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춤 Aug 08. 2021

안면마비 10개월 간의 기록

서른셋, 안면마비 #2

   *지난 10개월 간 메모장과 수첩에 적어둔 글과 흩어져있던 생각들을 이곳에 모아 기록*


   2020년 10월 16일 금요일, 발병 2일 차. 왼쪽 얼굴 전체 마비 증상 발현 1일 차. 출근하자마자 회사 옆 한의원 진료. 몇 가지 테스트 후 다행히 중추성 질환은 아닌 것으로 짐작. 전기침/적외선/레이저 치료 후 바로 옆 병원에서 스테로이드 1알과 항바이러스제 5알 처방. 사무실로 돌아와 3시간 동안 긴급 인수인계서 작성. 오후 2시에 회사를 나와 회사 선배가 추천한 청담동 한의원 방문, 역시 중추성 질환은 아닐 것으로 진단받고 침 치료. 효과는 없더라도 한약을 짓고 나면 대우가 달라진다는 후기들을 보고 더 생각하지 않고 한약도 주문했다. 27만원. 직후 중앙대 병원 응급실 내방. 채혈 진행, 말초성으로 동일 진단. 이비인후과 응급의가 입원 권유. 1일 차 스테로이드(5알) 처방. 안과 촬영 후 점안액, 항생제 처방. 밤 11시 이전에 무조건 취침하기로 결정.


   10월 17일 토요일, 중앙대 병원 교수 진료. 스테로이드 고용량 처분. 한의원 얘기를 하니 코웃음 침. 두통이 너무 심해서 침 치료는 취소하고 휴식.


   10월 18일 일요일, 스테로이드 12알. 항바이러스제 투약 끝, 집에서 휴식. 여의도 공원 산책. 스케이트와 농구를 보며 가벼운 운동.


   10월 19일 월요일, 스테로이드 12알. 오늘부터 재택근무로 전환. 일을 조금만 했는데도 스트레스가 느껴진다. 안배를 하기 위하여 신경을 그만큼 쓰기 때문인가 보다. 점심시간 한의원 침 치료. 오늘은 이마 쪽이 많이 아팠다.


   10월 20일 화요일, 스테로이드 10알. 재택 조금. 재활의학과 방문해서 2주간 안정가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서 발급. 열전기치료. 마사지 방법을 배웠음. 한의원에서 하는 전침치료와 동일한 것 같음. 단 영역이 볼에 한정된 느낌이다. 오후에 이비인후과 방문. 별 증상 개선 없으며 2주 뒤 재방문 예정. 한의원 침 치료하는데 이번엔 관자놀이 쪽이 자꾸 아팠다. 한약과 스테로이드를 중복용 가능한지 문의했는데 상관없다는 답변. 한약 성분을 문의해봤으나 전문가가 알아서 했다며 얼버무리는 답변. 한의원에 대한 불신이 약간 생긴다. 여전히 업무 관련 연락은 온다. 회사에 2주 간의 병가를 냈다.


   10월 22일 목요일, 스테로이드 8알. 재활열전기 후 침 치료. 턱관절에 침을 잘못 놨는지 음식을 먹을 때 턱뼈가 자꾸 아프다.


   10월 26일 월요일, 스테로이드 4+1알. 침 맞고 재활치료 진행. 재활의학과에서 코로나 때문에 병원을 중복해서 이용할 수 없다며 병원 2개 중 하나는 끊어야 한단다. 아침에 늦잠을 자니 점점 식사시간이 불규칙적으로 변한다.


   10월 27일 화요일, 스테로이드 4알. 발병 13일 차. 침놓을 때마다 약간씩 부위가 달라지는지 아플 때가 많다. 하나씩 놓을 때마다 안 아프기를 바라며 긴장한다. 재활치료는 그만할 참이다. 내일로 꼬박 14일이 되는데 전혀 진전이 없다. 조바심까지는 아니지만, 혹시나.


