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고
<차이와 반복>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1969년 박사논문이다. 1995년 들레즈 본인이 죽기 전에 『마르크스의 위대함 (La Grandeur de Marx)』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마지막 글인 「내재성: 하나의 삶...」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두고,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스스로 호흡기를 뗀 후 투신 자살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중요한 개념어는 ‘동일성’과 ‘재현’이라는 문제이다. “플라톤에서 시작된 재현주의적 전통은 라이프니츠와 헤겔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한다. 라이프니치는 지나치게 작아서 개념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차이에 대해, 헤겔은 개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차이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재현적 절차를 고안함으로써 재현적 매개의 범위를 무한대의 차이로까지 확장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들뢰즈에 의하면 헤겔과 라이프니츠의 경우에서도 차이는 이미 부정적인 것으로 환원되어 동일자에 종속되어 있다. 라이프니츠의 가능 세계는 가능성의 확장을 중단하고 기성의 현실을 ‘신에 의한 최선의 선택’으로 변호하는 호교론에 머무르고, 헤겔의 변증법적 원환은 진정한 영원회귀가 아닌 부정성을 통한 동일자의 무한한 순환일 뿐이다. 무한한 재현 안에서 광기는 미리 형성된 광기, 동일자의 휴식과 평온을 전혀 깨뜨리지 못하는 거짓 광기에 불과하다." (P130)
첫째, '재현'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둘째, '비판'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것이 이 책의 어려운 부분이다. 개념의 사용에 있어 들뢰즈는 항상 그 의미를 변형하고 재창조하는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재현'이라는 말은 수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때때로 재현은 '동일성의 형식'과 동일시되며, 가끔은 '사중의 뿌리'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들뢰즈는 재현을 '지식', '명제', 문제에 대한 해결의식, 의견, 그리고 판단과 등치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목록의 예는 꽤 길어질 수 있지만 이 모든 예들이 결국 '대상'을 지시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P21)
헤겔은 그의 정신현상학에서, “매개(媒介)란 자기 동일성 그 자체로 운동하는 것이고 자기와 대립하여 있는 자아가 이를 자각하는 과정에서 다시 자기에게로 복귀하는 순수한 부정성인데 이 운동을 순수하게 추상화 해보면 이것은 결국 생성의 운동이다.”라고 말했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사유의 이미지(image de la pensee) 없는 사유가 어떻게 가능한가?” 들뢰즈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바로 고전 철학의 ‘사유의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주관적이며 암묵적인 전제들의 임의성을 밝히고, 그런 임의적인 전제에서 벗어난 발생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차이와 반복 속에서 모색하는 것이다. 사유의 이미지란 사유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공리와 공준들로 이루어진 사유의 지평, 즉 사유를 가능케 하는 어떠한 암묵적인 전제를 가리킨다. “철학에서 공준들은 철학자가 일반인들에게 동의를 요구하는 어떤 명제들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거꾸로 명제들에 암묵적으로 담겨 있는 어떤 주제[테마]들이고, 이 주제들은 어떤 선-철학적인 방식을 통해 이해되고 있다. (...) 이런 사유의 이미지를 우리는 독단적 혹은 교조적 이미지, 도덕적 이미지라 부를 수 있다.” (P296-297)
"재현은 개념 안의 동일성, 개념의 규정 안에 있는 대립, 판단 안의 유비, 대상 안의 유사성 등의 요소들에 의해 정의된다. (때문에) 차이가 재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안제나 개념적으로 파악되는 어떤 동일성, 판단을 통해 주어지는 어떤 유비성, 상상에 의한 어떤 대립, 지각상의 어떤 상사성과 관계 맺을 때이다." (P307~308)
들뢰즈는 반복을 위장과 견주어 억압을 설명하고 있고, 위장은 반복 자체의 환언으로 나타나 있다. “억압하기 때문에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복하기 때문에 억압하는 것이다. 또한, 결국은 같은 것이지만, 억압하기 때문에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장하기 때문에 억압하는 것이다.” (P241)
되돌아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고 되돌아오는 것의 회귀에 선재하지 않는다. 이 유사성과 동일성은 일단 되돌아오는 것의 특성과는 무관하고, 다만 이 되돌아오는 것의 회귀와는 서로 절대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되돌아오는 것은 유사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같은 벗은 되돌아오는 것의 복귀이고, 다시 말해서 차이나는 것의 복귀이다. 유사한 것은 되돌아오는 것의 복귀이고, 다시 말해서 유사성을 벗어나는 것의 복귀이다. 영원회귀 안의 반복은 같은 것이지만, 오로지 차이를 통해 언명되고 차이나는 것을 통해 언명되는 한에서만 자기 자신과 같은 사태이다. 여기서 재현의 세계는 전적으로 전도되고, 이 세계 안에서 '동일한'과 "유사한'이 지니던 의미는 완전히 뒤집어진다. (P626)
[영원회귀]
영원회귀는 질적이지도 외연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강도적이고, 게다가 순수하게 강도적이다. 다시 말해서 영원회귀는 차이에 대해, 차이를 통해 언명된다. 힘의 의지는 변신들, 소통하는 강도들, 차이들의 차이를, 들숨과 날숨의 숨결들로 반짝이는 세계이다. 강도적 지향성들의 세계, 시뮬라크르[허상]나 미스터리들의 세계인 것이다. 영원회귀는 이런 세계의 존재이자 이런 세계를 통해 언명되는 유일한 ‘같음’의 사태이며, 이 세계에서 모든 선행의 동일성을 배제한다. 차이는 첫 번째 긍정이고, 영원회귀는 두 번째 긍정, ‘존재의 영원한 긍정’, 또는 첫 번째 긍정을 통해 언명되는 n승의 역량이다. 영원회귀 안의 반복은 차이의 고유한 역량으로 나타난다. 반복되는 것의 전치와 위장이 하는 일은 운반에 해당하는 차이 운동, 그 유일한 운동 안에서 차이나는 것의 발산과 탈중심화를 재생산하는 것밖에 없다. 영원회귀는 차이를 긍정한다. 영원회귀는 비유사성과 계속되는 불일치를 긍정하고 우연한 것, 다양한 것, 생성 등을 긍정한다. (P524-526, P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