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초등 교실 이야기
08- 긴장감 넘쳤던 하루였습니다.
2024년 9월 27일 금요일
어제 오후에 커피를 마신 게 화근이었다. 카페인에 민감한 편이어서 보통은 오전에 커피를 마시고 끝내는데, 어제는 정신줄을 놓고야 말았다.
영어 선생님께서 오늘을 위해 힘내라고 보내주신 커피였는데, 디카페인인지 아닌지 확인도 안 하고 6교시 동아리 시간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반쯤 먹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고놈 참 맛깔나다 싶었다. 디카페인이 아닌 건 분명했다. 망했다! 오늘 잠은 다 잤네 싶었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그래도 쉬는 게 낫겠거니 싶어서 계속 누워 있었다.
'7시에 출발해서 학교에 7시 40분쯤 도착하고, 주문한 김밥 찾고, 교실에 가서 어제 미리 준비해 놓은 지퍼백에 김밥 넣고, 젓가락 넣고!'
9세트를 준비해야 한다. 나 포함 세 명의 담임교사, 버스 기사님들, 그리고 구에서 지원해 주신 도우미 선생님 세 분의 점심과 간식거리를.
(지각)대장이가 시간 내에 못 왔을 경우를 대비 플랜 D까지 대비해 놨다.
플랜 B : 어머님과 상의 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낸다.
플랜 C : 행복센터에 가서 선생님과 1:1로 수업을 받는다.
플랜 D : 행복센터 선생님과 연락을 취하며 중간 어디선가 접선한다.
사실 오늘 같은 날은 대장이 아니어도 신경이 곤두서 있고 스트레스가 심하다. 근데 플랜 D까지 짜려니 이미 머릿속은 뒤죽박죽 엉켜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5시가 넘어 있었다. 보통은 5시 30분에 일어나지만 오늘은 김밥을 찾으러 가야 하기 때문에 얼른 준비해야 한다. 침대에서 일어나니 살짝 어지럽다. 늦게 잠들었는데 일찍 일어나기까지 했으니! 한 네 시간 잤으려나? 얼른 물을 한 잔 마셨다.
채소와 과일, 호밀빵을 준비하고 커피를 내렸다. 어제부터 커피에 취해 있지만 또 커피를 마셔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신이 몽롱할 게 뻔하다. 어쩔 수 없다. 오늘만큼은 내 몸을 학대하기로 한다. 보통은 아침을 준비하면서 틈틈이 독서도 하고, 음악도 듣지만 오늘 아침엔 뭐 아무것도 못하겠다. 아침을 차리고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5시 40분이다. 남편이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준비를 시작한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입맛은 하나도 없지만 우걱우걱 입에 쑤셔 넣는다. 이거라도 제대로 먹어야지 비상시에 소리라도 지를 수 있다. 이도 닦고, 옷도 입고, 화장도 하고 , 어질러진 주방을 정리하고,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혔다.
7시, 집을 나섰다. 금요일은 원래 하루종일 차가 막히는 게 국룰인데 오늘은 뻥뻥 뚫려있다. 오, 일진이 괜찮을 것 같다. 학교에 도착하니 7시 35분, 보안관님께 인사를 드린다.
보안관님은 궁금하지 않으실 텐데, 세세히 보고를 해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이 나에게 '화장실 다녀올게요!' 라고 보고하는 것처럼.
김밥집 사장님과 약속한 시각, 정확히 7시 40분에 김밥집에 도착했다. 원래는 9시에 문을 여는데 미리 주문을 하면 원하는 시간에 문을 열고 있겠다고 하셨다. 참 감사했다. 사장님이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허락해 주신 거다. 사장님은 아홉 줄의 치즈 김밥을 나에게 건네주신다.
김밥을 들고 다시 교문으로 향했다. 보안관님께 다시 한번 인사를 드린다.
"보안관님, 현장학습 다녀오겠습니다."
"이따 뒷문으로 나가시는 거죠?"
"네!"
"대장이는 오늘 지각 안 하려나?"
"저도 걱정이에요. 행복 선생님과 상의했어요. 혹 시나 늦게 오면 행복교실로 보내 주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오늘만큼은 일찍 올 거예요, 그럴 거예요."
주연은 없는데 조연들끼리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장이 일로 보안관님께 몇 번을 전화드렸는지 모른다. 어머님은 아이가 학교에 들어갔다고 하셨는데 교실엔 들어오지 않아 난리부르스를 친 일이 있었다. 그 시간 수업이 없었던 선생님들이 발 벗고 나서주셔서 대장이를 찾아냈었다. 다행히 놀이터에 있었다는 에피소드로 일단락됐지만, 그때 나의 마음은 지옥문을 드나들었었다.
일단 교실에 들어가서 할 일을 미리 마쳐 놓아야 한다. 그래야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처할 수가 있다. 새벽 네 시경 머릿속에 그려 본 대로 김밥을 한 줄씩 어제 미리 준비해 둔 간식 지퍼백에 넣었다. 오늘 같은 날은 달콤이가 있어야 잘 버틸 수 있다.
세 세트씩 두 개의 쇼핑백에 담았다. 동학년 선생님들께 전달하면 끝이다. 한 세트는 내 배낭 속에 넣었다.
컴퓨터를 켜고, 문자 발신 사이트를 미리 접속해 놓았다. 혹시나 학부모님과 전화가 안 될 경우 문자를 보내기 위함이다. 아이들이 오자마자 볼 수 있도록 몇 가지 안내사항을 PPT 화면에 써넣는다.