   10월 28일 수요일, 스테로이드 4알. 마지막 스테로이드 복용이다. 근전도 검사. 한의원 침보다 더 아팠다. 입가를 제외한 3군데 신경 손상이 아주 심해서 후유증 남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 75% 정도 손상이라고 한다. 예후가 좋지 않은 하위 10% 수준이지만 자연치유를 제외하면 일종의 스파크처럼 합선이 되어야 살아날 거라고 한다. 왜 이렇게나 손상이 된 거지 갑작스레... 교수는 보수적으로 얘기했거니 생각하고, 침 치료 꾸준히 1달 채워서 받아보고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10월 30일 금요일, 공식적인 병가 기간이 끝났지만 병원은 계속 가야 한다. 회사에서는 일단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치료에 집중하고 사후병가를 내도 된다고 한다. 부서에는 일단 2주 더 연장하는 걸로 하고, 일주일마다 몸상태에 대해 한번씩 통화를 하기로 했다. 대부분 한 두달 만에 낫는 병으로 알고 있어서 병가를 팍 내는게 눈치가 보인다.


   10월 31일 토요일, 오전에 침을 맞고 장을 봤다. 롤드컵 결승전을 보느라 처음으로 11시를 넘겨 잠이 들었다.


   11월 1일 일요일, 11시가 되어서야 제대로 잠이 깼다. 자도 자도 피곤한 느낌이 있다. 컨디션이 조금 나빠진 것 같다.


   11월 2일 월요일, 현기증이 심하고 두통도 있다. 한의원에 3시에 도착했으나 4시가 넘어서 침을 맞았다. 메스꺼움까지 정도가 심해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7시부터 잠을 청했다. 스테로이드도 1알 먹었다. 지속되는 고통이 싫어 그대로 생을 마감하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란 어떤 걸까. 긴 투병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신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적어도 이 일, 회사 생활은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회복하더라도 다시 이 경쟁적이고 초를 다투는 일에 스스로를 소모하고 싶지 않다. 무역이니 철이니 하나도 재미없다.


   11월 3일 화요일, 대학병원에서 어지럼증 관련 얘기를 나눴다. 이석증 검사를 했는데 말짱했다. MRI를 찍기로 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하는 게 좋다고 한다. 병원에선 당연히 확실한 것을 원하겠지.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아주 만에 하나 중추성 마비로 뇌졸중일 수도 있고 그밖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해보자고 한다. 과잉진료라 생각했지만 아내가 걱정하는 통에 하기로 했다. 날짜는 2주 뒤. 워낙 예약이 많이 밀려 있어서 원래 2달이 걸리는데 딱 한 타임이 비었단다. MRI를 찍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아내와 얘기하는 것을 듣던 창구 간호사는 계속해서 우리 교수님은 서울대를 나오셨다고 한다. 그 말이 너무나도 거슬렸다.


   11월 5일부터 8일까지, 목요일에 침을 맞고 부산에 갔다. 말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었다. 당신 자식이 서울에 올라와서 잘 먹고 잘 사는 줄 알았더니 얼굴 한쪽이 일그러져서 온다면 심정이 어떨지. 친가에서나 외가에서나 나는 장손자다. 아주아주 어려서부터 아무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았다. 우리 집안에서 유일하게 4년제 대학교를 나왔다. 내세울 것 없는 부모님에게 지 혼자 알아서 커서 대기업 다니는 아들내미가 주는 의미는... 그래도 가고 싶었다. 그냥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나를 보시자마자 부모님과 할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낫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부산은 따뜻했다. 가족들이 해준 음식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토요일에는 형님과 테니스를 쳤다. 얼굴에 활기가 도는 기분도 느꼈다. 근데 왼쪽 눈의 반응이 늦다. 양쪽 눈의 초점이 안 맞는 경우도 지속된다. 서브를 치고 앞을 보면 왼쪽 눈은 약간 늦게 장면을 바라보는 느낌. 그러다 보니 공이 와도 정확하게 반응을 잘 못하겠다. 대학 동기의 결혼식에 가서 오랜만에 친구들도 봤다. 얼굴이 이 꼴이 되었지만 결혼식엔 와주었다는 사실에 친구 놈은 고맙다는 말을 어색하게 건넸다.


