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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 Oct 12. 2021

잠들어 있던 폐가의 발견

돌고 돌아 다시 강릉에 왔다. 


바다 근처 비즈니스를 시작할 수 있는 공간을 찾느라 동해안을 훑고 다녔다. 지나가다 보이는 부동산에 랜덤으로 전화를 해보곤 했는데, 강릉의 한 부동산에서 바로 볼 수 있는 매물이 있다고 했다. 연고가 없는 곳에서 무작정 발품을 파는 것도 힘들었지만 숙박업, 일반음식점 허가가 다 나올 수 있는 건물을 찾는 것도 보통 난이도가 아니었다. 같은 건물 내 스테이, F&B를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이곳이 평창 올림픽 때 외국인 대상으로 게스트하우스와 바를 했던 곳이라고! 


잔뜩 기대하며 도착한 우리를 맞이한 건 침울한 분위기의 폐허였다. 소화하기 힘든 색색깔의 색동 컬러를 입힌 외관과 달리 내부에 들어서자 잿빛 벽에 해골 소품이 곳곳에 무더기로 있었다. 가구와 맥주 탭으로 이곳이 바로 쓰였던 곳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폐가를 깨우듯 조심스레 공간을 둘러보았다. 숙소로 쓰였다는 2층은 외부 색동 컬러의 흐름을 이어가려 했는지 노랑, 초록, 파랑으로 칠해진 방들이 있었다. 콘크리트 벽과 바닥이 다인 방에는 텐트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평창 올림픽 당시 숙소가 귀해 강릉 아파트까지 동원되었다는 이야길 들었었는데 그래선지 가구나 설비를 갖추지 않고 텐트와 침낭으로 게스트를 맞았던 듯했다. 


"이 으스스한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까?"


공간을 보는 순간부터 혼란스러웠다. 바다에 빠져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만큼 바닷가의 밝고 내추럴한 느낌의 공간이면 했다. 좋아하는 발리, 치앙마이의 분위기를 재현해보고도 싶었다. 그 컨셉에 과연 이곳이 맞는 걸까? 백지 같은 공간에 에어비앤비 하나를 꾸며본 게 다인데,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폐공간을 아예 새롭게 리모델링할 수 있을까? 바꿔진 After의 모습이 아직 불분명해선지 덜컥 이 공간에 확신을 가지기엔 지금, Before의 모습이 너무 압도적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갖은 고민 끝에 일단 해보기로 했다.

너무 오랫동안 공간을 찾는 데 지쳐있었던 것도 한몫을 했다. 겨울에 낯선 동네를 기웃대며 다니는 것도, 마음에 들면 법적인 문제가 있거나 해서 좌절하는 것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수 차례 이사를 하며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하는 현타는 당연한 수순이었고, 뭐든 일단 해보기나 하자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결정적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들은 아래와 같다.


오래 비어있어 더 음침한 분위기 가운데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이 한 줄기 있었으니...

이 건물은 특이하게도 천창에서 연결되는 중정이 있었다. 모로코나 스페인에서 볼 법한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건물 전면의 창이 크지 않음에도 하늘에서 빛을 그대로 일층까지 실어주는 천창 덕에 건물 내부가 환했다. 채광 효과는 물론, 비가 눈이 오면 또 다른 운치가 있을 것 같았다.


위치가 좋았다. 강릉역,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중앙시장이나 근처 맛집들이 모두 도보 10분 이내로 가능했다.

호스텔의 입지로, 강릉 ktx 개통 이후 부쩍 늘어난 젊은 층에게 딱 좋을 입지라고 판단했다. 강릉 사람들은 선호하지 않는 지역인 걸 나중에 들었다. 아무래도 역 주변이라 오래된 여인숙, 모텔이 즐비한 동네였고, 강릉의 인력사무소도 모여있으니 그럴 만하다. 외지인의 눈으론 그것보다 입지가 월등했고, 건물도 공원을 바라보는 대로변에 있어 동네 분위기엔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현지 거주 기준과 여행자의 숙소 기준은 다르니까.


이 건물이 예전 여인숙이었다는 것도 재미난 스토리 텔링이 될 것이었다. 실제 여인숙은 본 적도 없었고, 가고 싶지도 않지만 그 여인숙을 바꾼 곳이라면 또 이야기가 다르다. 공장, 목욕탕을 재생해 독특한 분위기의 공간이 태어나고, 을지로의 감성에 열광하는 밀레니얼과 재미난 매칭이 될 듯했다. 물론 잘 바꾸게 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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