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이라는 서사[敍事] 공간

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332 최인훈의 광장을 읽고

by 노용헌

광장(廣場)이라는 공간이 내게 있어서 사진의 주제가 되었다. 최인훈의 소설에서의 광장은 이데올로기로서의 광장이다. 내가 광화문광장에서도 촛불집회와 태극기부대의 집회를 보면서 정치적 양극단의 외침을 보았다. 그러나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것 외에도 광장은 많은 모습들을 보여준다. 코로나로 잠시 광장의 모든 활동을 못하게 막았지만, 사실 이동공간으로서의 길, 개인들의 활동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광장은 매일 변화되었다.


숱한 나날을 한 가지 일만 깊숙이 파내려간 사람들이, 그러면 어떤 노다지 줄기를 뚫어놓았는지 길잡이를 삼자는 것이었는데, 삼고 보니 아주 야릇할 얏자였다. 갸륵한 길잡이꾼들은 노다지 줄기나 새나, 그 허구한 나날 앉은 자리에서 뭉개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삶은, 그저 살기 위하여 있다. 이 말이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런 뜻 없고 아리송한 말을 할 때는, 그뒤에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할 진짜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으나, 그게 무언지는 알 수 없는 채 값진 때가 모래시계 속 모래처럼 자꾸만, 아랑곳없이 흘러가는 것이 두렵다.

늘 묵직하게 되새겨지는 일 한 가지가 있긴 있다. 신이 내렸던 것이라 생각해온다. 대학에 갓 들어간 해 여름, 교외로 몇몇이 어울려 소풍을 나간 적이 있다. 한여름 찌는 날씨, 구름 한 점 보이지 않고 바람도 자고 누운, 뿔뿔이 흩어져서 여기저기 나무 그늘로 찾아들다가 어느 낮은 비탈에 올라섰을 때다. 아찔한 느낌에 불시에 온몸이 휩싸이면서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린다. 먼저 머리에 온 것은 그 전에, 언젠가 바로 이 자리에 똑같은 때, 이런 몸짓대로, 지금 겪고 있는 느낌에 사로잡혀서, 멍하니 서 있던 적이 있다는 헛느낌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건 헛느낌인 것이 그 자리는 그때가 처음이다. 그러나 온 누리가 덜그럭 소리를 내면서 움직임을 멈춘다. (최인훈, 광장, P35)


광장은 단지 spot으로 ‘곳’이나 place로서의 ‘장소’ 또는 space로서의 ‘공간’ 또는 plaza로서 ‘장(場)’인가? 광화문광장은 역사적으로보면 조선시대 조성된 육조거리이다. 역사적인 공간으로 그 의미가 있을 듯하다. 역사적인 곳으로 광장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정치의 중심으로 광화문 뒤에 있던 청와대는 2022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용산으로 이전(移轉)되어, 광화문은 사실상 정치의 중심은 아니다. 현재 남아있는 정부종합청사와, 미대사관마저 이전한다면 광화문은 사실상 관광 핫 플레이스일 뿐이다. 광화문 인근 옥상도 대통령 경비초소가 아니라 개방되어 루프탑으로 변모하고 있다.