   11월 9일, 월요일. 4일 만에 침을 맞았다. 매일 움직이지 않고 30분씩 누워서 얼굴에 뭔가를 하고 있으니 할 수 있는 건 머리 굴리는 것 뿐.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여전히 일 생각도 난다. 아침엔 얼굴이 뭔가 좋아 보였다. 아내의 피겨 연습을 관람했다. 오랜만에 게임도 2시간 했다. 마사지는 스킵했다. 12시에 잤다.


   11월 10일 화요일, 어제의 여파인지 아침에는 어제보다 더 안 좋아진 것 같은 느낌이다. 늦은 시간 게임은 확실히 좋지 않은 것 같다. 이 부분은 이제 개선이 필요하다.


   11월 11일 수요일, 2주를 또 연장했는데 그대로다. 일단 이번달 말까지 더 병가기간을 늘리기로 했다.


   11월 17일 화요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조금 얼굴이 자연스러운 느낌이 든다. 이제 한 달을 넘겼다. 한 달 동안 쉴 만큼 쉬었는데, 드디어 찾아온 안식년을 소중히 쓰지 못하고 있다는 강박이 또 찾아와서 괴롭힌다. 커뮤니티 글 보기, 유튜브 보기, 자는 것 말고는 스스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아내의 피겨 연습을 데려다주고 왔다. 테니스를 보느라 12시를 넘겨 잤다. 요 며칠 계속 늦게 잔다.


   11월 19일 목요일, MRI 촬영. 별일 없을 걸 아는데도 괜히 별일 있을까 약간은 긴장. 그동안 인터넷에 떠도는 안면마비 관련 지식은 빠짐없이 다 습득했다. 이 증상은 확실히 말초성 안면마비다. 뇌졸중이었다면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늦었을 것이다. MRI 촬영을 답답해하는 사람도 많다고 하는데 마음이 참 편하다. 매일 얼굴에 침을 스무 방씩 맞는 일에 비하면 마음이 아주 편안하다. 한 달간 어지럼증 때문에 힘들었는데 이상하게도 MRI를 찍을 때쯤 조금 없어진 것 같다. 병이라는 게 꼭 그렇더라. 인터넷을 뒤져보니 3차신경통이라고 하는 증상인데 안면마비가 일어나는 안면신경부 바로 옆에 3차신경이 있기 때문에 영향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 것 같다. 혹시 신경이 회복되면서 자꾸 거길 건드리나?


   11월 24일 화요일, 중앙대 병원. 다행히 MRI 결과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이비인후과 의사는 그냥 이상이 없다고 얘기했다. 엄청 겁을 주더니 달랑 한 줄로 끝났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해졌지만 약간은 짜증이 난다. 이제 침 맞는 횟수도 주 5회에서 주 3회로 바꿨다.


   11월 30일 월요일, 병가를 연장할까 말까 고민이다. 일단은 이번주까지 쉬는 걸로 되어 있다. 아직 얼굴은 나을 기미가 안보인다. 부서장과 통화. 복귀하더라도 당분간 일을 시킬 생각은 없다고 한다. 일단 복귀하고 천천히 무리 않고 지켜보자고. 얼마 전에 이 병에 걸렸던 옆 부서 부서장은 병가도 안내고 한의원에 다녀 한달 만에 병이 나았다. 같은 병에 걸려놓고 몇 달 병가를 내는 것이 부담이다. 더 쉬라고 해도 체면 차리느라 덥석 알겠다고 못한다. 2주씩 2주씩 연장해왔는데 나는 뭐가 걱정되어서 자꾸 그렇게 찔끔찔끔 시간을 받는 걸까. 사실 나도 나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얼굴이 아픈 것도 아니고, 뭔가 이상한 질병이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회사에서 자꾸 어떤 것 같냐고 일주일마다 물어보지 말고 확실하게 몇 달 쉬라고 얘기해주면 좋겠다. 대답할 때마다 뭔가 곤란하다.