8시 30분까지 오라고 했는데, 부지런한 친구들이 8시 10분부터 교실로 들어온다. 밝은 얼굴로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TV화면을 손으로 가리켰다. 유심히 화면의 문구를 읽더니 화장실로 향한다.
아이들이 올 때마다 출석 체크를 해 둔다. 하나, 둘 올 때마다 불안한 마음을 아주 조금씩 내려놓는다. 대장이 뿐 아니라 9시 전에 겨우겨우 골인해서 교실로 들어오는 아이들이 꽤 있는지라 모두 다 올 때까지 애간장이 타 들어간다.
8시 25분, 교실 전화벨이 울린다. 아, 대장이 엄마 번호다. 불안하다.
"선생님, 지금 대장이 교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걱정하실까 봐 전화드렸어요!"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아, 정말 다행이다. 함께 갈 수 있다. 플랜 B 플랜 C, 플랜 D 종이는 모두 박박 찢어도 된다.
행복 센터 선생님께 메신저로 문자를 드렸다.
"선생님, 대장이 왔어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다행이에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휴우,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리에 앉아있다. 세 명이 오지 않았지만, 충분히 시간 안에 올 아이들이다. 대장이도 들어왔고, 세 명 중 두 명이 들어왔다. 앗, 한 명... 그 아이도 9시 간당간당 도착하는 아이다.
이런 대장이 신경 쓰느라 그 아이에게 신신당부를 더 하지 못한 게 갑자기 후회가 된다. 30분이 넘었다.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받지 않으신다. 그 아이의 절친에게 전화를 해 보라고 했다. 나는 나대로 어머님께, 절친은 절친대로 그 아이에게 계속 전화를 했다. 통화가 안 된다. 8시 35분이다. 교실에선 40분에 나가야 한다. 어떡하지!
아아아아아... 이제 됐다. 한 고비 넘겼다.
별별이까지 화장실에 다녀오고 나서 분위기를 잡아본다.
며칠 동안 이야기는 했었다. 분명 그때는 수긍했었는데 오늘 아이들의 표정은 사뭇 다르다. ‘이 좋은 날 진짜 이러기야?‘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회장 친구가 갑자기 손을 든다.
'아니, 3학년 아이한테 어쩜 저런 센스가?'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지금 웃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미소 한 번 띠어주고 끝내야지. 굳게 마음먹었다. 오늘만큼은 엄한 사람이 될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내가 한 말이 있는데! 빵 터지면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안 된다. 이래선 안 된다. 재빨리 책상 위에 있는 종이로 얼굴을 가렸다.
"선생님, 선생님 괜찮아요. 안 가리셔도 돼요!"
교실이 웃음바다가 됐다. 분위기 잡기는 개뿔. 망했다!
한 아이가 딱 한 번만 웃어달라고 했다. 아이들이 그 말을 듣고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 선생님이 진짜 웃을까? 약속대로 안 웃을까? 유심히 쳐다보는 그 상황이 너무 웃겼다. 나도 모르게 빵 터졌다.
8시 43분쯤 교실을 나섰고, 교문 밖으로 나가서 버스가 대기 중인 장소까지 안전하게 이동했다. 버스는 예정된 시각에 출발했고 무사히 첫 번째 장소로 이동했다.
코로나 이후 제대로 된 현장체험학습이었다. 재작년엔 학교 근처에 있는 산에 오르는 것으로, 작년엔 노란 버스 이슈로 학교 안에서 체험 활동을 하는 것으로 현장학습이 대체되었었다.
나 역시 매우 설렜지만, 학교를 벗어나면 아이들은 매우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다행히 아이들은 약속을 잘 지켜주었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쌓아갔다.
3학년 사회 교과 "우리 고장"을 주제로 계획된 현장학습이기 때문에 고장의 유적지, 수목원, 공공기관을 방문하며 체험이 이루어졌다. 기온이 30도까지 오르며 제법 더운 날씨였지만, 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짜증 내지 않고 열심히 활동해 주었다.
활동을 모두 마친 후, 예정된 시각에 하차 지점에 도착했고, 아이들은 모두 무사히 하교했다. 나 역시 돌봄 교실 등으로 학교에 돌아와야 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로 복귀했다.
각 반마다 체험 코스가 달랐기 때문에 약간의 시간 차가 있었지만 나머지 두 학급의 선생님들도 별일 없이 학교로 복귀하셨다.
센스 넘치는 학년 부장님께서 주문해 주신 레모네이드! 단숨에 벌컥벌컥 마셨다.
혹시나 해서 캐시워크 어플을 확인해 보니 세상에 이미 만 보가 넘어있었다.
'오늘 꽤 많이 걸었구나!'
‘아이들도 최소 6 천보는 걸었겠구나!’
10월 중순 운동회가 있다. 모인 김에 운동회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주에 아이들과 해야 할 일이 하나하나 쌓인다. 현장학습만큼은 아니지만 운동회날 역시 긴장감이 넘치는 날이다. 그래도 일단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쉬어야지. 각자 교실로 향했고, 컴퓨터를 켰고, 알림장 웹을 열었다.
*월요일 교과목 속닥속닥 주절주절 조잘조잘
*글쓰기 주제 : 현장학습을 다녀와서
*깨끗이 씻고 휴식 충분히 취하기
*건강 및 위생 관리 철저히 하세요.
*덕분에 현장학습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학부모님, 감사합니다!
가방에 싸들고 온 쓰레기를 꺼낸다. 일반 쓰레기, 분리배출 쓰레기를 나눈다. 헹굴 것은 헹구어 버린다. 월요일 학급일지를 확인하고, 문단속을 한다. 컴퓨터를 끈다. 할 일이 많지만 칼퇴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