“정치? 오늘날 한국의 정치란 미군 부대 식당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받아서, 그 중에서 깡통을 골라내어 양철을 만들구, 목재를 가려내서 소위 문호주택 마루를 깔구, 나머지 찌꺼기를 가지고 목축을 하자는 거나 뭐가 달라요? 그런 걸 가지고 산뜻한 지붕, 슈트라우스의 왈츠에 맞추어 구두 끝을 비비는 마루며, 덴마크가 무색한 목장을 가지자는 말인가요? 저 브로커의 무리들, 정치 시장에서 밀수입과 암거래에 갱들과 결탁한 어두운 보스들, 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은 살 수 없어요. 그는 광장과 이어져 있어요. 정치는 인간의 광장 가운데서두 제일 거친 곳이 아닌가요? 외국 같은 덴 기독교가 뭐니뭐니 해도 정치의 밑바닥을 흐르는 맑은 물 같은 몫을 하잖아요? 정치의 오물과 찌꺼기가 아무리 쏟아져도 다 삼키고 다 실어가버리거든요. 도시로 치면 서양의 정치 사회는 하수도 시설이 잘 돼 있단 말이에요. 사람이 똥오줌을 만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정치에도 똥과 오줌은 할 수 없지요. 거기까지는 좋아요, 하지만 하수도와 청소차를 마련해야 하지 않아요? 한국 정치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였어요.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꺾어다 저희 집 꽃병에 꽂구, 분수 꼭지를 뽑아다 저희 집 변소에 차려놓구, 페이브먼트를 파 날라다가는 저희 집 부엌 바닥을 깔구. 한국의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착한 길가던 사람이 그걸 말릴라치면 멀리서 망을 보던 갱이 광장에서 빠지는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오면서 한칼에 그를 해치우는 거예요. 그러면 그는 도둑놈한테서 몫을 타는 것이지요. 그는 그 몫으로 정조를 사고, 돈이 떨어지면 또다시 칼을 품고 광장으로 나옵니다.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으니깐요. 그렇게 해서 빼앗기고 피 흘린 스산한 광장에 검은 해가 떴다가는 핏빛으로 물들어 빌딩 너머로 떨어져갑니다. 추악한 밤의 광장, 탐욕과 배신과 살인의 광장. 이게 한국 정치의 광장이 아닙니까? 선량한 시민은 오히려 문에 자물쇠를 잠그고 창을 닫고 있어요.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서 시장으로 가는 때만 할 수 없이 그는 자기 방문을 엽니다. 한 줌 쌀과 한 포기 시래기를 사기 위해서, 시장, 그건 경제의 광장입니다. 경제의 광장에는 도둑 물건이 넘치고 있습니다. 모조리 도둑질한 물건, 안 놓겠다고 앙탈하는 말라빠진 손목을 도끼로 쳐 떼어버리고, 빼앗아온 감자 한 자루가 거기 있습니다. 피 묻은 배추가 거기 있습니다. 정액으로 더럽혀지고 찢긴, 강간당한 여자의 몸뚱이에서 벗겨온 드레스가 거기 걸려 있습니다. 한 푼 두 푼 모아서 가계가 늘어가는 그런 얘기는 벌써 통하지 않아요. 바늘 끝만한 양심을 지키면서 탐욕과 조절을 꾀하자는 자본주의의 교활한 윤리조차도 없습니다. 파는 사람이 사는 사람을 을러댑니다. 한국 경제의 광장에는 사기의 안개 속에 협박의 꽃불이 터지고 허영의 애드벌룬이 떠돕니다. 문화의 광장 말입니까? 헛소리의 꽃이 만발합니다.....” (최인훈, 광장, P55-56)


“.... 비평가들은, 아니 자네가 정말 카프카와 똑같은 겪음을 했단 말인가? 거짓말 말아, 저놈은 가짭니다. 이런 식으로 국산 카프카를 엉망진창이 되게끔 두들겨팹니다. 비평가란, 자기만은 박래품이라는 망상에 걸린 불쌍한 미치광이의 별명이지요. 이런 광장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진 느낌이란 불신뿐입니다. 그들이 가장 아끼는 건 자기의 방, 밀실뿐입니다.

그는 밀실에만은 한 떨기 백합을 마련하기를 원합니다. 그의 마지막 숨을 구멍이기 때문이지요. 저희들에겐 좋은 아버지였어요. 국고금을 덜컥한 정치인을 아버지로 가진 인텔리 따님의 말이 풍기는 수수께끼는 여기 있는 겁니다. 오, 좋은 아버지, 인민의 나쁜 심부름꾼. 개인만 있고 국민은 없습니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습니다. 각기의 밀실은 신분에 맞춰서 그런대로 푸짐합니다. 개미처럼 물어다 가꾸니깐요.

좋은 아버지, 불란서로 유학 보내준 좋은 아버지, 깨끗한 교사를 목자르는 나쁜 장학관, 그게 같은 인물이라는 이런 역설. 아무도 광장에서 머물지 않아요. 필요한 약탈과 사기만 끝나면 광장은 텅 빕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 있습니다.” (최인훈, 광장, P57)


광장은 수많은 군중들이 모이고, 흘러가는 곳이다. 군중이 지나간 자리에는 개인의 고독만이 남는다.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 <미국인>에서처럼, 그리고 게리 위노그랜드의 1964년 뉴욕 센트럴 파크 동물원에 놀러온 부부의 사진처럼 개인화된 개인의 균열과 불안을 엿볼 수 있다. 프랭크의 사진의 헛한 주크박스의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나, 자신의 아이가 아닌 원숭이를 안고 있는 부부의 모습처럼 애완견을 유모차에 끌고 다니는 현 시점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자기라는 낱말 속에는 밥이며, 신발, 양말, 옷, 이불, 잠자리, 납부금, 담배, 우산...... 그런 물건이 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물건에서 그것들 모두를 빼버리고 남는 게 자기였다. 모든 것을 드러낸 다음까지, 덩그렇게 남는 의심할 수 없는 마지막 것. 관념 철학자의 달걀 이명준에게 뜻있고, 실속있는 자기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가 그의 ‘나’의 내용일 수 없었다. 어머니가 그의 나의 한식구일 수는 없었다. 나의 방에는 명준 혼자만 있다. 나는 광장이 아니다. 그건 방이었다. 수인의 독방처럼, 복수가 들어가지 못하는 단 한 사람을 위한 방. 어머니가 살아 있대도 그녀와 한방에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며, 그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광장은 지금 와서는 사라졌다. 어머니는 죽었으므로,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더불어 쓰는 광장이 아직은 없기 때문에, 아버지와 만날 수 있는 광장으로 가는 길은 막혀 있다. 아버지가 모습을 나타내는 광장은 다른 동네에 자리잡은 광장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기관총이 걸려 있다. 애당초 그리로 갈 염을 내지 말아야 했고, 가고 싶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광장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는 어떻게 맞이했으면 좋을지 어리둥절한 어떤 풍문과 같다. (최인훈, 광장, P63)