   12월 4일 금요일, 회사 복귀. 공식적인 병가 기간 끝다. 인사를 하러 온 사람들이 말은 안해도 얼굴을 보고 싶어 할 것 같아 선뜻 마스크를 내려 얼굴을 보여주었다. 다들 비슷한 반응이다. 힘내라고 한다. 안면마비 관련 후기들을 보면 가장 힘든 것이 힘내라는 말이라고 한다. 이구동성 구안와사 치료에는 한의원이 좋다고 한다. 어디가 용하다며 친척이 나았다며 추천을 해준다. 임원, 부서장, 다른 부서의 사람들과 차례로 티타임을 갖는다. 괜찮냐고 물으면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한다. 보시다시피 표정이 잘 안 움직이기는 하는데 사실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통증도 없다. 어차피 결혼까지 다 했고 자식을 낳아도 유전이 되진 않는다며 문제없다고 대답한다. 이 얘기는 내가 맨날 하는 레파토리다. 그리고 이어서 오히려 이번 계기를 통해 스스로를 많이 돌아봤고 쉬는 시간도 가져서 전화위복이라고 말한다. 내가 웃으며 그런 얘기를 하면 그들은 맞장구를 친다. 부서장은 내가 그동안 살아온 방식이 잘못된 것이 절대 아니니 그런 일로 정신을 상하면 안된다고 한다. 그저 운이 없었다고 얘기한다. 진심일 것이다. 맞는 말 같기도 하다. 안면마비에 걸린 이유는 하필 2주 전 독감 주사를 맞았고, 하필 최근에 바빠서 면역력이 약해졌고, 하필 날씨가 추웠고, 그래서 귀 밑에 염증이 생겨 안면신경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내심 나는 복귀를 해서도 일을 하지 않고 안심하고 더 쉴 수 있도록 그들의 동의를 이끌어 낸다. 대체로 안면마비에 걸리면 한 달만에 낫는데 저는 좀 심각하게 걸려서 세 달은 걸린다고 하네요. 침 맞고 병원 다니는 게 아프기도 하고 지겹기도 한데 그래도 해볼 때까지 후회 없이 해봐야겠다고. 그러면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며 최대한 치료에 집중하라고 필요하면 병가 연장도 해보라며 얘기해준다. 회사가 나를 위해 충분히 배려해준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인사팀은 내 이슈가 근로환경이나 사내 문화에 대한 부조리 등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것 같고 내 위의 상사들도 그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일해온 아끼던 후배가 스트레스나 과로가 원인이라는 병에 걸렸으니 안타깝기도 할 것이고 만일 내가 사실은 이런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게 아닌가 싶다며 이상하게 얘기해버리면 그들도 곤란해질 것이다. 또래의 친한 사람들은 조금 다른 주제로 얘기한다. 그동안 말을 걸고 싶었는데 신경 쓰일까봐 못 걸었다는 얘기가 가장 마음에 든다. 진짜 그랬을 것 같은 사람과 아닌 사람들이 바로 구분된다. 일을 많이 해서 그렇다며 빡빡한 너희 부서장 때문이라며 제발 일 좀 그만하라고 니가 아무리 대충 해도 남이 최선을 다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며 위로해준다. 그런 얘기 조차 나를 이미지로만 바라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나쁠 것은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다. 암튼 앞으로 매일 재택근무를 하면서 부서원들이 궁금해하는 업무 자문만 하기로 했다. 코로나 시국이라 이런건 또 참작이 되었다. 회복이 다 되면 제대로 업무를 맡는 걸로. 세 달 이상은 안 가겠지. 한 달 뒤면 낫겠지.


