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313. 빌헬름 딜타이의 '체험, 표현, 이해'를 읽고

by 노용헌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는 독일의 철학자로서, 학문적으로는 슐라이에르마허의 해석학을 계승하는 해석학자였다. 그의 해석학은 흔히 삶의 해석학으로 불린다. 그는 텍스트를 해석할 때 해석자가 경험하였던 삶의 체험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경험한 만큼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텍스트를 해석한 만큼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다.


현대해석학은 크게 보면 인식론 지향의 해석학과 존재론 지향의 해석학으로 나눌 수 있다. 인식론적 해석학은 딜타이에서 에밀리오 베티(Emilio Betti)로 이어지고, 존재론적 해석학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서 가다머로 연결된다. 인식론 지향의 해석학은 해석학을 해석 일반의 방법론으로 받아들이고, 존재론 지향의 해석학은 인간 존재 자체를 하나의 해석 구조로 보면서 철학적인 인간 이해를 시도한다. 가다머의 해석학을 철학적 해석학이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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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모든 개개의 삶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그 의미는 하나의 의의연관 속에 놓여 있는데, 그 연관 속에서 기억 가능한 모든 현재는 나름의 가치를 갖지만 동시에 그것은 기억의 연관 속에서 전체의 의미에 대해 하나의 관계를 갖게 된다. 개개의 현존이 갖는 이 같은 의미는 지극히 독특해서 [자연과학적인 의미의] 인식만으로는 해결 불가능하며 또 그것은 라이프니츠(Gottfried W. Leibniz)의 단자(單子, Monade)와 같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역사적인 우주를 표상한다. (P31-32)


나는 하나의 색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대해 판단하며, 그 색은 나를 즐겁게 하고, 나는 그것이 계속 내 앞에 있어주기를 열망한다. 이런 표현들을 써서 나는 체험 안에 있는 이러한 내용성과 관계되는 다양한 태도 방식들을 그려낸다. 그리고 색에 대해서와 똑같은 판단의 태도가 다른 대상들과도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태도의 방식들이 내용들의 현전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내용들이 태도 방식들의 나타남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체험의 이 두 구성 부분을 분리해낸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체험 속에 있는 그것이 하나의 구조적 통일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행위와 내용 사이에는 태도에 근거를 둔 하나의 관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관계를 내적 관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체험 가능하며 동시에 태도의 일정한 규칙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체험들은 구조적 통일성임이 입증되고 그로부터 정신적 삶의 구조가 구축된다. (P143-144)


우리가 경험하는 체험은 그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딜타이가 말한 체험, 표현, 이해의 제목은 사실 체험→이해→표현(예술작품)→해석(비평가나 독자)의 순으로 진행된다고 본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영감은 예술가 자체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예술가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창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 모르겠다. 다큐멘터리 사진의 경우, 현장을 기반으로 한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것들에서 출발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창작이거나, 초현실일 것이다.


사진가는 자신의 카메라로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사진으로 표현한다. 경험한다는 것과 체험한다는 것은 다를 것이다. 경험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 가능하지만, 체험은 삶 자체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경험주의자였던 나는 농활과 공활등을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삶 자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계급적인 면도 있고, 지식인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딜타이가 말하는 체험은, “개개의 체험은 모두 자기와 관련을 맺고 있고, 바로 그 자기의 부분이 체험이다.”


[이해]

이해란 ‘너’ 안에서 ‘나’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정신은 점점 높은 단계들의 연관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나’ 안에서, ‘너’ 안에서, 한 공동체의 모든 주관 안에서, 문화의 모든 체계 안에서, 종국적으로는 정신의 총체성과 보편사 안에서의 이 같은 정신의 자기성(自己性)은 정신과학에서 다양한 기능들의 협력을 가능하게 해준다. 정신과학에서 앎〔인식〕의 주관은 그 대상과 하나이며, 이 대상은 모든 단계의 객관화 과정에서 통일성을 유지한다. 이런 절차를 통해 주관 안에서 빚어지는 정신적 세계의 객관성이 인식되고 나면, 그 절차가 과연 인식 일반의 문제 해결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P17-18)


지속적으로 고정된 삶의 표현들에 대한 기술적인 이해를 우리는 해석(解釋, Auslegung)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정신적 삶은 언어를 통해서만 자신의 완전하고 창조적이며 따라서 일정하게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해주는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해석은 창작물(작품) 속에 포함된 인간적 현존의 나머지 것들에 대한 세부적인 해석들을 통해 완성된다. 이런 기술이 문헌학의 토대이다. 그리고 이런 기술의 학문이 해석학(解釋學, Hermeneutik)이다. (P59)


나는 풍경을 보고 그것을 파악한다. 여기서는 우선 이것이 삶의 관계가 아니라 단순한 파악의 관계일 것이라는 가정이 배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풍경과 관련되는 순간 그렇게 현전(現前)하는 체험을 그림 혹은 상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나는 ‘인상(印象, Impression)’이라는 표현을 선택하고자 한다. 근본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은 이 같은 인상들뿐이다. 인상에서 분리된 자기란 없으며 또한 어떤 것을 인상이게끔 해주는 것도 없다. 그것은 다만 내가 추후에 구성할 뿐이다. (P80)


딜타이는 ‘체험으로 알아차림, 실재성:시간’에서, 시간은, 현재적인 것이 계속해서 과거가 되고 미래적인 것이 현재가 되는, 현재의 쉼 없이 앞으로 나아감으로 경험된다고 말한다. 현재란 하나의 시간 계기를 실재성으로 충족시키는 것이다. 또 현재는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소망, 기대, 희망, 두려움, 의욕 등에서 생겨나는 미래적인 것에 대한 표상들과 대립되는 실재성들이다. 이때의 시간에 담기는 질 또는 내용들은 다름 아닌 실재성의 체험이며 이해의 대상이 된다. (P150-151)


상황이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사진가의 판단에서 나온다. 사진가는 카메라라는 도구를 통해서 세계를 이해한다. 프레임과 앵글을 통해서 바라본다. 어떤 위치에 따라서 그 이해는 달라진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오해로 여겨진다. 어떤 프레임이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물은 그 의미를 다르게 전달한다. 여기서 이해는 나의 인상(印象)인 셈이다.


[표현]

표현은 그 어떤 내관이 가질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신적 연관들을 포함할 수 있다. 그것은 의식이 미처 다 밝히지 못하는 저 깊은 곳에서 그것을 끌어올린다. 하지만 동시에 체험 표현의 본성 때문에 그것과 그것 안에 표현된 정신적인 것 간의 관계는 매우 제한적으로 이해를 위한 근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체험 표현은 참과 거짓이라는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진실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판별 대상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위조나 위장, 거짓, 기만 등이 표현과 표현된 정신적인 것의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P42)


[해석]

삶의 표현들이 우리에게 전혀 낯선 것이라면 해석은 불가능할 것이다. 또 그것들 안에 낯선 것이 하나도 없다면 해석은 불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해석은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이 두 명제 사이에 존재한다. 해석은 이해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어떠 낯선 것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건 요구된다.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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