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당신은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다

by 영현담

1. 2월의 인천공항, 그 잔인한 작별의 풍경


인천국제공항 3층 출국장. 매년 2월과 8월, 이곳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감정이 과잉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거대한 유리 통창 너머로 비행기들이 굉음을 내며 뜨고 내리고, 체크인 카운터 앞에는 이민 가방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그 풍경 속에는 언제나 똑같은 주인공들이 있다. 눈시울이 붉어진 어머니, 짐짓 대견하다는 듯 어깨를 두드려주는 아버지, 그리고 그들 앞에서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딸들.


"가서 밥 잘 챙겨 먹고, 아프면 바로 병원 가고."


"걱정하지 마세요. 가서 열심히 배우고 올게요."


"그래, 더 넓은 세상에서 많이 보고, 성공해서 돌아와라."


마치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를 배웅하듯, 혹은 국가대표 선수를 출정시키듯 비장하기까지 하다. 부모님의 등 뒤에는 그동안 꼬박꼬박 모아온 적금 통장의 잔해가, 혹은 퇴직금의 일부가 잘려 나간 흔적이 보이지 않게 짊어지워져 있다.


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저 게이트를 통과해 본 유학 선배로서, 나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전혀 다른 것을 본다.


냉정하게 말해보자. 그들의 눈빛에 서린 것은 학구열(學究熱)인가?


유감스럽게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 중에는 순수한 학구열로 가득 찬 학생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지켜보건대,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카트 위에 싣고 가는 것은 전공 서적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난다는 '해방감'이다.


취업이라는 숨 막히는 레이스, 부모님의 기대 섞인 잔소리, 친구들과의 비교에서 잠시나마 로그아웃할 수 있다는 그 짜릿한 '도피의 안도감'이 그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고 있다. 나는 지금 바로 그들, 목적 없이 떠나는 이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공부하러 간다"고.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정말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인가, 아니면 도망을 가는 것인가?"


2. 10년 유학파가 마주한 '대체재'의 공포


나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겠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이 고등학교 수능 대비학원을 등록할 때 짐을 쌌다. 목적지는 중국이었다.


2000년대 중반, 대한민국에는 '중국 열풍'이 불었다. "13억 인구의 지갑이 열린다", "중국어만 하면 대기업에서 모셔간다"는 말이 뉴스에서, 신문에서, 부모님들의 입에서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달콤한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운 좋게도 아버지 지인분께서 현지에서 홈스테이를 운영하고 계셨기에, 주거 환경만큼은 한국인 가정집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는 철저하게 현지 로컬 학교를 다녔다. 방과 후에는 매일같이 중국 친구들과 어울려 노느라 딱히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렇게 중국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부대끼며 10년을 보낸 덕분에, 나는 중국인조차 "어느 성(省) 사람이나?"고 물어볼 정도로 완벽한 중국어를 체득하게 되었다.


방학마다 한국을 오갔지만,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쥐고 '취업'을 위해 짐을 싸서 완전히 들어올 때는 기분이 사뭇 달랐다. 내 손에는 10년의 중국 생활이 증명하는 학위와 원어민 수준의 언어 능력이 쥐어져 있었으니까.

나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 정도 스펙이면 한국 취업 시장에서 충분히 통할 거라 생각했다.


내 손에는 나름 중국 현지에서 통하는 명문대 졸업장이, 입에는 원어민급 중국어가 장착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희소성 있는 인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한국의 취업 시장은 나를 비웃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레드카펫이 아니라,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조선족(한국계 중국인)'이라는 거대한 경쟁자들이었다.


이건 내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아니 아무도 경고해주지 않았던 '공급 과잉'의 재앙이었다.


기업 입장에서 냉정하게 계산기를 두드려보자. 당신이 인사팀장이라면 누구를 뽑겠는가?


[지원자 A: 한국인 유학생]

스펙: 중국 거주 10년, 대학 졸업.

요구사항: 대졸 신입 초임(높음), 칼퇴근 선호, 복리후생 중요.

특징: 중국어 잘함. 하지만 중국의 '꽌시(관계)' 문화나 밑바닥 정서는 책으로 배운 수준일 수 있음.


[지원자 B: 조선족(동포)]

스펙: 중국 거주 평생, 한국 체류 비자 완벽.

요구사항: 한국인 유학생보다 합리적인(낮은) 임금 수용 가능.

특징: 중국어가 모국어임. 현지 사정에 정통함. 게다가 한국어 패치까지 완벽해서 소통에 전혀 문제없음.


게임이 되지 않는다.


단순 통역, 무역 실무, 현지 관리... 기업이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중국 관련 직무에서 조선족 인력은 압도적인 '가성비'를 자랑했다. 그들은 나보다 더 저렴했고, 더 절실했고, 더 현지에 밝았다.


내가 10년 동안 쏟아부은 수억 원의 유학 자금과 청춘은, 시장 경제의 논리 앞에서 힘없이 무너졌다. 중국어는 더 이상 나만의 무기가 아니었다. 시장에는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아니 나보다 더 효율적인 인력이 차고 넘쳤다.


이것이 '묻지마 유학'이 받아든 첫 번째 성적표였다. 우리는 '희소성'을 찾아 떠났지만, 돌아온 곳에는 이미 우리보다 더 강력한 '대체재'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3. '이중고(Double Bind)'에 갇힌 유학생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국 유학생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중국어 하나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에, 그들은 다시 영어 단어장을 펴든다. 중국에서 10년을 살았는데, 한국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토익 학원을 등록하고 오픽(OPIc) 점수를 따야 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이게 바로 유학생들이 겪는 '이중고(Double Bind)'다.