   12월 10일 목요일, 몇 년 만에 노트를 샀다. 열다섯 번째 수첩이다. 진짜 오래 골랐다. 영등포 핫트랙스에 도트로 된 포켓 사이즈가 딱 하나 남아 있었다. 색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적당히 꾸며 쓰기로 했다. 불렛 저널, 해빗 트래커로 쓸 예정이다. 업무를 안하니 남아도는 게 시간이다. 그런데도 안 한다면 그냥 안 할 일인 것이다. 미뤄둔 것이든 새로운 관심사이든 떠오르는 대로 그냥 다 해보기로 했다. 매번 벌려놓기만 하고 마무리를 못하는 나에게 수첩은 의식적으로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분명히 회사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수첩을 달고 살았다. 어딜 가든 필수품은 휴대폰, 지갑, 수첩이었다. 매 순간 기록할 내용이 넘쳐 났고 하루에 무엇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때그때 충실했다. 매일 하고 싶은 일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 회사에 왔으면서 지금은 월급날인 줄도 모르고 지나간다. 점심시간에 서점에 들러 책을 둘러보다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가끔 휴대폰 메모장에 쓰는 것 외에는 수첩을 쓸 일이 없었다. 일과가 늘 비슷했기에 수첩을 억지로 가지고 다녀도 이미 지나간 일들을 기록해두는 일에 불과했다. 업무 관련된 것은 내 수첩에 기록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12월 22일 화요일, 마지막 중앙대 병원 진료다.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한다. 알겠다고 하고 그냥 나왔다. 중앙대 병원은 아마 앞으로 안 갈 듯.


   12월 24일 목요일, 안면마비에 걸린 이후 내내 꿈을 꾼다. 비타민B를 자기 전에 먹어서 그런가. 드디어 오늘은 지구가 멸망해 우주로 도피하는 꿈을 꿨다. 너무나도 선명해서 현실 같았다. 세계가 멸망한다는 방송이 나왔고 곧 지구는 거대한 로켓이 되어 우주로 날아갔다. 가족들이 생각났다. 할머니와 부모님이 보였다.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일만 실컷 하고 가는구나 생각했다. 죽는 장면을 선택한다면 아내와 끌어안고 동시에 죽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이상한 동물들이 사는 행성에 착륙했다. 잠시 후 잠에서 깼다. 다시 잠이 들었고 또 꿈을 꿨다. 이번에는 축구하는 꿈으로 바뀌었다. 큰 경기장에서 환상적인 몸놀림을 보이다가, 어릴 때부터 살았던 할머니 집 앞 골목으로 무대가 바뀌어 흑인들 앞에서 개인기를 선보였다.


   1월 5일 화요일, 눈이 자꾸 안 좋아서 안경을 사러 갔다. 안면마비 후유증으로 눈 얘기는 잘 안 하고 시력도 이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스마트폰 안 보는 게 방법은 될 것 같은데. 유튜브를 보거나 글을 쓸 때도 한참 화면을 노려보고 나면 그 뒤로는 한동안 사물이 흐려진다. 왼쪽 눈 시력이 0.7까지 떨어져 있다. 일시적으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아무리 컴퓨터 화면을 많이 들여다봤어도 1.5를 유지했는데 이번에 이렇게 가는 건가 싶다. 렌즈 집 사장님이 일단 일시적으로 시력이 떨어진 것일 수도 있으니 좀 시간 지나고 다시 와보라고 한다.


   1월 8일 금요일, 주식 계좌를 개설했다. 그동안 안 했던 짓들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자. 이제 글도 쓰고.


   1월 11일 월요일, 아주 조금 이마가 움직인다. 다시 약간 괜찮아진다. 이제 3달째가 다 되어 가지만 낫지 않는다. 침도 사실 효과는 없는 것 같다. 안면마비로 유명한 김진 교수님이 해외에 단기 유학을 가셨다가 최근에 일산백병원에서 한림대동탄성심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일단 2주 뒤에 예약을 잡았다. 의미가 있을까. 또 각종 검사만 하고 열전기 하지 않을까. 매일 마사지만 해도 지 않을까. 어차피 안면마비라는 게 첫 며칠 치료가 다라는데..


   1월 13일 수요일, 아주 조금 더 눈이 감긴다. 자기 전에 아내 품에서 얼굴 마사지받는 게 좋다. 매일 하지는 못한다. 품이 드는 일이니 매일 하자고 하기도 좀 그렇다. 먼저 하자고 해도 그냥 넘어갈 때도 많다. 그래도 꼬박꼬박 아에이오우 해보라며 사진을 찍어서 남겨두고 있다. 3달 됐는데 안 낫네.