개인적인 ‘욕망’이 터부로 되어 있는 고장, 북조선 사회에 무겁게 덮인 공기는 바로 이 터부의 구름이 시키는 노릇이었다. 인민이 주인이라고 멍에를 씌우고, 주인이 제 일하는 데 몸을 아끼느냐고 채찍질하면, 팔자가 기박하다 못해 주인까지 돼버린 소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걸음을 떼어놓는다. ‘일등을 해도 상품은 없다’는 데야 누가 뛰려고 할까? 당이 뛰라고 하니까 뛰긴 해도 그저 그만하게 뛰는 체하는 것뿐이었다. 사람이 살다가 으뜸 그럴듯하게 그려낸 꿈이, 어쩌다 이런 도깨비놀음이 됐는지 아직도, 아무도 갈피를 잡지 못해서, 행여 내일 아침 어떤 이 멍에가 도깨비 방망이로 둔갑할까 기다리면서, 광장에는 꼭두각시뿐 사람은 없었다. 사람인 줄 알고 말을 건네려고 가까이 가면, 깎아놓은 장승이었다. (최인훈, 광장,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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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만년필을 손에 낀 채, 두 팔을 벌려서 책상 위에 둥글게 원을 만들어, 손끝을 맞잡아봤다. 두 팔이 만든 둥근 공간, 사람 하나가 들어가면 메워질 그 공간이, 마침내 그가 이른 마지막 광장인 듯했다. 진리의 뜰은 이렇게 좁은 것인가? (최인훈, 광장, P124)


수많은 거리사진가들의 주제는 공간과 사람들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사람들 자체만으로도 각기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삶의 모습은 공간에서 나타난다. 사람들은 만나기 위해서 공간이 필요하고,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공간은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며, 그 사람의 삶은 공간에서 표출된다. 공간과 삶은 뗄 수 없다. 의식주가 인간의 기본 요소라면, 주(住)에 해당하는 것이 공간이다. 사람들의 삶은 일종의 이야기이고, 서사(敍事)를 담고 있다. 서사적인 풍경. 그것이 거리 사진가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남하고 돌아선, 아무리 초라해도 좋으니까 저 혼자만이 쓰는, 그런 광장 없이는 숨을 돌리지 못하는 버릇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약한 자가 숨는 데였다. 낙동강 싸움터에서 찾아낸 굴도 그렇다. 그는 거기에 아무도 데리고 가지 않았다. 데리고 가면 그 동굴이 주는 거룩한 호젓함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은혜가 나타났을 때, 그녀도 굴을 쓰게 해주었다. 한 마리 가장 가까운 암컷에게만은 숨는 굴을 가리켜주었다. 사람이란 그런 것. 아니 나란 그런 놈. 그 스산한 마당에서, 일 미터 평방의 자리에 잠시 단 혼자서만 앉아본다는 건 무엇이었을까. 애당초 여자를 끌어들일 셈이 아니었던 바에야, 자기 혼자의 때와 자리를 몰래 만들어놓자는 생각 말고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아니면 어떤 영감으로 은혜가 오리라 미리 알고, 그녀와 둘이서 뒹굴 굴을 만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웃기지 말자, 누군가를 웃기지 말자. 남이 들으면 창피하다. 우리 목숨을 주무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장삼이사, 그놈이 그놈이다. 자기만 별난 줄 알면 못난이 사촌이다. 광장에서 졌을 때 사람은 동굴로 물러가는 것, 그러나 과연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이 세상에 있을까. 사람은 한 번은 진다. 다만 얼마나 천하게 지느냐, 얼마나 갸륵하게 지느냐가 갈림길이다. 갸륵하게 져? 아무튼 잘난 멋을 가진 사람들 몫으로 그런 짜리도 셈에 넣는다 치더라도 누구든 지는 것만은 떼어놨다. 나는 영웅이 싫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 좋다. 내 이름도 물리고 싶다. 수억 마리 사람 중의 이름없는 한 마리면 된다. 다만, 나에게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을 달라. 그리고, 이 한 뼘의 광장에 들어설 땐,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만한 알은채를 하고, 허락을 받고 나서 움직이도록 하라. 내 허락도 없이 그 한 마리의 공서자를 끌어가지 말라는 것이었지. 그런데 그 일이 그토록 어려웠구나. (최인훈, 광장,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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