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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May 13. 2024

남편과의 첫 만남: 예의 없는 태국인(?)을 만났다.

2018년 05월, 그와의 첫 만남

[2018년 05

☑ 남편 한 줄 정보: 김현우. 1990년생. 사와디캅(?)이 절로 나오는 햇빛에 그을린 피부와 짙은 이목구비. 성격 꽤나 있어 보임. 


세상에 있는 모든 부부에게 묻고 싶다. 상대의 첫인상이 어땠는지, 첫 만남부터 결혼을 예상했는지. 전혀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상대와도 결혼한 사람이 있는지.


주변에서 나에게 남편의 첫인상이 어땠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늘 같다. “이상한 차림새를 한 태국인.” 내 답을 들은 이들은 모두 나에게 괜히 부끄러워 이상한 말을 한다며 흘려듣지만, 나는 늘 강조한다. “진심이야. 농담 아니야.” 요즘도 나는 여름철 시커멓게 그을린 남편을 볼 때마다 흠칫흠칫 놀란다. 유독 잘 타는 피부 때문에 4월부터 그는 서서히 탄 빵처럼 변한다. 더위가 절정인 8월이 되면 그는 완벽히 구워지는데, 그때가 되면 정말 ‘사와디캅’ 인사가 절로 나온다. (아, 오해는 금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는 태국이다. 태국사람 좋아요.)


그와 나는 카메라 감독과 작가로 7년 전 같은 프로그램에서 만났다. 회사의 복사기까지 아는데 당사자 둘만 숨긴다는 사내연애로. 우리는 한 프로그램을 같이 만들던 동료였다. 당시 나는 그 팀에서 꽤 오랜 기간 일을 했기 때문에, 염증을 느낄 대로 느끼고 있던 차. 출근과 동시에 퇴근을 꿈꾸며 웃지도 않고 기계처럼 컴퓨터를 두드리던 시기였다. 


나는 매주 월요일, 스튜디오 촬영을 할 때 남편 ‘현우 감독’을 만났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많은 스태프 중 한 명이었을 뿐, 처음엔 그의 존재 자체도 몰랐다. 내가 그를 인지하게 된 건 같은 팀의 L선배가 현우 감독을 짝사랑한다고 슬며시 고백하면서부터였다. 그 고백을 왜 나에게 했을까. 사실 이제야 고백한다면 나는 L선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뒤에서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고, 모든 이들의 일을 트집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튼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자기 그녀는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L선배의 대나무 숲이 된 나는 졸지에 일주일에 한 번씩 L선배의 가슴앓이를 몇 시간이고 들어야만 했다. 그녀에게 하도 시달린 탓일까. 김현우? 이름 석자만 들어도 나는 지긋지긋하단 표정으로 귀부터 닫았다. 그럼에도 나는 촬영을 할 때면 L선배와 함께 현우 감독을 지켜봐야만 했다. 


남자치곤 긴 머리. 길다 못해 덥수룩한 상태. 농구바지에 귀를 뚫고 휘황찬란한 팔찌까지. 패션센스는 일단 꽝이다. 그리고 짙은 쌍꺼풀과 하이톤의 큰 목소리. 으. 전혀 내 스타일은 아니다. 

L선배의 눈이 의심스럽다. 현우 감독은 당시 카메라 팀 중 꽤 잘생긴(믿기지 않는다) 편에 속한다고 들었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우리는 매주 월요일에 진행되는 스튜디오 촬영 외에도 며칠 씩 출장을 가기도 했는데 나는 그와 몇 번이나 출장을 함께 가도 반년 동안 말 한번 섞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출장 중 잠시 식사시간이었다. 갑자기 그가 나를 툭툭 치더니 내 옆에 있는 김치를 달란다. 그것도 반말로. 깜빡이 없이 들어온 그의 무례함에 당황한 나는 ‘얘 뭐야?’라는 표정으로 일단 김치를 건넸다. 


김치를 나누며 그가 한번 각인이 되고 나서 보니, 현우 감독은 자꾸 내게 반말을 하지 않는 것인가? 옛다, 그래서 나도 반말을 했다. 우리는 서로의 나이도 제대로 모르면서 주구장창 반말로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이것이 친해지자는 시그널이라도 된 양 그는 갑자기 나를 친구처럼 대했다. 가끔 “이거 먹을래?”라며 자신의 호주머니에 있던 과자를 나눠주기도 했고, “팔이 너무 아파서 그런데 여기 좀 당겨봐”라며 스트레칭을 하는 자기 팔을 잡아달라며 친한 척 엉겨 붙기도 하면서. 뒤늦게 알고 보니 그는 누구에게나 천연덕스럽게 반말을 하고 다녔다.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하지만 나는 괜히 그가 더 싫어졌다. 날 언제 봤다고 말이야. 


누군가에겐 백마 탄 왕자님처럼 보일 진 몰라도, 내게 현우 감독의 첫인상은 그저 예의를 저 멀리 내던져 버린, 어처구니없는 인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의 첫인상은 강렬하고도 버릇없는데 당최 어떻게 나의 남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그와 소개팅으로 만났다면, 나는 주선자에게 물었을 것이다. “내가 혹시, 뭐 잘 못했니?”


그런 그와 내가 김치(반말) 사건 이후 일 년 여만에 연애를 시작했다. L선배의 사랑을 받았던 남의 과거 있는(?) 그와 나의 시작이 순조롭지만은 않았지만, 6년이란 시간 동안 열심히 연애를 했고, 그는 지금 내 남편이 되었다. 영화처럼 결혼 상대에게 첫눈에 반하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스타일’의 남자와 결혼이란 걸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예의 없는 태국인’과 결혼을 하게 되다니. 아마 그때의 나는 무엇에 홀린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지금도 서로의 첫인상과 첫 만남에 대해 이야기를 종종 나눈다. 남편은 늘 잘생긴(?) 자신에게 그런 생각을 가졌을 리 없다며 자기 편한 대로 무시해 버리기 일쑤지만. 


우리 부부는 지금도 밤낮으로 촬영을 하고, 대본을 쓰며 바쁘게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못 볼 때도 많지만 나름 즐겁게 살고 있다. 단언컨대 나의 남편은 내가 만난 남자 중 가장 특이하다. 덕분에 그를 만나는 동안 로봇 같았던 내가 참 많이 울고 웃었고, 누구보다 다이내믹한 연애를 했다. 때로는 천연덕스러운 아이 같다가도, 때로는 삼만 살쯤 된 어른 같은 나의 남편. 그를 7년째 지켜보며 보고 느꼈던 것을, 그리고 그를 통해 깨닫고 배웠던 것을 <나의 남편 관찰일지>로 기록하려 한다. 


어느새 그와 함께 7번째 5월을 맞고 있다. 오늘도 땡볕 야외 촬영에 나선 나의 남편, 현우 감독. 벌써 잘 구워진 빵처럼 그을리기 시작한 것을 보고 있자니 절로 손이 모아진다. 신이시여, 부디 아프지 않게(?), 360도 골고루 예쁘게 구워지게 해 주세요. 


☑ 남편의 첫인상 한줄평: 예의 없이 반말하는 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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