   1월 17일 일요일, 얼굴 근육이 조금 더 움직인다!


   1월 20일 수요일, 마지막 침 치료. 꼬박 3달 동안 침을 맞았네. 입 쪽만 조금 돌아오는 느낌이고 별로 안 나아졌음. 한의사도 더 치료해야 한다고 지도 않고 그냥 앞으로 잘 회복하시란다. 매일 침 맞느라 어디 여행도 제대로 못 가봤는데. 만원 이하라 침은 보험처리도 안고. 뭐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잘되려고 노력한 거고 살면서 처음으로 침을 맞아본 것에 그냥 의의를 두자.


   1월 21일 목요일, 김진 교수 첫 진료. 아내와 같이 아침에 차를 끌고 병원에 갔다. 지금까지 만난 의사들과 다르게 말투에 확신이 있다. 근전도부터. 중앙대랑 방법이 조금 다름. 결과는 95% 이상 손실. 특히 입쪽은 98.7% 손실. 이건 진짜 망했다. 안면마비 걸린 사람 100명 중에 예후 좋은 순위 97등 정도. 중앙대에선 입쪽이 제일 괜찮았고 평균 75%라고 했는데 그 새 악화된 것인지. 침 맞으면서도 입이 제일 빨리 돌아오고 있다고 했었는데. 꼬박 3달을 개고생 했는데 ㅋㅋ. 완치는 불가능. 교수가 힘들 것 같다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모습이 왠지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 발병하자마자 본인에게 왔으면 바로 신경감압수술을 했을텐데 지금은 늦었음. 70%는 자연스레 돌아옴. 적극적으로 치료하면 최대 90%까지 해볼 수 있음. 이제 앞으로 망가진 얼굴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꿈같다. 오늘부터 귀에 스테로이드 주사 치료 시작. 일단 염증이 아직도 남아있는 상황이라 이것부터 다 없애야 함. 2주에 걸쳐 총 4번 맞을 예정. 이후에는 도수치료. 근데 도수치료 일정이 꽉 차서 예약은 재활과 랑 얘기해봐야 함. 스테로이드 주사 느낌이 딱 귀에 물 찬 느낌.


   1월 23일 토요일, 몇 달만에 회사 동호회에 나가서 테니스를 쳤다. 날씨가 추워서 야외활동은 최대한 안 해왔지만 더 못 참겠어서 그냥 치러 나왔다. 오래간만에 혈류가 흐른다고 해야 하나? 좋았다. 몇 달이 지났는데 눈 반응이 여전히 안 좋다. 추워서 그런가. 좋아하던 운동도 제대로 못하게 되나.


   1월 29일 금요일, 회사 보너스가 발표되었다. 46일을 쉬어서 인센티브가 두 달치 깎였다. 그 기간 동안 일을 안 했으니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일만 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약간 억울하기도.


   2월 4일 목요일, 도수치료 첫날. 중앙대에서 받았던 열전기치료랑은 차원이 다르다. 이 사람은 안면근육구조와 작동 원리에 대해 완벽히 인지하고 있는 듯. 실력 있다. 특히 입안 근육을 늘려줄 때 좋음. 입 쪽은 좀 개선되는 느낌.


   2월 14일 일요일, 고등학교 친구놈 만남. 이놈은 무슨 초등학생 때 안면마비 걸렸었네. 한 달만에 한의원 다녀서 나았다고. 생각보다 안면마비 걸린 사람들이 많고 대부분 한 달만에 낫기 때문에 한의원 가면 낫는 줄 안다. 하지만 나만큼 심각하게 걸린 사람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2월 15일 월요일, 세 번째 도수치료. 이제 4개월 지났다. 첫날이랑 사진을 비교해보면 나아진 게 없다. 그래도 눈은 좀 감기는 듯. 연합운동이 심해져서 밥 먹을 때마다 눈물이 줄줄 샘. 낫는 건 낫는 거고 연합운동을 잡는 게 제일 중요해서 도수 치료할 때마다 분리하는 게 중요하다. 컨디션 좋은 날은 잘 되고 아닌 날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고. 그나저나 일이 점점 주어진다. 일주일마다 좀 괜찮은지 준비가 되었는지 물어보고 일을 주려고 한다. 이것저것 해보라며, 몸에 지장 주지 않는 선에서. 회복이 제일 중요하지만, 오히려 일을 하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스물여섯 이후에 만난 사람 가운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뿐이라는 사실은 아마 우연일 것이다. 


