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 부는 소년

누구에게나 재능이 있다

by 글꽃향기


3학년 교실에 중딩 2학년의 아우라를 풍기는 소년이 있다.



“국어책 펴야지. 얼른 준비하자.”

처음엔 나도 다정한 교사였다.

“아직도 교과서를 안 꺼낸 사람이 보입니다.”

“빨리 꺼내!“

말이 점점 거칠어졌다.

소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언성을 높이면 마지못해 하는 척하며 교과서를 꺼냈다. 소년은 친구들에게 장난도 많이 쳤다. ‘폭력’ 이란 두 글자에 다들 예민해서 조심해야 하는데 친구를 툭툭 치거나 등을 때려서 민원이 여러 차례 접수됐다. 역시나 다른 친구의 몸에 손을 대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으나 눈을 껌뻑껌뻑 할 뿐 태도가 나아지지 않았다. 그나마 3학년이라 행동이 크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은 세질 텐데. 이대로 놔두면 문제가 커질 게 뻔했다. 늘 생각했고, 고민했다. 소년의 눈빛은 나를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은 꽤 단단했다. 그 ‘단단함’ 이란 글자 자체로는 좋은 의미이지만 나에게는 그 무언가를 시도조차 하기 힘들다는 의미라 난감했다. 반항이라도 하면 교육적인 핑계라도 대며 다가갈 수 있을 텐데 생각만 할 뿐이었다.




5월쯤이었을까? 음악 시간에 리코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체구가 작은 아이들은 리코더의 모든 구멍을 제대로 막는 것을 어려워한다. 분명 제대로 운지했는데 그 소리가 나지 않는다며 리코더 교체를 원하기도 한다. -요즘은 준비물을 학교에서 모두 제공한다.- 정말 리코더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이는 불고 내가 어정쩡한 자세로 운지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나곤 한다. 소리가 제대로 나면 머리를 긁적이면서 자리로 돌아가는데 또다시 의아하단 표정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소년이 다가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선생님, 파 샾은 어떻게 해요? 시 플랫은요?”

미술 시간에도 눈이 반짝이는 아이였는데 리코더에도 관심이 생겼다. 노래 부르기에도 활기찼지만 그건 뭐 초등 저학년이라면 누구나 다 좋아하니까. 왼손 운지, 오른손 운지는 순식간에 익혔다. 소년은 쉬는 시간마다 리코더를 꺼냈다. 음악 교과서를 펼쳤고 연주해 달라고 말을 건넸다. 급하게 해결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소년은 “힝!", "쳇!" 하고 뒷모습을 보인다. 감정 표현이 정말 솔직한 아이다.




친구들이 소년의 리코더 연주를 듣고 감탄하기 시작했다. 리코더에서 어쩜 그리 예쁜 소리가 나는지. 교과서의 곡들을 모두 연주할 수 있게 된 소년은 나에게 다시 다가왔다. "선생님, **노래 리코더 연주 영상 틀어 주세요." 물론 시간이 허락할 때, 분위기가 차분할 때 틀어준다. 소년이 교실 정 중앙 화면을 보고 리코더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관심 있는 친구들이 리코더를 들고 화면 앞으로 모여들었다. 친구들은 소년에게 리코더 운지를 물어보았고, 소년은 신이 나서 친구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소년만큼은 아니지만 친구들도 리코더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선생님, 밤 양갱 연주할 수 있어요."

"선생님, 교가 연주할 수 있어요."

자신감이 생겼는지 표정과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이 아이, 달라지고 있구나!‘



요즘 소년과 '언제나 몇 번이라도' 이중주 연주를 하고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제대로 본 적은 없다. 음악으로 영화 제목을 만났을 뿐이다. 이중주 영상을 틀어놓고 소년과 나는 번갈아가면서 원음과 반주를 연주한다.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 모여든다.




"선생님 집에 알토 리코더 있어, 보여줄까?"

소년에게 한마디 건넸다.

"알토 리코더요?"

"선생님, 리코더 가져오셨어요?"

소년의 말투가 다정해졌다.

"깜빡했다. 내일 꼭 가져올게."

서랍장에 깊숙이 처박혀 있었던 리코더를 오랜만에 꺼냈다.








"별별아, 알토 리코더야. “

"엄청 크네요."

"운지 해 볼래? 손이 다 안 닿을 수도 있어. 입은 대면 안 된다."

"조금 힘든데 다 닿기는 해요."

"그래? 나중에 기회 있으면 연습해 봐."

욕심이 생긴다. 비밀 작전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아이들 모두 이렇게 한 가지씩은 재능이나 관심사가 있을 텐데. 그걸 찾을 수 있다면, 열정을 심을 수 있다면, 매력에 푹 빠질 수 있다면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할 텐데. 어른들이 정해 놓은 한 가지 길만 걸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닌지.





12월 중순에 접어든다. 만감이 교차하는 시기다. 성적 업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아이들은 방학이 다가온다고, 곧 4학년이 된다고 몸과 마음이 붕붕 떠 있다. 나는 또 단호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한마음이 되지 못하는 시기라서 아쉽다. 다가올 이별을 알기에 쓸쓸해진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이별에 강하다. 내가 문제다. 학창 시절부터 이어지던 일 년마다의 이별을 이 나이가 되도록 계속하고 있다. 많이 덤덤해졌지만 헤어짐의 순간은 늘 아리다. 학교에서 오며 가며 만난다고는 하지만 일 년이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드러내고, 얼마나 많은 추억을 공유했던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얼굴 붉힐 일은 줄어들고, 행복한 기억은 쌓이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소년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같은 학교에 머무는 동안 소년이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 지켜보고 싶다. 소년이 미소 지으며 2024년이란 시간을 떠올리기를.



‘피리 부는 소년, 널 기억할게’




(더하기)매일 늦게 등교하던 소년은 요즘 지각하지 않는다. 등교할 때, 하교할 때 소년의 손엔 항상 리코더가 있다. 그 누구보다 활기차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