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는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임을 느꼈고, 그들이 그 차가운 눈으로 나를 3초간 응시했다. 그리곤 그들은 영어로 답했다. “Here’s my business card” 화가 난 걸까? 반가운 마음에 내가 같은 한국인인 문체부 직원분들께 인사한 게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아니다. 내 짐작이 틀렸고, 그들이 입은 검은 정장에 달린 빨간 배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건 김일성 배지였고, 그 둘은 북한 고위 관료였다.
2. 회의 본격 개최 전날에, 리셉션 데스크에서 벌어진 일이에요. 회의 및 이사국 투표에 참석하고자 유엔 가입국 아태지역 관광부와 관광청에서 대표자들을 만나고 있었죠. 저는 정신없이 일하면서 리스트를 꾸준히 살폈는데, 한국에선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공무원 남자 두 분과 여자 한 분이 오는 거로 쓰여있었어요. 신청하러 온 장관 및 공무원과 연이어 인사하는데, 저 멀리서 한국말로 조용히 무언가를 말하는 남자 둘이 보였어요.
3. 너무 소곤소곤 얘기해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분명히 한국어였답니다. 저는 문체부 공무원이시겠거니 생각했고, 그들은 들릴 듯 말 듯 계속 한국어로 말하며 참가 회원국 인증 서류를 들고서 리셉션 데스크에 왔어요. 반갑게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명함도 같이 주시겠어요?”라고 물었지만, 그들의 반응은 매우 냉소적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저를 3초간 차갑게 쳐다본 후에 영어로 답했습니다. “Here’s my business card”
4. 악의는 없었지만, 그들은 그냥 정말이지 차갑게 영어로 말하고선 제게 명함을 건네고 휙 돌아섰어요. 저는 그때 알아차렸어요. 가슴팍엔 빨간 김일성 배지가 달려있었고, 그들이 준 명함과 국가 서류엔 ‘D.P.R.Korea’와 함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마크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거든요. 맞아요. 그 남자 두 명은 북한에서 대표로 파견을 온 고위 공무원이었던 거죠. (UN 국제기구에서는 북한을 ‘North Korea’라고 하지 않고, 정식 국가 명칭인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를 줄여서 ‘DPR Korea’라고 칭해요)
▲ 회의 중 이동하는 나(맨 왼쪽)와 북한에서 파견된 고위 관료(주황색 원)다. 책상 위 팻말에는 DPR KOREA라고 쓰여있다.
5. 같은 언어를 쓰는 민족끼리 다른 언어로 대화해야 한다는 사실이 속상했어요. 북한사람을, 그것도 북한 고위 관료를 제 인생에서 실제로 보고 대화한 것은 처음이었어요. 사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할 따름이었는데, 나눈 대화는 ‘영어’로 한 거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했죠. 리셉션 외에도 ‘공식적인’ 일 관련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으나, 물론 커뮤니케이션 언어는 영어였습니다. 북한은 분명히 우리나라의 북쪽에 자연 속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역사 속에 있잖아요.
6. 분명히 북한 금강산엔 예쁜 꽃이 피고, 압록강에 강이 흐르는 건 자연의 힘이겠지만, 우리는 거기에 갈 수 없고, 그곳에 사는 사람과 말하지 못하는 건 역사의 권한이에요. 여전히 북한에선 옛날과 다름없는 한국어를 쓰겠지만, 그 언어는 어제의 것이 아니며 서로 그 의미도 달라졌어요. 마음이 아프네요. 먼 훗날, 언젠가는 그들과 한국어로 함께 대화하며, 백두산에 올라 ‘hooray!’가 아닌 ‘야호!’를 외치고 싶어요. 그리고 한국어로 다시 돌아오는 그 메아리를 듣고 싶어요.
7. 그들은 저의 ‘한국어’ 질문에 ‘영어’로 답하면서, 그리고 저를 보고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