   3월 8일 월요일, 김진 교수 두 번째 진료. 5개월 지났다. 사진 찍고 근전도. 지난번이랑 비교할 때 유의미한 차이가 없음. 그래도 교수님은 조금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고 얘기. 일단은 좀 더 해보자고 도수치료 추가함. 일을 최대한 안 하면서 치료받는 건 진짜 눈치가 많이 보인다. 일도 하나씩 주어진다. 얼마나 더 안 할 수 있을까. 이게 나아진 것 같다가도 아니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도수치료는 계속 성과가 괜찮은 것 같다. 특히 눈이 점점 잘 감긴다.


   3월 9일 화요일, 임원과 점심을 먹었다. 같은 레파토리 반복. 가족한테 잘해라, 전화위복으로 생각해라 등등. 회사에서 어떤 사람들은 덕장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근데 몇 달만에 얘기를 했는데 완전히 똑같은 순서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사람을 마주하고 보니 이런 종류의 사람은 상대방인 나를 생각하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며 말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그런 것 같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사람들 가운데 어쩌면 대부분 진솔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피할 필요는 없다. 사실 피상적인 관계에서 뭐 그렇게 할 말이 있겠는가. 그냥 그들은 그들 방식대로 사는 것이다. 내가 내 방식대로 사는 것 처럼. 저녁엔 반년만에 풋살에 복귀했다. 야간에 라이트 아래에서 운동하면 왼쪽 눈이 더 불편하다. 그래도 뜀박질을 하는 건 언제든 좋다.


   3월 19일 금요일, 종합건강검진. 몇 달 동안 살이 3kg 빠졌다. 주로 얼굴에 살이 빠진 것 같다. 시력이 다시 회복되었다. 신기하게도 다시 1.5를 찍는다. 괜찮네?


   4월 2일 금요일, 몇 달 동안 주식 공부를 한답시고 열심히 했는데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내 신경을 정말 어지럽히는 활동은 아닐지. 잘 생각해보면서 할 것.


   4월 9일 금요일, 부산. 작년까지는 1년에 두 번 갈까 말까 했는데 올해는 많이 가게 될 것 같다. 얼굴 얘기를 하면 대부분 가만히 있을 땐 괜찮다고 하는데 우리 엄마만이 가만히 있어도 티가 난다고 한다. 오히려 얼굴이 이상하다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따뜻해져서 좋았다.


   4월 19일 월요일, 김진 교수 세 번째 진료. 6개월 지났다. 오늘은 인턴 레지던트들이 참관하고 있다. 교수님이 평소보다 더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짐짓 권위도 내보인다. 사진을 보더니 지난번에 비해선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 한다. 실제 내 느낌으로도 좋아지긴 했다. 이마도 잘 올라간다. 도수치료가 효과가 있는 듯. 남들도 말 안 하고 무표정으로 있으면 모르겠다고 한다. 교수님이 웃으시면서 도수치료는 이제부터는 오히려 안 좋을 수 있다며 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한다. 집에서 마사지도 하지 말라신다. 경과를 봐서 필요하면 시술을 하시겠다고 한다.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연합운동을 없애기 위해 얼굴 근육과 가죽 사이에 바늘 같은 것을 넣어서 벌린다는 것 같았다. 근전도를 찍고 다시 돌아왔다. 이번엔 레지던트들이 없다. 오전에 나에게 얘기한 내용을 아예 잊어버리신 건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도수치료를 4번 더 넣어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보톡스 주사를 놔주셨다. 그냥 진료하다 말고 얼굴에 매직으로 점을 몇 번 찍더니 주삿바늘이 콩콩 들어온다. 딱히 아프지는 않았다. 이제 두 달 뒤에 보자며 혹시 호전이 안되면 그 시술을 하자고 한다.


