Aura)의 개념을 이야기했다. 현대의 시대는 디지털의 시대이다. 무엇이 원본인지 모를 정도로 디지털은 그 자체가 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포스트모던한 사회에서 원본을 주장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 가장 쉽게는 우리가 시뮬라크르를 생각할 때, 현대의 전쟁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미사일 발사는 화면이라는 컴퓨터로 보면서 하지 실제 미사일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보면서 하지 않는다. 이때 시뮬라크르인 화면상의 미사일 궤도는 실제 탄의 궤도일 것이며, 더 나아가 실제 탄이 목표에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는 이제는 중요치도 않게 되어버렸다. 결국 시뮬라르크는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실제 대상이 가장된 이미지를 따라야 한다. 시뮬라시옹은 시뮬라르크의 동사적 의미로 <시뮬라르크를 하기>이다. <시뮬라시옹, P9>
시뮬라시옹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 즉 파생 실재(hyperréel)를 모델들을 가지고 산출하는 작업이다.“
원본과 복제의 관계는 철학에서 수 천년동안 다뤄진 문제였다. 플라톤의 경우 복제물은 원본보다 못하다고 깠다. 플라톤은 이데아(idea) 개념을 주장했는데, 그는 '모든 사물의 원본'인 이데아가 있으며, 이 이데아는 사물세계(물리적인, 우리가 사는 이 세계) 너머 다른 곳(형이상학의 세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시뮬라시옹>의 원래 제목은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이다. 보드리야르는 이처럼 실제가 아닌 것이 더 실제 같은, 그리하여 가상과 현실이 뒤바뀌는 현상을 ‘시뮬라시옹’이라 일컬었다.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시뮬라크르’는 원본과의 관계가 끊어진 복제이다.
재현이 시뮬라시옹을 그릇된 재현으로 해석하고 이를 흡수하려고 시도하는 반면, 시뮬라시옹은 재현의 축조물 자체를 송두리째 시뮬라르크로서 감싸버린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반영이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을 감추고 변질시킨다.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의 부재를 감춘다.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어떠한 사실성과도 무관하다.: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순수한 시뮬라르크이다. 첫 번째 이미지는 선량한 외양이다. 두 번째 이미지는 나쁜 외양이다. 세 번째 이미지는 외양임을 연출한다. 네 번째 이미지는 전혀 외양이 아니라 시뮬라시옹의 계열이다.
<시뮬라시옹, P27>
요컨대, 함열적 사회 속에서 시스템은 이른바 ‘위기 담론’을 반복해서 제작하며 시스템의 균형을 깨뜨릴 모든 가능성을 저지하려 시도한다. 미국 사회는 이미 허구였지만, 권력은 마치 ‘디즈니랜드’가 문제인 것처럼 제시한다. 권력 자본은 이미 부패했지만, 권력은 마치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문제인 것처럼 제시한다. 노동 체계는 이미 정지되어 있었지만, 권력은 마치 ‘파업’이 문제인 것처럼 제시한다. 대통령(대의제)은 이미 부재했지만, 권력은 마치 ‘암살’이 문제인 것처럼 제시한다. 사회는 이미 미쳐있었지만, 권력은 마치 ‘광기’가 문제인 것처럼 제시한다. 인종학은 이미 한계였지만, 권력은 마치 ‘테이세이데이인’을 보존하지 않은 것이 문제인 것처럼 제시한다. 전쟁은 이미 끝났거나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권력은 마치 ‘핵 전쟁의 공포’가 문제인 것처럼 제시한다. 위협이 시뮬라크르로부터 오는 오늘날 권력은 위기를 연출하고 실재를 연출하며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목표를 재생산한다. 권력과 제도는 자기 자신이 이미-죽어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의 죽음을 연출하고 이윽고 성대한 부활을 선언한다. “전쟁은 시작하기 훨씬 전에 이미 끝나 있었으며, 전쟁 자체의 중핵에는 언제나 전쟁의 끝이 위치해 있고, 전쟁은 어쩌면 시작된 적도 없었다. 다른 수많은 사건들도 그것이 인위적으로 발생한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시작되지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았다. (...) 모든 사건들은 거꾸로 읽어야 한다.” <시뮬라시옹, P88>
둘 중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객관적 가치를 더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저항-주체만 오늘날 일방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가치화되었다. 이는 정치적 영역에서 정치적 주체로서 오직 자유와 해방, 표현과 구성의 실천만이 유효하고 전복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과 같다. (...) 그러나 이러한 실천은 결코 또 다른 강요에는, 우리를 주체로서 구성하라는, 우리를 해방하라는, 무든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를 표현하라는, 투표하고, 생산하고, 결정하고, 말하고, 참여하고, 게임을 하라는 강요 – 다른 것만큼이나 중대한, 오늘날에는 틀림없이 더욱 중대한 협박과 최후의 통첩에는 반대하여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 체계의 현재 논리는 말의 극대화와 의미의 극대생산이다. 따라서 전략적 저항은 의미의 거부와 말의 거부이다. 혹은 시스템의 메커니즘에 대해서조차 극도로 순응하여 버리는 시뮬라시옹에 의한 저항으로 이는 저항이고 비-접견이다. 이것이 대중들의 저항이다. 이는 체계에게 자기자신의 논리를 다시 배가하여서 되돌려 보내는 것이며, 마치 거울처럼 의미를 흡수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것과 등가이다. (우리가 여전히 전략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이러한 전략이 오늘날 우세한데 왜냐하면 과거에 우세했던 것은 바로 체계의 저 극대 단계였기 때문이다. <시뮬라시옹, P152-153>
체제의 이러한 최상의 교활함, 자기 죽음이라는 시뮬라크르의 교활함은 모든 가능한 부정성을 흡수하여 제거해 버렸다. 그 때문에 체제는, 이 죽음 시뮬라크르의 교활함을 통하여 우리를 산 채로 유지한다. 오직 더 우월한 교활함만이 이 시스템의 교활함의 방어를 할 수가 있다. 도전 혹은 상상의 과학, 오직 파타피직스(pataphysics)만이 시스템의 시뮬라시옹 전략으로부터, 시스템이 우리를 가둔 죽음의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우리를 빠져 나오게 할 수 있다. <시뮬라시옹, P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