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349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은 1946년 한 미술잡지의 요청으로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이라는 짧은 글을 썼다. 바쟁의 이 글에서는 세 가지 신화(유사성에 대한 집착, 승화된 시간(mummy complex), 미적 표현의 계시(啓示, revelation))는 재현, 욕망, 존재의 의미를 되짚고 있다. 바쟁의 글을 통해서 사진의 관한 미학적 관점을 세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의 글은 기존에 우리가 도움을 받았던 발터 벤야민이나 롤랑 바르트의 미학을 더욱 정리된 느낌이다. 우리의 모든 관점이나 사상이 흑백 논리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백과 흑, 밝음과 어둠,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성, 영적인 것과 속세적인 것 등 우리는 있음과 없음을 극명하게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마치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 중간 지대는과연 없는 것일까. 철학은 주기론과 주리론으로 나뉘듯, 관념론과 유물론의 사고방식으로 나누어지고, 예술은 사실주의(Realism)와 낭만주의(Romanticism)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사진은 과연 리얼리즘의 기반에서 만들어져 있음에도, 그 해석과 표현은 여전히 낭만적인 사고방식의 확장에 있다. 사진이미지의 존재론은 사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첫 번째 출발일 것이다. 그중 첫 번째 존재론(Ontology)은 사진가의 존재, 사진이 있음과 없음(윤구병 선생님의 책 있음과 없음)을 고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인식론(Epistemology)은 원근법에 의한 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치론(Axiology)은 사진의 효용가치, 사진의 윤리적인 면, 사진의 쓸모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존재론적 가정은 —결국 공간의 기하학적 확장과 그것을 채우는 물체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인 지각을 통해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인식론적 가정(원근법적인 체계)을 수반한다.
-바쟁의 사진이미지의 존재론-
"존재론"의 핵심은 또한 얽힘을 푸는 수사(修辭)학이다. 한편으로, 바쟁은 불만스럽게 복잡한 역사의 결합을 함께 엮어내는 것 같다. 반면에, 그는 회화와 사진/영화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 대한 그것들의 얽힌 것을 푸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회화의 중층결정의 사실과 관련하여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는 것처럼, 바쟁이 특정한 수사학적 제스처를 사용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 현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현상들 사이에서 객관적인 비판이 회화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별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바쟁은 이러한 중층결정의 문제와 세 단락을 위해 절대 필요한 얽힌 것을 푸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예술에서 리얼리즘에 대한 논쟁은 미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사이의 혼동에서, 이러한 불화(不和)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효과적으로 다시 언급한다. 이 점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바쟁은 둘 다 원인론(aetiology)의 복잡성을 주장하면서 우리를 설득하면서 그것의 설명을 단언한다.
-바쟁의 사진이미지의 존재론-
바쟁은 자신의 "존재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존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끝이 난다. 누군가의 "존재"는 그가 우리의 동시대 사람임을 인식하고 그가 우리 감각의 자연스러운 접근 영역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바쟁의 사진이미지의 존재론-
1.유사성(The Obsession with Resemblance)
‘유사하다, 닮았다, 실물과 똑같다’라는 것은 실물을 거의 복제해놓은 것 같은 유사성이다. 화가는 실물과 거의 똑같이 그리려는 욕망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를 보면 알 수 있다. 화가들의 손기술이 없더라도 실물과 닮게 그리려는 욕망은 카메라 루시다를 통해서 유사성을 발견한다. 사과라는 대상(Object) 그자체가 존재하고, 그 대상을 그림이나 사진으로 복제 또는 표현되고, 그것은 과연 제3의 무엇인가. 완벽한 시각적 닮음, 카메라는 거울에 기록된 것은 유사성을 제공한다.
기계적인 객관성은 재현의 진실성(veracity)을 보장하고 데카르트적 합리성의 기초적인 의심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욕망과 그 대상(object) 사이에서 일종의 균형-상태를 이룬다. 더 완벽한 유사성을 향한 기술의 발전과 이 발전과 관련하여 욕망의 영속화는 모두 단락되거나 중립화되었다.
-바쟁의 사진이미지의 존재론-
완벽함과 불완전 사이의 간극을 사진/영화가 근절하는 것이 주는 의미는, 바쟁에게 있어서, 유사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암묵적으로, 데카르트 합리주의의 전체 프로젝트가, 시간을 좌절시키기 위한 더 크고 더 기본적인 필요의 승화(sublimation)일 뿐이라는 사실이 아니라면, 더 큰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유사성에 대한 집착>의 만족으로, 우리는 완전한 만족이 가능하고 동시에 성취 가능한 욕망의 개념을 상상하도록 유인되었다.
