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 [돌담]
지난 13일, 여수 국가산업단지 폭발사고로 하청노동자 세 명이 사망했다. 보도에 따르면 피재자(被災者)들은 인화성 가스와 유증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현장에 투입됐다. 발화 원인은 정전기로 추정되나 제전복·제전용구 등 보호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기사를 읽다 보니 피재자들의 나이가 눈에 들어온다. 62세, 64세, 70세. 요즘 내가 자주 보는 분들과 비슷한 연배다. 고령의 노동자들을 많이 접하는 까닭은 인근 대기업에서 공장증설을 위해 하청인력을 대거 뽑고 있어서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유해인자가 있는 현장에 들어가기 전에 ‘배치 전 건강검진’을 받도록 명한다. 기저상태를 확인해 작업 중 생긴 건강문제가 해당 유해인자에서 비롯됐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조치다. 본래 취지와 달리 불건강자를 탈락시키는 용도로 악용되는 경우가 있어 검사자 앞에 앉은 사람들은 곧잘 예민해지곤 한다. 나이가 들고 몸이 성치 않다는 이유로 먹고 살길이 막막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화가 난 듯한 투덜거림으로 표출된다.
“기껏 왔더니만 딸랑 이거밖에 안 하는교?”라고 불평하는 한 노인은 가동 중인 공장 사이에 신설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구축건물을 해체하는 작업에 지원했다. 이 현장에 등록된 유해인자는 석면이 유일하고, 석면에 대한 선별검사는 폐기능 검사와 흉부촬영이 전부다. ‘이거밖에 안 하는’ 이유를 찬찬히 설명하니 못내 수긍하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료실을 나서는 노인의 뒷모습은 어딘가 개운치 않아 보인다. 개운치 않기는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저 노인이 일터에서 접하게 될 유해인자가 어디 석면뿐이겠나. 조금만 헤아려 봐도 그럴 리 없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가동 중인 양옆의 공장에서 어떤 물질이 나올지 모를 일이다. 철거작업에 사용할 공구의 소음과 진동이 얼마나 심할지 알 수 없다. 급격히 낮아진 기온은 뇌심혈관계 질환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모른 채로 남아있는 것은 수두룩하지만 유해인자로 등록되어 있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일쑤다. 등록되어 있더라도 기준치에 미달하거나 측정되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가정하고 넘어간다.
있지만 없는 듯이 여기는 일. 나는 이런 일을 마주할 때면 최진영의 단편 ‘돌담’(『겨울방학』, 2019, 민음사)을 떠올린다. 이 소설의 화자는 작은 완구회사를 다니고 있다. 회사에서 유해물질을 기준치 넘게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이내 “나를 병들게 하는 게 이것뿐인가”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심심하면 사장이 머리를 툭툭 치는 회사에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먹고 살고자 경멸에 단련되어 가던 어느 날, 화자는 회사가 수습사원 후배를 채용하지 않고 내치는 모습에 지독한 환멸을 느낀다. 이에 기준치 초과 사실을 신고하고 무작정 회사를 나와 고향으로 내려간다. 소설의 제목인 ‘돌담’은 여기서 등장한다. 고향집 근처에서 화자는 전에 없던 돌담을 본다. 돌담은 화자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인 장미의 집 앞에 쌓여있다. 모종의 이유로 오래전에 장미와 멀어진 화자는 엄마로부터 장미 가족에게 생긴 일을 듣는다. 장미의 동생은 몇 년 전, 불의의 사고로 죽었고 사고에 책임이 있던 마을 어른도 그 사고로 같이 죽었다. 마을 사람들의 연민은 어릴 적부터 병약한 탓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던 장미의 동생보다 한 가족의 가장이었던 어른에게로 향했다. “그래도 그 집에는 자식이 하나 더 있잖나. 오씨네는 가장이 죽었어.” 위로를 가장한 나쁜 말들에 분노한 장미 부모는 동네 사람들과 불화한다. 돌담은 그 결과다. 집 앞에 묵묵히 돌담을 쌓는 부부의 모습에 동네 사람들은 혀를 찬다. 그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오다 주웠다며, 그냥 생각났다며 부부에게 돌을 가져다준다. 여기까지 엄마의 이야기를 듣던 화자가 문득 그 사람들은 왜 돌을 주는 거냐고 묻는다. “그러면 그 사람들 맘이 편해질까 싶어 그러는 거겠지.” 엄마의 대답에 “불편하니까 보이지 말라는 거 아니고?”라고 다시 묻자 잠깐 망설이던 엄마가 말을 잇는다. “그런 마음도 없다고 할 수는 없고.”
없다고는 할 수 없는 마음. 불편하니까 보이지 말라는 마음. 우리는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다. 우리의 일상이 그런 마음에 기대어 유지된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은 더 적극적으로 모르고자 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은 이것이다. 모른다고 해서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존재하는 위험을 없는 듯이 취급하다 보면 그 위험은 늘 더 약한 사람에게, 더 절박한 사람에게 향하게 된다. 여수산단 사건에서 위험의 외주화라는 고질적인 병폐에 더해, 피재자들의 나이에 자꾸 눈이 가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노동에 대한 멸시와 빈곤에 대한 혐오가 ‘능력’이라는 허울 좋은 말로 부추겨지는 시대에 더 취약한 사람에게 더 많은 위험이 가중되는 이 야비한 방식을 곱씹다 보면 소설 속 화자가 자조하듯 “괜찮겠지, 아직은 괜찮겠지, 기만하는 수법에 익숙해져 버린 형편없는 어른”만 남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조 다음에 이어지는 마지막 절에서 최소한 ‘형편없는 어른’이지는 않을 단초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화자의 신고에도 완구공장은 계속 돌아간다. 언젠가 단속에 걸릴지 모르나 그 ‘언젠가’가 자신의 신고와 상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사를 재촉하고 SNS에 폭로해볼 수도 있겠지만 본인에게 그럴 책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화자는 생각한다. 이건 돌을 쌓는 거라고. 더 나빠지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돌을 쌓는 거라고. 나는 이때 화자의 시선이 돌담 밖이 아닌, 안에서 그것을 보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밖에서 보면 돌담은 시야를 가로막는 벽이다. 그러나 안에서 돌담을 쌓는 장미 부모의 눈으로 보기 시작하면 돌의 의미는 달라진다.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그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최대치의 저항이며, 최선의 애도라는 점이 그 안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보인다. 돌을 찾으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을 걷는 마음. 소설은 이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는 문장으로 매조지나 독자로서 나는 잠시나마 화자의 입장이 되어보는 그 부분에서 어쩌면 그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 마음이 다른 어느 때가 아닌, 바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도.
중앙일보 2021년 12월 25일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