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315. 리처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를 읽고

by 노용헌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의 <Contingency, Irony, and Solidarity>라는 제목으로 1989년에 출간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필연적 진리보다 역사적 우연성에, 이념보다 상상력에 초점을 맞출 때 어떻게 새로운 상상력이 '우리'의 범위를 확장하고 새로운 연대를 창출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특성은 기록성이고, 사진은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 낸다. 시간에 관련되는 것이 우연성이 아닐까 싶다. 찰나를 다루는 것도 시간과 연관되어 있고, 프레임이라는 공간에서도 우연적 발생은 존재한다. 프레임을 고정하고, 꽃을 촬영하고 있을 때, 나비나 새가 프레임속으로 들어오는 것도 우연성이다.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모두 우연한 만남이다. 우연적 발생에는 돌발 상황(spot news)과, 예상되는 상황(general news)이 있을 수 있다. 까르띠에 브레송은 프레임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위한 예상되는 상황을 목도(目睹)하고자 했던 것이다. 세계는 수많은 점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많은 점들은 운동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연성과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예측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그런 점에서 아이러니스트들은 의심하고, 질문하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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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성]

니체가 전통적인 진리 관념을 포기할 때, 우리의 존재를 지금의 우리로 만든 원인을 찾는다는 생각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즉 한 개인이 자신의 모든 행동에 담긴 눈먼 각인의 연원을 추적할 수 있다는 관념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거부한 것은 다만 그러한 추적이 하나의 발견 과정이라는 관념일 뿐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그와 같은 자기인식의 성취는 항시 저 바깥에(혹은 이 안에) 있는 어떤 진리에 대한 앎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인식을 자아창조라고 보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앎에 이르는 과정, 자신의 우연성과 대면하는 과정, 자신의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은 새로운 언어를 창안하는 과정, 즉 무언가 참신한 메타포를 생각해내는 과정과 동일시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개별성에 대한 어떠한 문자적(literal) 서술도, 바꿔 말해서 그러한 목적을 위해 전승된 언어놀이를 어떻게 사용한다 해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에는 누구든 그 특유성의 연원을 추적하지 못할 것이며, 결국에는 그것을 특유성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이미 식별된 어떤 것의 한 유형이나 복사물이나 복제품의 반복으로 간주하고 말 것이다. (P79-80)

우리는 각 개인의 삶이 언제나 미완성이지만 때때로 영웅적이며 다시 짜여가는 그러한 그물망이라는 생각에 만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복사물이나 복제품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해내려는 대담한 시인의 의식적인 갈망을 단지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무의식적 갈망의 특별한 형태에 불과한 것으로 볼 것이다. 우연이 자신에게 가져다준 눈먼 각인과 타협하려는 갈망, 비록 주변적일지라도 자신의 용어로 그 각인을 재서술함으로써 스스로 자아를 만들려는 그러한 갈망 말이다. (P108)


우리는 계몽주의의 희망처럼 문화 전체가 “합리화”되거나 “과학화”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전체가 “시적인 것”poeticized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자유주의를 재서술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모든 사람들이 “정념”이나 환상을 “이성”으로 대신할 것이라는 희망을, 각 개인들의 특이한 환상들이 성취될 기회가 동등해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P127-128)


도덕성의 요구가 곧 언어의 요구라면, 그리고 언어가 세계나 자아의 참모습을 포착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역사적 우연성이라면, “자신의 도덕적 확신을 위해 굴하지 않고 버틴다”는 것은 스스로를 그러한 우연성과 동일시하는 일이다. (P141)


내가 말하는 자유주의 유토피아의 시민들은 그들이 지닌 도덕적 숙고의 언어, 따라서 그들의 양심의 언어와 그들의 공동체의 언어가 우연하다는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들(liberal ironists)일 것이며, 슘페터가 제시한 문명의 규준에 부합하는 사람들로서, 헌신과 그 헌신이 갖는 우연성의 감각을 결합시키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제 나는 많은 면에서 동의하지만 내 견해와는 서로 정반대로 생각을 달리하는 두 철학자의 견해를 나의 견해와 비교함으로써,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란 인물을 더 첨예한 쟁점으로 끌어들여 이 장을 마감하고자 한다. 그 차이를 거칠게 표현하자면, 미셸 푸코는 자유주의자를 꺼리는 아이러니스트인 반면에, 위르겐 하버마스는 아이러니스트이기를 꺼리는 자유주의자이다. (P143-144)


[아이러니]

