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해 주는 음식을 발견하다
우리 반에는 장학사가 있다. 등교하자마자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교실 앞 게시판을 살핀다. 주요 관심사는 급식표. 메뉴명이 잘 와닿지 않을 때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묻는다.
"선생님, 조가 뭐예요?"
그날 메뉴는 조밥이었다.
"황금향이 뭐예요?"
최대한 알아듣게 설명한다.
'근데 너 선생님한테 인사는 했니?'
가끔 주간학습안내를 보고 질문하기도 한다.
"오늘 과학실 가네요?"
질문일 뿐일 텐데, 이상하게 이렇게 들린다.
'설마, 공부할 내용이 이런데 교실에서 대충 때우는 건 아니죠?'
"체육 오늘 강당 가죠?"
나는 단 한 번도 강당 가기를 빠뜨린 적이 없다. 왜 질문을 하는 걸까? 그냥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라고 하기엔, 나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거라 생각하기엔 표정과 눈빛이 꽤 날카롭다.
"오늘 자리 바꾸죠?"
아차차, 오늘 자리 바꾸는 날이구나. 장학사 덕분에 중요한 일을 놓치지 않기도 한다. 근데 나도 기억 못 하는 걸 대체 어떻게 기억하는 걸까? 연구 대상이다.
장학사는 오늘도 어김없이 앞문을 열고 당당하게 나에게 걸어 들어온다.
"선생님, 오늘 부대찌개 나와요!"
세상에 오늘만큼은 반가운 소식을 전해준다.
"그래? 우와, 나 감기 걸렸는데 부대찌개 너무 반가운데!"
오래간만에 장학사와 나는 마음이 통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 감기 앓이 중이다. 이럴 땐 얼큰한 음식이 무척 당긴다. 휴우, 오늘 급식 메뉴가 부대찌개라니 다행이다. 살았다. 국물을 다 먹지 않는 편이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후루룩 쫩쫩 다 먹었다. 휴우~ 얼큰한 국물이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사실 초등학교 급식이라 그리 얼큰하지는 않았지만. 이럴 땐 김치찌개가 훨씬 좋은데. 분식류를 참 좋아한다. 떡볶이, 쫄면, 김밥, 국수... 매콤 짭짤한 탄수화물을 사랑한다. 하지만 막상 몸이 안 좋을 때 찾게 되는 음식은 김치찌개다. 언제부터 나는 몸이 좋지 않을 때 김치찌개를 찾았던 걸까?
2023년, 무급 휴직의 해, 그것도 3월에 나는 체코로 향했다. 정신머리가 안드로메다로 떠나 버리는 3월에 여행이라니! 휴직의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시기라 생각했다. 동료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느긋하게 떠나는 여행, 로망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KF 마스크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전히 조심하고 또 조심하던 시절, 체코에 도착해 보니 뉴스에서 보도된 대로 마스크를 쓴 사람은 없었다. 간혹 보이기도 했지만 죄다 아시아 사람들이었다. 이미 걸릴 사람들은 다 걸렸다가 나았을 거고, 유럽인들은 처음부터 마스크 쓰기를 거부했으니 면역력은 당연히 있을 거고.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안전할 거란 뜬금없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었다-
체코에 간 이유는 한 가지였다. 남편을 따라 동반 휴직을 한 벗을 만나기 위해서.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 함께 원격수업 자료를 만들면서 돈독해진 사이였다. 친구와 친구 남편은 나를 위해 하루 일정을 내주었고, 프라하에서 두 시간 정도를 달려 체스키크룸로프로 안내해 주었다. 나는 비행기 멀미를 심하게 하는 편이라 친구 부부와 함께 했던 체코의 두 번째 날 심한 두통과 메스꺼움으로 힘들었었다. 하지만 주말부부임에도 하루를 내어준 친구 부부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괴로움을 꾹 참고 함께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프로그램에서나 볼 듯한 동화 같은 풍경과 함께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왕복 네 시간의 차 여행은 나의 컨디션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눈을 뜬 다음 날 아침,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전신에 통증이 몰려왔는데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나에게도 찾아온 걸까?'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을 잘 버텨 왔었는데, 아니 타국에 와서 코로나에 걸린다고? 믿기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챙겨 온 감기약을 들이켰다. 너무 힘이 들어 방 밖으로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창문 밖으로 새파란 하늘과 고풍스러운 숙소 앞 건물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프다는 나의 말에 친구는 김밥과 삼각 김밥을 잔뜩 준비해서 호텔 로비에 맡겨 주었고, 나는 그 음식을 먹으며 1박 2일 동안 호텔방에서 버텼다.
아니, 일주일 여행인데 이틀을 방에서 머물다니! 도대체 체코에 왜 온 거니? 그렇게 버티고 나니 한결 나아졌다. 가지고 온 감기약은 다 떨어졌지만 참을 만했다. 억울해서라도 나가야만 했다. 친구는 아픈 나를 위해 떡국을 끓여주겠다고 했다. 혹시나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린 거라면 너도 위험할 수 있다고 거부했더니 친구는 괜찮다고 자긴 체코에서 이미 여러 번 걸렸다고 안심에 안심을 시켜 주었다. 못 이기는 척 친구의 집에 방문했고 친구가 끓여준 떡국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사실은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제법 묵직한 느낌의 국물을 한 숟가락씩 떠서 떡과 함께, 친구가 손수 담근 김치와 함께 꼭꼭 씹어 먹으면서 내 몸에 담았을 뿐이다.