-바쟁의 사진이미지의 존재론-
바쟁에게, 원근법은 유사성 콤플렉스("원죄(原罪, original sin)")의 기원에 있는 기술(technique)이다. 따라서 원근법과 관련된 재현적 이상(ideal)은 본질적으로 유사성에 대한 집착의 것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사진/영화에 의해서만 성취될 것이다.
-바쟁의 사진이미지의 존재론-
2.시간(The Need to Defeat Time)
시간을 고정한다는 것은 사진의 가장 중요한 속성의 하나일 것이다. 롤랑바르트는 앵커(anchor)라는 개념으로, 사진을 얼린다(freeze)는 개념, 또는 사진을 미라화하는 바쟁의 생각(mummy complex), 이것들은 시간을 붙잡아두려는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을 찍을 때 하나,둘,셋을 외치며 사진을 찍는 행위도 어쩌면 시간을 고정시키는 것, 순간을 포착한다는 의미에서 시간이다.
바쟁이 시간을 좌절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한 비-억압(un-repression)을 논하는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의 핵심에 있는 구절은 영화 이론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논쟁적인 것 중 하나이다:
사진 이미지는 그 자체로, 그것을 지배하는 시간과 공간의 조건으로부터 해방된 대상이다... 그것은 그것이 만들어지는 바로 그 과정에 의해, 그것이 재현되는 모델(model)의 존재를 공유한다; 그것은 모델이다...
-바쟁의 사진이미지의 존재론-
일시성(temporality)에 대한 바쟁의 개념작용은 표면적으로는 "지금(now)"이라는 현재의 형이상학적 개념과 일치한다—즉, 현재와 더 이상-없는-현재(no-longer-now)와 아직-없는-현재(not-yet-now) 사이의 가정된 차별화, 즉 상대적인 과거와 미래와 그에 상응하는 부재에 대한 개념을 포함하는 개념작용이다. 그러므로, 이 견해에서, "시간은 이름이 거의 없는, 각각이, 이미 '전에(ago)' 속으로 사라지고 이미 '곧(ago)'에 의해 뒤쫓고 있는.... 지금(now)들의 연속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시각측정(chronometry)과 시계의 측정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시간이고, 일련의 현재(present)로서 시간의 일상적인 경험이다.
-바쟁의 사진이미지의 존재론-
시간을 좌절시켜야 할 필요성과 관련하여 사진의 힘의 역설은 시간에 대한 인식이 변화(change)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는 데 있다. 시간을 좌절시키는 데 있어 사진의 힘이 보는 사람(beholder)의 변화에 대한 인식에 달려 있는 한, 변화 그 자체는 항상 어떻게든 사진에 기록되어야 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사진이 면역(immunity)을 제공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 자신의 쇠퇴"의 바로 그 과정을 지속함으로써 완성되었다. 그 대상(object)은 시간의 강(river)에서 제거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다른 곳에 놓이게 될 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더 느리게 움직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은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부패(corruption)를 지연시킬 뿐이다.
-바쟁의 사진이미지의 존재론-
3.계시(Aesthetic Revelation)
리얼리즘의 속성을 가진 사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적표현은 정신적인 것을 담으려고 한다. 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의 글을 통해서, 칸딘스키는 예술의 내용과 형식, 정신과 물질적 표현으로 구분하면서 정신을 구현하려는 예술가의 관점을 설명하고 있다. 이때 예술로서 드러내는 것은 결국 계시(啓示)인 셈이다.
바쟁은 사진/영화의 미학적 계시(啓示)의 범위가 두 가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계시(啓示)는 외부 세계의 존재뿐만 아니라, 사진가 자신의 특정한 종류의 자기-존재(self-presence)를 부여한다.
-바쟁의 사진이미지의 존재론-
"사진의 진정한 의미는, 계시(revelation)에 있다"라고 체론넷(Cheronnet)은 썼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사진]은 우리의 시선을 낯선 시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광학 현상이다 [...] 여기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을 시각화한 것이고, 기계적인 것은 이해되지만 우리에게 완전히 낯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선의 효과와 우리의 개별적인 시각 사이의 가능한 교차점은 기적을 일으킨다. 사진은 우리에게 세상과 그 아름다움을 덮어주고, 아이나 원시인의 눈을, 어떤 경우에도 알 수 없는 시력에 의해 새로워지는 생기를 되찾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바쟁의 사진이미지의 존재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