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딸이 기억하고 있는 엄마의 추석
2024년 9월 3일 저녁, 전화벨이 울렸다. 좀처럼 울리지 않는 녀석인데 요란하게 울어댔다. 집 전화기는 엄마 전용이다. 내가 집에 있는 걸 확인하고 싶으신 걸까, 번호 누르기가 편하신 걸까? 꼭 집 전화로 먼저 연락하신다. 요즘 대부분의 집에는 없다는데 우리집 전화기는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통은 집 근처 하나로 마트를 이용하시지만 원하는 물건이 따로 있을 때는 연락을 하신다. 딸로서 뭔가를 해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엄마의 연락을 받으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퇴근하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천천히 가도 되는데, 시간 괜찮은 거니?"
맞다. 언제 가고 싶으신지,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대강 상황을 파악하고 약속을 해도 괜찮은데, 다른 데에선 느려터진 내가 이상하게 엄마의 일이라면 서두르게 된다. 내일까지 해야 할 일이 쌓여 있는데 일단 제쳐두었다.
양이 제법 되는 고기를 들고 신중하게 살펴보신다. 이왕 큰 마트에 온 김에 필요한 물건도 담으시고, 저렴해 보이는 물건도 차곡차곡 담으신다. 곧 추석이구나. 그러고 보니 평일 저녁인데도 마트에 사람들이 꽤 많다. 서두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기, 주말에 마트에 왔다간 그야말로 지옥을 경험할 수 있으니까. 조금 서둘러서 장보기를 마쳤고 어머니를 모셔다 드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추석에 대한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어린 시절, 차례상에 잔뜩 차려져 있었던 음식들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삼색나물, 제법 두툼한 소고기, 삶은 돼지고기, 동태전, 호박전, 두부전, 그리고 갖가지 과일들. 써 놓고 보면 몇 가지 안 되는데 엄마는 그 음식을 준비하시느라 집에 있는 그릇을 총 동원하셨었다. 차례상 위에는 아빠를 닮았지만 제법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 옆에는 흰색 종이에 알 수 없는 한자가 잔뜩 적혀 있었다. 저게 뭐냐고 물어보면 아빠는 "할머니"라고 대답하셨다. 두 분 모두 내가 만나보지 못한 분들이었다.
추석날 아침 차례가 시작되기 전, 큰집 식구들이 왔다. 큰엄마, 언니, 오빠였다. 준비가 되면 차례가 시작됐다. 나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분들께 절을 했고, 차례상에 차려진 음식을 먹을 생각에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딸 다섯이 있는 집이라 항상 왁자지껄했었는데 그 시간만큼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차례가 끝나면 식사가 시작되었다. 이상하게 우리 가족은 말이 없었고, 아빠와 큰집 식구들의 대화만 몇 마디 오갔다. 식사가 끝나면 언니들은 설거지를 시작했고, 엄마는 큰집 식구들을 위해 남은 음식을 이것저것 싸 주셨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차례상을 준비하시느라 얼마나 애를 쓰고 계신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명절을 쇠고 난 후, 엄마는 한동안 힘들어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의 추석은 내가 고2가 될 때까지 -나에게는 정확히 17년 동안, 엄마에게는 27년 동안 - 이어졌다.
고3 때 맞이한 추석, 차례상 위 사진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만났던, 밤에 눈을 감기 전 인사를 건넸던, 내 주변에 있는 게 너무도 당연했었던 아빠였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차례를 지내는 그 시간, 평소와는 달리 왜 그리 분위기가 고요했는지를. 엄마는 차례 음식을 준비하시는 내내 눈물을 삼키셨다. 언니들도 나도 눈물을 머금고 엄마를 도와 차례 음식을 준비했다. 다들 말없이 추석 아침을 보냈고,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례에 참여하는 인원은 점점 줄어들었다. 언니들이 하나, 둘 결혼하면서 추석 차례는 출가 전 동생들의 의식이 되었다. 그리고 막내 언니마저 결혼한 뒤에는 엄마와 나만 남게 되었다. 식구가 제법 있을 때에는 눈물이라도 감출 수 있었는데! 엄마의 붉은 눈시울을, 나의 울먹임을 좀처럼 감추기는 힘들었다. 언니들은 시댁에서 추석 아침을 보내고 점심때가 되어서야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언니들과 형부들은 다과만 갖춰진 차례상 위의 아버지와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가족이 다 모이는 오후 2시경 차례상은 비로소 정리됐다. 엄마의 달라진 추석은 그렇게 12년 동안 이어졌다.
서른 살, 나 또한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다. 나의 결혼은 곧 엄마가 혼자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명절 차례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의논이 이어졌다. 시댁에 이해를 구하고 딸들이 돌아가면서 차례를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고맙게도 언니들의 시댁에선 딸들만 있는 집안의 사정을 안타까워하고 계셨다. 다행히 언니들의 시댁은 모두 큰집이 아니어서 이해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막 결혼한 나는 당분간은 시댁에서 명절 아침을 보내고 오후에 합류하기로 했다. 대신 추석 전날 엄마를 도와 차례 음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해마다 각자의 집에서 다양한 사정이 생겨나 자로 잰 듯 순번이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아버지의 차례 의식은 계속 유지되었다. 그렇게 또 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결혼 9년 후, 나의 시어머님이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시댁에서 온전히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언니들은 또다시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쓸쓸한 의식을 이어왔지만 추석 음식 준비를 돕던 막내가 온전히 시댁에 가 있어야 하는 상황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추석의 풍경이 여러 번 달라지는 동안 엄마 역시 많이 약해지셨고 힘들어하셨다. 우리 가족은 고민 끝에, 의논 끝에 21년 동안 이어졌던 아버지의 차례 의식을 이제는 마음으로 대신하자 결론지었다.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엄마의 추석은 또 한 번 달라졌다.
엄마의 추석은 그렇게 세 차례의 큰 변화를 겪었다. 결혼해서는 시부모님의 차례를, 배우자를 잃고 나서는 남은 딸들과 남편의 차례를, 딸들을 모두 출가시키고는 매번 다른 딸들과 남편의 차례를 그렇게 48년이란 세월을 이어갔다.
"힘들지 않으셨어요?"
무심한 듯 한 마디 건네면
대답하셨다. 그런 생각으로 엄마는 묵묵히 그 길을 걸어오셨다.
차례가 없는 추석, 엄마는 여전히 그날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신다. 이제는 함께 살아가고 있는 딸들과 그에 딸린 식구들을 위해서. 좀 편하게 사셔도 되는데 핑계 김에 그냥 편하게 나가서 사 먹어도 되는데. 2주 전부터 무슨 음식을 할지 생각하신다. 장을 보시고 손수 요리를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