친구의 음식 솜씨는 잘 알고 있다. 함께 근무할 당시 손수 만든 음식을 가져오곤 했는데 입에 넣을 때마다 감동의 물결이 이어졌었다. 떡국의 맛은 느낄 수 없었지만 친구의 사랑과 정성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당시 프라하 시내 곳곳에서는 Easter day를 맞아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곳곳에 푸드 트럭이 즐비했고, 달걀 장식이며 연주회며 아기자기한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현지인처럼 스며들며 놀고먹고 즐기기를! 하지만 나는 즐길 수 없었다. 일단 냄새를 맡을 수도 맛을 느낄 수도 없었다. 여행의 기쁨은 이미 80프로 이상이 상실되어 있었다. 아, 이럴 땐 무얼 먹어야 할까? 너무 슬펐다. 휴직을 기념한 여행이었는데, 무급 휴직이라 돈을 아껴 써야 하는데, 그 와중에 큰맘 먹고 온 여행이었는데. 이래서 평소에 안 하던 짓 하지 말라는 소리가 있는 건가? 우울함을 안고, 여전히 쌀쌀한 프라하의 바람을 안고 계속 걷고 걸었다. 그러던 중 발견한 한식집. 프라하 시내에 위치한 ‘맛집’,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종업원은 동남아 사람으로 보였다. 뒤이어 나온 한국인 종업원의 경쾌한 인사 “어서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 정말 반가웠다. ‘맛집’은 그리 작지도 크지도 않은 식당이었다. 꽤 아기자기했고, 한국에 돌아온 듯 아늑했다. -사진으로 남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각과 미각을 잃었던 나는 아마 정신까지 잃었었나 보다. “맛집”의 사진을 단 한 장도 남기지 않았다. -메뉴판에서 나의 눈을 고정시킨 단 하나의 메뉴 “김치찌개”, 나는 망설임이 없었다. 김치찌개를 기다리는 시간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맛도 안 봤는데 이렇게 설레다니.
어린 시절부터였다. 엄마의 김치찌개. 엄마의 김치찌개는 좀 특이했다. 손수 담근 김치의 맛도 일품이지만 엄마는 김치찌개에 좀 특별한 걸 넣으신다. 바로 직접 담근 된장을 말이다. 그래서 색깔이 조금 어두운 편이다. 김치찌개의 얼큰함과 된장의 구수함이 조화를 이룬다. 엄마표 김치찌개로는 밥 세 공기는 거뜬했다. 맞다, 또 기억났다. 10여 년 전쯤, 한라산 어리목 코스 산행 후 먹었던 김치찌개가 있었다. 어리목 코스는 꽤 가벼운 편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산행 초보자인 나에게는 꽤 힘든 여정이었다. 하산 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몸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맛집이고 뭐고 숙소에 돌아와 몸을 눕히고 싶었다. 당시 숙소는 터미널에서 가까웠다. 버스를 탔고, 터미널에서 무사히 내렸고 숙소까지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 10분이 얼마나 길던지. 발걸음을 옮기던 중 내 눈에 들어온 ‘기사식당’,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기사식당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주문한 “김치찌개” 그 김치찌개는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 있었고 기름이 적당히 동동 떠 있었다. 한 숟갈 국물을 떠서 입안에 담았을 때 온몸의 오한기가 싹 풀리는 것 같았다. 얼큰함과 구수함 그리고 요리사님의 정성을 내 안 깊숙이 담았다. 흰쌀밥 역시 정말 맛있었는데 탱글탱글한 진주알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쌀밥과 김치찌개를 남김없이 모두 먹었다. 숙소에 돌아와 씻은 후 바로 침대에 누웠고, 깊이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몸살 기운은 사라졌고 맑은 정신과 상쾌한 기운만 남아 있었다. 그때 깨달았었다. 나의 소울푸드는 바로 김치찌개라는 것을.
“맛집”의 김치찌개를 소중하게 한 숟가락 떠 보았다. 그리고 조심조심 입안에 담았다. 역시나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약간의 얼큰함 정도를 상상할 수 있었다. 엄마의 구수한 김치찌개, 제주도 기사식당의 기름 동동 김치찌개를 떠올리며 내 몸 안에 계속 담아 보았다. 엄마의 손맛을, 몸살 기운을 저 멀리 쫓아주었던 든든함의 맛을 상상하며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몸은 프라하 맛집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이미 엄마 앞에 앉아 김치찌개를 먹고 있었다. 제주도 기사식당의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먹고 난 후 개운해진 몸처럼 프라하에서도 내 몸이 멀쩡해질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남편의 여름휴가에 맞춰서 잠깐 한국에 머물게 되었다며 친구가 문자를 보냈다.
“뭐 필요한 거 없어? 생각나는 간식류 없어?”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맛집 김치찌개!”
친구도 나도 대화창에서 한참을 웃었다.
직접 담근 엄마표 김치와 된장이 어우러진 김치찌개, 한라산 등산 후 몸살 기운과 피로를 말끔히 풀어주었던 기사식당 돼지고기 김치찌개 그리고 코로나인지 지독한 독감인지에 걸려서 오래간만에 맘먹고 갔던 여행의 기쁨을 80프로 이상 빼앗긴 서러움을 달래준 프라하 맛집 김치찌개. 김치찌개는 나의 소울푸드로 더욱 굳건히 자리잡았다.
꼬마 장학사님 덕분에 아침부터 행복했다. 나의 소울푸드의 역사를 떠올려 보았다. 주말에 김치찌개를 한 냄비 끓여야겠다. 비록 내가 끓인 김치찌개는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었던 세 종류의 김치찌개만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때를 떠올리며 위로를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안아 줄 네 번째 김치찌개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