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한껏 깊어진 가을, 내 나이 19살 때의 일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온 딸이 이름도 생소한 간호사관학교를 꺼냈을 때 엄마가 보인 첫 반응이었다. 엄마와 애초부터 상의할 생각은 없었다. 남동생을 위해 알아서 상고로 진학하는 희생 정도는 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아온 맏딸이었다. 은근히 살림 밑천까지 바랬던 엄마에게 보따리 싸서 나가겠다는 선언은 어쩌면 엄마에 대한 복수심이었는지 모르겠다.
“요 학교 들어가면 나라에서 기숙사도 주고, 학비랑 용돈도 다 준다 안카나. 돈 없어도 학교 갈 수 있는 거라”
엄마의 아킬레스건인 돈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엄마를 굴복시킨 나는 이듬해 1월 사관학교에 가입교 했다. 4주간의 사전 훈련을 들어가기 전 날 나는 어깨까지 기르던 머리카락을 귀밑 10센티로 잘랐다. 귀밑을 맴돌던 차가운 겨울바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가입교
가입교 첫날, 어설프게 열을 맞춰 서서 국방색 ‘전투복’을 두 벌씩 받았다. 깨끗하게 세탁은 되었지만 몇 번을 입었던 것인지 낡아 보였다. 치수는 대 중 소로 간단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엄마가 사주는 옷만 받아 입다가 처음으로 내 치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밖에서 들고 온 물건들을 ‘사제품’이라 불렀다. 입고 온 옷과 지갑 같은 사제품을 비닐 백에 담아서 반납했다. 부모님들께 소포로 보낸다고 할 때 몇몇 아이들이 코를 훌쩍였다. 그때 나는 부모님의 기대와 맏딸의 의무로부터 벗어났다는 생각에 자유·독립 만세 삼창을 부르고 있었다. 그날부터 학교에서는 우리를 ‘가입교생’이라고 불렀다.
1990년, 10명 중 3명은 제 발로 나가떨어진다는 가입교를 통과했다. 4년 동안 사관생도로 학보사와 문학동아리 활동을 병행하며 무사히 졸업했다. 만세삼창을 부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입교를 감행했던 것과는 달리, 4년간의 생도 생활을 마치고 임관을 바로 앞둔 나는 몹시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정말 군인의 길을 갈 수 있을까?” 임관 전날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다이아몬드 한 개짜리 계급장을 달았다. 1995년, 군인으로서의 첫출발이었다.
서해 교전
대위 1년 차에 서해교전이 있었다. 퇴근 무렵 사이렌이 울리며 전원 비상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군 병원 중 가장 큰 수도통합병원에서 비상대기는 흔한 일이었다. '인근 부대에서 총기사고가 난 걸까?' 생각하는 찰나 실전이 있었다는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나와 동료들은 비상사태 매뉴얼에 따라 각자의 역할에 맞게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곧이어 라디오 뉴스로 서해교전 발발 소식이 전해졌다. 응급실 세팅을 빠르게 마치고 동료들의 긴장된 눈길과 떨리는 숨결을 느끼며 헬기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전시를 대비한 훈련은 수시로 했었지만, 영화 속 전쟁 장면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간호 장교로 키워졌지만 솔직히 무섭고 떨렸던 순간이다.
두근대며 널뛰는 내 심장 박동 같은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매서운 모래바람을 가르고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부상자들이 하나 둘 도착했다. 뒤이어 전사자들의 시신이 도착했다. 역한 피비린내와 고통에 겨운 아우성, 의료진들의 고함소리로 마치 전쟁터 같았다. 부상자 중에 생도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해군 선배가 함께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대장이던 해군 선배는 무릎 아래가 절단된 상태로 잘린 나머지 다리 한쪽과 함께 실려 왔다. 정신을 잃어가는 상황에서도 그는 부하 병사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간 부하들의 이름을 부르며 계속 “미안하다”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만약 이날의 기억이 영화였다면 관객 입장에서는 전우애를 떠올릴 법한 뭉클한 장면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 그날의 나는 해군 선배가자랑스럽거나 멋있게만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프고 힘들어하는 보통 인간의 모습이었다. 국가에 충성을 맹세한 군인이기에 기꺼이 적의총앞에서지만, 그 총알을 맞으면 아픈 보통의사람 말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직은 엄마의 품에서 있어도 될 4학년 생도들이 조기 임관하고 대규모 코로나 19 감염사태가 발생한 대구지역으로 파견을 나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나는 간호협회에서 대구지역 간호사 파견 실무 총괄 업무를 하고 있었다. 뉴스에서 얼굴의 반이 마스크로 가려진 채 보호 장구로 짓무른 이마에 대일밴드를 붙인 앳된 얼굴의 후배들을 보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매스컴에서 떠들썩하게 보도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소식이었지만 막상 그녀들의 모습을 보니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30년 전의 나처럼 귀밑 10센티 머리를 한 그녀들은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얼마 전 <유키즈>라는TV 프로그램에서 유재석이 대구지역에 파견 나간 간호사와 인터뷰하며 울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이 방영된 적이 있다. 서울에 가족을 두고 환자 옆을 지키기 위해 자원한 간호사는 “저는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어떻게 괜찮을 수 있을까? 2020년 코로나 19로 현장에 파견 나가 사투를 벌이고 있는 간호사의 얼굴이 1999년 서해교전에서 다리를 잃은 해군 선배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었다. 군인의 충성과 간호사의 나이팅게일 선서는 대중을 위해 스스로를 헌신하겠다는 맹세이다. 서해교전과 버금가는 코로나 19의 현장에서 간호사들은 오늘도 기꺼이 목숨을 던지고 있다.
30년 전 남녀차별이 싫어 독립을 선언하고 군에 자원했던 나는 어느덧 25년간 '간호'의 업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종종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다. "어떠세요? 힘들지 않으세요?" 나는 화면 속 그녀들과 똑같은 대답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