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주장하는 바는 세계가 한편으로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로서의 세계'라는 것이다. 표상(表象)은 인간의 오감으로 인지된 것을 말한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표상이다. 우리는 '표상의 전체'를 세계라고 부른다. 세계가 A라서 우리가 A로 인식한다고 보는가? 아니면 세계가 우리에게 A로 드러나서 세계를 A로 인식할 뿐이지 세계의 실재가 A임은 확인하지 못한다고 보는가? 전자가 실재론이고, 후자가 관념론이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 말은 삶을 살면서 인식하는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진리다. 하지만 인간만이 이 진리를 반성적, 추상적으로 의식할 수 있고, 인간이 실제로 이것을 의식할 때 철학적인 사려 깊음이 생긴다. 이 경우 인간은 태양과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느끼는 손을 지니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는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 즉 세계는 다른 존재인 인간이라는 표상하는 자와 관계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 그에게 분명하고 확실해진다. (P39)
사진가는 세계(세상)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자이다. 카메라는 도구는 거울(mirror)이기도 하지만, 창(窓, window)이기도 하다. 사진가가 인식하는 세상은 프레임을 통해서 바라본 표상(表象)의 세계이다. 표상행위는 대상의 재현이며, 재현으로서의 표상함이란 내 앞에 있는 것을 나와 대립하여 있는 것으로서 자신 앞에 가져오는 것이다. 사진가는 자기 앞에 있는 것을 표상하는 자신과 관련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표상행위가 카메라를 통해서 상(이미지)을 고정하는 작업이고 대상을 재현하는 셈이다.
우리는 꿈에서 깨어난 듯, 유물론이 이렇게 힘들여 만들어 놓은 최후의 결과인 인식 작용은 이미 최초의 출발점에서 단순한 물질의 필수적 조건으로 전제되어 있었음을 단번에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유물론으로 사실 물질을 사유한다고 자부했지만, 실제로는 물질을 표상하는 주관, 물질을 보는 눈, 물질을 느끼는 손, 물질을 인식하는 지성을 사유했을 뿐이었음을 단번에 깨닫게 될 것이다. (P73)
현상은 표상을 의미할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다. 어떤 종류든 모든 표상, 즉 모든 객관은 현상이다. 하지만 의지만이 사물 자체다. 의지 그 자체는 결코 표상이 아니고 표상과 전적으로 다르다. 모든 표상, 모든 객관은 의지가 현상으로 나타나 가시화된 것, 즉 의지의 객관성이다. 의지는 모든 개체 및 전체의 가장 심오한 부분이자 핵심이다. 의지는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자연력 속에 현상하고 숙고를 거친 인간의 행동 속에서도 현상한다. (P172)
표상이란 대상의 재현(representation)으로서, 눈앞의 대상을 이미지(Bild)화 시키는 것이다. 존재자(사진가)가 대상을 인식하고 재현하는 것은 표상함을 통해서이다. 표상작용을 통해, 존재자는 인간 의식에 존재하는 이미지가 된다. 그 이미지를 통해 존재자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 그런 존재는 ‘그 무엇’이라는 존재자와 같은 것이다. 사진가가 재현(representatio)을 통해서 사유함은 궁극적으로 표상함인 것이다.
사실 추상적 표상인 개념은 직관적 표상에 대한 관계를 통해서만 온갖 내용과 의미를 갖는다. 직관적 표상에 대한 관계없이는 아무런 가치와 내용이 없으므로, 그런 점에서 우리는 추상적 표상의 내용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직관적 표상을 참조하여 우리는 그 내용, 그것의 보다 상세한 규정, 그것이 우리 눈앞에 드러내는 형태도 알게 되었다. 특히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직관적 표상의 본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그 의미는 보통 그냥 느껴질 뿐이지만, 그 의미가 없다면 직관적 표상에 의한 여러 형상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완전히 낯설고 무의미해서 우리 곁을 슬쩍 지나치고 말겠지만, 그 의미가 있기에 직접 우리에게 말을 걸고 이해되며,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칠 만한 흥미를 얻게 되는 것이다. (P153)
사진의 프레임은 형상(figure)과 배경(background)으로 이루어진다. 표상은 형상의 형태로 인지한다. 표상함은 우리 눈앞에 드러난 형상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모든 의욕은 욕구에서, 즉 결핍이나 고뇌에서 생긴다. 이 욕구는 충족되면 끝난다. 하지만 하나의 소망이 성취되더라도 적어도 열 개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남는다. 더구나 욕망은 오래 지속되고, 요구는 끝없이 계속된다. 즉, 충족은 짧은 시간 동안 불충분하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심지어 최종적인 충족 자체도 겉보기에만 그럴 뿐, 소망이 하나 성취되면 즉시 새로운 소망이 생긴다. 의욕한 대상을 얻지 못하면 확고하고 지속적인 충족을 얻을 수 없다. (P278)
모든 충족, 또는 흔히 행복이라 부르는 것은 원래 본질적으로 언제나 소극적인 것에 불과하며 결코 적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저절로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소망이 충족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소망, 즉 부족이란 모든 향유의 선행 조건이기 때문이다. (P435)
의지의 자유로운 부정이나 포기와 함께 이 모든 현상도 이제 없어진다. 목표도 휴식도 없는 계속된 소동과 혼잡이 없어지고, 단계적으로 이어지는 여러 형식의 다양성이 없어지며, 의지와 더불어 그 전체 현상이 없어지고, 최종적으로 이 현상의 일반적 형식인 시간과 공간도, 그 현상의 궁극적인 기본 형식인 주관과 객관도 없어진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다. (P543)
쇼펜하우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욕구로 관철되기 때문에 고통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욕망을 일으키는 의지를 부정하고 그로부터 초연한 삶을 살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의지를 초월했을 때, 삶의 고통은 무無가 된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의지를 통해 주장하는 그 만의 ‘행복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