모든 사람은 그들의 행위, 그들의 신념, 그들의 인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채용하는 일련의 낱말들(words)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친구들에 대한 칭찬, 적들에 대한 욕설, 장기적인 프로젝트, 가장 심오한 자기의심, 그리고 가장 고결한 희망을 담는 낱말들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때로는 앞을 내다보면서 때로는 뒤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낱말들이다. 나는 그러한 낱말들을 “마지막 어희”(final vocabulary)라고 부르겠다. (P163)


나는 “아이러니스트(ironists)"를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으로 정의할 것이다. (1)그는 자신이 현재 사용하는 마지막 어희에 대해 근본적이고도 지속적인 의심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어휘들에 의해서, 즉 자신이 마주친 사람들이나 책들을 통해 마지막이라고 간주된 그런 어휘들에 의해서 각인되어왔기 때문이다. (2)그는 자신의 현재 어휘로 구성된 논변은 이와 같은 의심을 떠맡을 수도 해소할 수도 없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3)자신의 상황에 대해 철학함에 있어서, 그는 자신의 어휘가 다른 어휘들보다 실재에 더 가깝다고, 달리 말해서 자신의 어휘가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힘과 접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을 하고자 하는 아이러니스트는 어휘들 간의 선택이란, 중립적이며 보편적인 메타어휘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현상에서 실재로 가려는 투쟁적인 노력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낡은 것과 결별하고 새로운 것과 놀이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본다. (P164)


[연대]

그에 따르면 연대는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우리'를 확대해가는 문제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그들'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하나'로 보게 하는 이 과정은 낯선 사람들이 어떠한지에 대한 상세한 서술의 문제이자 우리 자신들은 어떠한지에 대한 재서술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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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 연대(human solidarity)"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전통적인 철학적 방식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 우리의 본질적인 인간성이라고 할 수 있을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다른 인간들 속에도 똑같이 현존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연대의 개념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콜로세움의 관중, 험버트, 킨보트, 오브라이언, 아우슈비츠의 간수, 그리고 이웃의 유대인을 끌고 가는 게슈타포를 방관한 벨기에인에 대해서 ”비인간적“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숩관과 일치한다. 이것은 그들이 모두 온전한 인간에게 필수적인 어떤 구성요소를 결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P385-386)


종교적 형태건 세속적 형태건 이런 보편주의적인 태도와는 양립할 수 없다. 즉 당신과 개, 혹은 당신과 아시모프의 로봇 사이에 걸쳐 있는 유사성과 차이의 스펙트럼에 “자연적인” 구분선이 있다는 생각과는 양립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구분선이란 이성적 존재의 끝과 비이성적 존재의 시작, 도덕적 의무의 끝과 박애의 시작을 구획하는 선을 말한다. 나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점을 함의하고 있다. 즉 연대감은 필연적으로 어떤 유사성과 이질성이 우리에게 현저하게 느껴지느냐 하는 문제이고, 무엇이 현저하게 느껴지느냐는 역사적이고 우연적인 마지막 어휘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P390)


요약하자면, 나는 “인간성 자체”와 동일시된 것으로서의 인간적 연대와, 지난 수세기에 걸쳐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차츰 고취되어온 자기의심으로서의 인간적 연대를 구별하고 싶다. 이 의심은 타인의 고통과 모욕에 대한 자신의 감수성에 대한 의심이며, 현재의 사회제도들이 이런 고통과 모욕을 다루기에 적합한 것이냐에 대한 의심이며, 가능한 대안에 관한 호기심이다. “인간성 자체”와 인간적 연대를 동일시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철학자의 고안물이며, 신과 일체가 된다는 관념을 세속화하려는 조야한 시도일 뿐이다. 자기의심으로서의 인간적 연대는 내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이 “당신은 고통받고 있느가?”라는 물음과 “당신은 우리가 믿고 원하는 것을 믿고 원하는가?”라는 물음을 구분해낼 수 있게 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시대를 특징짓는 표지로 보인다. 나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당신이 고통을 받고 있느냐는 물음과 당신과 내가 똑같은 마지막 어휘를 가지고 있느냐는 물음을 구별해낼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물음들을 구별하는 것은 사적인 물음과 공적인 물음을, 인생관에 관한 물음과 고통에 관한 물음을, 아이러니스트의 영역과 자유주의자의 영역을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이것은 한 사람에게 두 가지를 모두 가능하게 해준다. (P402)


인류의 연대는 탐구가 아니라 상상력, 즉 낯선 사람들을 고통받는 동료로 볼 수 있는 상상력에 의해 성취되어야 한다. 연대는 반성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 낯선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굴욕의 특정한 세부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증대시킴으로써 창조된다. (P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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