국내파 학생들은 영어 하나만 파면되지만, 유학생들은 '전공 언어(중국어 등)'와 '필수 언어(영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 하나라도 놓치면? "유학까지 갔다 와서 이것도 못 해?"라는 조롱이 쏟아진다.


결국 중국 유학생들은 중국어도 원어민처럼 해야 하고, 영어도 국내 명문대생만큼 해야 서류 전형이라도 통과할 수 있다. 10년 유학의 결과가 '어드밴티지'가 아니라, 오히려 더 무거운 '짐'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 비극은 비단 중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 유학생들도, 동남아 유학생들도 똑같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현지 언어는 현지인이나 교포들이 꽉 잡고 있고, 영어는 기본 소양으로 요구받는다.


당신이 지금 가려는 그 나라, 과연 당신만의 '블루 오션'일까? 아니면 이미 피 튀기는 '레드 오션'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것일까?


4. 미국과 유럽: 'Core(기술)'가 없으면 '관광객'이다


"에이, 중국은 그렇다 치고. 저는 미국(또는 유럽)으로 가는데요? 거긴 선진국이고, 영어권이잖아요."


이렇게 반문하는 학생들이 있다. 맞다. 미국과 유럽은 상황이 좀 다르다. 하지만 더 냉혹하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이곳은 '대체재'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Essence)'의 문제로 승부해야 한다.


많은 학생이 "미국 가서 구글, 애플 취업하고 싶어요"라며 꿈에 부푼다.


하지만 그들은 가장 거대하고 현실적인 장벽, 바로 '취업 비자(Visa)'를 간과한다.


트럼프 행정부 이후, 그리고 자국 우선주의가 강해진 유럽의 상황을 보자. 기업이 외국인에게 비자를 스폰서(Sponsorship) 해주면서까지 채용하려면, 미 이민국이나 노동청에 "이 사람은 미국인으로 도저히 대체가 안 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여기서 냉정한 갈림길이 나온다.


[승자: Core(기술)를 가진 자]


이공계 국비 장학생, 컴공과(CS) 천재들, 반도체 박사, 바이오 연구원, 특수 용접 기술자...


이들은 살아남는다. 아니, 모셔간다.


그들에게는 '코어(Core)'가 있다. 자바(Java) 코드, 회로 설계도, 기계 공학 지식은 만국 공용어다. 그들에게 영어는 자신의 기술을 설명할 '도구(Tool)'일 뿐이다. 영어가 좀 서툴러도, 억양이 촌스러워도 상관없다. 실력이 언어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패자: Tool(도구)만 배우러 간 자]


반면, 특별한 기술 없이 문과 계열(경영, 인문, 어문 등)로 유학을 갔거나, 단순히 '영어 배우러' 어학연수를 떠난 이들은 어떠한가?


미국 기업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자.


"영어를 모국어처럼 하고, 미국 문화(미식축구, 펍 문화 등)에 능통하며, 비자 문제도 없는 자국민 대졸자"가 널리고 널렸다.


그런데 굳이 영어가 어설프고, 비자 수속비용 수천 달러가 들고, 문화적 배경도 다른 한국인 유학생을 왜 뽑아야 하는가?


"한국어를 잘하니까요?"


착각하지 마라. 그 회사가 한국 지사로 당신을 파견 보낼 게 아니라면, 미국 본사에서 한국어 능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스킬이다. 사무실의 모든 업무는 영어로 돌아간다.


결국 '기술(Core)' 없이 '도구(Tool)'인 영어만 붙들고 떠난 유학생들은 현지 취업 시장에서 철저하게 외면받는다.


미국에서도 오라고 하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니 "미국 물 먹더니 눈만 높아졌다"는 소리를 듣거나, 국내파들의 독한 스펙 경쟁(자격증, 인턴십, 공모전 등)을 이길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선택한다. '도피'를.


귀국을 차일피일 미루고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무의미한 수료증 과정을 등록하며 학생 비자를 연장한다.


그렇게 그들은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에 기약 없이 기댄 채, 유학생도 아니고 현지인도 아닌 '이방인'의 삶을 연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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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항은 '비상구'가 아니다


다시 인천공항으로 돌아와 보자.


출국 심사대 앞에 선 당신의 가방을 열어보라.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혹시 '막연한 희망'이나 '근거 없는 낙관'만 가득 차 있지 않은가?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도 한국보다는 낫겠지", "남들도 다 가는데 뭐."


만약 당신의 가방 속에 '남들이 범접할 수 없는 나만의 확실한 기술(Core)'이나, '죽기 살기로 덤벼들 구체적인 로드맵'이 없다면, 당장 그 짐을 풀어라.


기억해야 한다.


확실한 '전문 기술'을 가진 사람에게 외국어는 날개가 되지만, 외국어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외국어는 그저 흔해 빠진 악세사리일 뿐이다.


당신의 유학 가방 속에 '기술'이 없다면, 당신은 유학생이 아니라 그저 '비싼 돈 내고 장기 체류하는 관광객'에 불과하다.


공항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비상구가 아니다.


도피처로 선택한 유학길의 끝에는, 그 어떤 낙원도 기다리고 있지 않다.


다만, 텅 빈 통장과 나이 먹은 '고학력 백수'라는 꼬리표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자, 이제라도 솔직해지자.


당신은 공부하러 가는 것인가, 아니면 도망가는 것인가?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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