   5월 9일 일요일, 시골에 가서 마늘종을 뽑았다. 엄마의 고향이다. 힐링이 된다. 한바탕 노동을 하니 기분이 좋다. 야외에서 몸 쓰는 일을 했었으면 안면마비 같은 것에 걸렸을까? 몇 달 전 처음 내 얼굴이 마비된 것을 보자 할머니는 입에 고리를 걸고 대추나무에 걸어두면 낫는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어린 시절에 듣던 얘기다. 그 옛날에도 이 병은 있었다는 것이다. 농사만 짓던 때에도 나처럼 뇌를 쉬지 않고 굴리는 사람이라면 이런 병에 걸렸겠지. 찬데 자서 입이 돌아가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그것은 잠깐이다.


   6월 7일 월요일, 김진 교수 네 번째 진료. 시간 잘 간다. 8개월 지났다. 도수치료도 일단 예약된 것은 오늘이 마지막. 연장될지 안될지는 모르겠음. 무표정으로 가만히 있으면 진짜로 티가 안 난다. 그래도 그동안 도수 치료하면서 괜찮았던 게 몇 주 전부터 단독으로 입꼬리가 드디어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많이는 안 올라가지만 분리가 된다. 여전히 오와 우는 잘 안되지만 거울 보면서 오른쪽 얼굴을 안 움직이면 그런대로 아주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눈 안쪽부터 입가로 내려오는 그 라인은 계속 뭉친다. 밥 먹을 때마다 눈물 나는 것도 여전함. 근전도 결과는 이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그래도 많이 회복했다며 다행이라고 말씀하신다. 웃는 게 문제인데 여전히 잘 딸려오지는 않는다. 스마일 서전이 필요하다고 하신다. 오늘까지만 하고 도수치료는 추가 없음. 8월에 보고 진짜로 그때도 더 개선이 없으면 진지하게 시술을 하겠다고 한다. 일단은 또 두 달 벌었다. 도수 치료하신 분한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나오고 싶었는데 깜빡하고 버스를 타버렸다. 뒤늦게 전화가 왔음. 그분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이 감명 깊어서 집에 가서 홈페이지 통해서 칭찬편지를 글자 수 꽉 채워서 썼다. 중앙대와 한의원 거치면서 병에 대해 겉도는 얘기만 하는 것들에 많이 실망했는데 이분을 통해서 병원에 대한 신뢰를 회복했다. 아무튼 진짜 거의 다 온 것 같다. 얼굴도 많이 좋아진 것 같고.


   7월 중순 어느 날, 무심코 휘파람을 불었는데 처음으로 소리가 났다. 마시는 휘파람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지만 부는 소리에는 약간의 음이 섞여 있었다.




   8월 9일 월요일 내일, 김진 교수님의 다섯 번째 진료가 예정되어 있다. 벌써 10개월이 지났다. 첫 4개월 동안엔 거의 차도가 없었고 이후 도수치료를 했던 3개월 동안엔 체감적으로 많이 좋아졌다. 그 이후로 체감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사진을 찍어보면 조금 더 나아진 것 같다. 골든타임은 한참 넘겼고 이 정도 회복 속도라면 앞으로는 더욱 더디게 낫겠지. 활짝 웃고 싶다. 실컷 낄낄 대다가 마지막에 아차 내 얼굴 이상하지라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난주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런가 이번주 얼굴이 더 부자연스러운 느낌이다. 근데 내가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는 때마다 오히려 사람들은 좀 나아진 것 같다고들 한다. 대체 뭘까. 수술은 하기 싫다. 주사가 싫어서 소아과도 안 다니던 내가 전신에 침도 실컷 맞았고 귀에 주사도 맞고 얼굴에 보톡스도 맞았다. 차라리 내일 가서는 더 치료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이대로 즐겁게 사시라고 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른셋, 안면마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