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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품하는 고양이 Jun 26. 2020

좋은 소리는 무엇인가? (1)

나의 오디오 이야기 ep.01

음향 기기는 최신 기술이 고도로 집적된 전자제품이다. 하지만 실제 업계의 성향은 컴퓨터, 스마트폰, 모니터 등 다른 IT업종들과 꽤나 다르다. 남들보다 뛰어난 성능으로 소비자를 끌어모으는 대부분의 회사들과는 달리, 오디오 판매는 소비자의 감성과 취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명품을 사도 저렇게는 안 하겠다 싶을 정도로, 오직 자신의 귀를 믿고 수천만 원에서 억대의 기기들을 사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원인은 소리의 좋고 나쁨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만한 방법이 부족하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기 위해 아래에 있는 맥북 프로 시리즈의 제품 사양표를 보자.

애플에서 판매하는 맥북 프로 13 인치의 제품 사양. 내부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품들과 특징이 대부분 쓰여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뭔가가 많이 적혀 있다. 컴퓨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 내용만을 가지고도 이 노트북이 대략 어느 정도의 성능을 내주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시장에 나와 있는 비슷한 성능의 다른 제품들과 비교해서 가격이 적절한지 판단하기도 어렵지 않다. 조금 더 전문적인 정보를 원하는 경우에도 다른 웹사이트에서 공개한 CPU, GPU 벤치마크 결과를 참고하면 쿨링이 잘 되는지, 내 프로그램이 얼마나 빨리 돌아갈지와 같은 세세한 정보도 모두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전자 기기는 이렇다. 누구나 자기가 어느 정도의 성능을 가진 물건을 구입하는지 사전에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시장이 굉장히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You get what you pay for'이라는 말이 아마 가장 잘 들어맞는 업계일 것이다.




이제 아래의 제품 설명을 보자.


공식 홈페이지의 제품 설명을 그대로 가져왔다. 저기에 있는 내용 이외에 Technical Data란에 숫자가 조금 적혀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음역대를 재생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하는지와 같은 정보들 뿐이라 저 표를 바탕으로 헤드폰의 소리가 어떨지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운데의 Features 항목에도 '우리 헤드폰은 소리가 좋아요' 이외에 의미 있는 정보를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아무 헤드폰 페이지나 긁어온 것도 아니다. 출시된 지 10년이 넘어서까지 굳건하게 래퍼런스(다른 기기와의 비교에서 기준점이 되는 장비)의 자리를 유지하는 매우 대단한 헤드폰임에도 직접 들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다.


오디오 잡지나 블로그를 참고해도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들리는 소리를 글로 풀어쓴다는 것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어서 '고음의 착색이 매력 있다' 혹은 '극저음의 해상력이 뛰어나다' 등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나마도 여기저기서 다양한 장비를 접하며 경험을 쌓은 후에야 'X와 비교해서 Y의 이러저러한 부분은 어떻다'와 같은 비교 분석을 통해서 대강이나마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Golden ears 등의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귀 모양을 한 스테레오 마이크로 이어폰/헤드폰의 주파수 응답을 측정하고, 아래와 같은 그래프를 그려서 정량적으로 분석해 보려는 시도가 한때 트렌드가 되기도 했다.


Hi-fi 오디오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모든 음역대가 비교적 균일하게 들리는' 플랫한 소리가 정석적이고 좋은 소리라는 데에 동의한다. 음악가가 의도한 바를 그대로 듣는 것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청 주파수 영역(20 Hz ~ 20 kHz)에 걸쳐서 균일한 세기의 소리를 내는 것을 기준점으로 삼는다. 아래 그래프의 검은 점선이 그 타겟이다.


AKG 사의 K3003 측정치. (from Golden ears)


간추려서 설명을 하자면, 가로축은 음의 높낮이(주파수)이고 세로축은 음의 세기이다. 따라서 Golden ears 타겟과 비교했을 때 200 Hz 정도의 저음역은 조금 강하고 4 kHz 부근의 고음역대는 상당히 절제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이후의 초고음역대는 다시 부스팅이 되어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푸근하고 부드럽지만 드럼의 하이햇과 같은 디테일은 잘 살려주는 소리라고 대략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방법도 한계가 명확하다. 다양한 기기를 실제로 들어보면서 측정치와 비교하면, 측정 결과가 해당 헤드폰의 특성을 상당 부분 놓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음이 얼마나 빨리 조용해지는지와 관련된 잔향감, 음 분리도, 해상력 등은 측정치만 봐서는 감을 잡기 어렵다.




결국은 다시 원점이다. 이쯤이면 슬슬 다들 눈치를 챘겠지만, 개인의 취향에 강하게 의존하는 업계의 특성상 시장이 별로 효율적이지 못하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비싸고 안 좋은 물건은 많고, 싸고 좋은 제품은 드물다.


프롤로그에서 '기변증'(새로운 기기를 사고자 하는 욕망이 불타오르는 증상)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했었는데 원인이 여기에 있다. 내가 산 제품의 성능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줄 징표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사람 귀라는 것이 그다지 정확하지도 않아서, 사기 전에는 좋기만 했던 헤드폰이 일주일이 지나면 전혀 다르게 들릴 수도 있다. 남의 떡이 커 보이기 시작하면 내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갈수록 불어나는 건 한순간이다.


오디오는 성능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원하는 완벽한 소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장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다른 장비와의 비교여서는 곤란하다. 좋아하는 앨범을 들으면서 눈을 감고 생각해보자. 음악이 전해주는 감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면 충분하다.


이번 글에서는 좋은 소리는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만족스러운 취미 생활을 위해서는 분석적인 자세를 다소 버리고 음악을 즐기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이어지는 다음 글들에서는 지금까지 뭉뚱그려서 설명한 이어폰/헤드폰과 스피커의 차이점, 그리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좋은 소리의 기준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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