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노아에게 세례를 주노라.
그렇게 사위는 성수와 성유와 순결의 흰옷을 입고 신자로 다시 태어났다. 그를 만난 열여섯 번째 부활절이다.
복돌이 유아세례 이전에 꼭 영세받겠다는 약속을 지켜낸 사위가 나는 몹시 사랑스럽다.
육 개월 동안 교리를 익히며 가톨릭 전례와 공동체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예비자 시간, 이 기간에는 매주 두 번씩 미사 참례하고 따로 학습하는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전 세계가 동일한 전례를 지키는 천주교에는 따분한 예법이 많다. 찐 신자가 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시간을 삼십칠 년 전 나도 경험했었다.
개신교 신자로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나에게 가톨릭은 이물감으로 다가왔다. 교리 수업은 혼배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절차였다. 교리를 끝내고 찰고를 거쳐야 비로소 천주교 신자로 인정받는다. 똑같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인데 서로 다른 기도와 호칭이 늘 어색했다. '이렇게 해서 꼭 혼배를 해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신앙은 위기상황에서 그 진가를 알아챌 수 있다.
홀로 서서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은 항상 위태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쑥쑥 자라는 아이들은 언제나 나에게는 위로였다. 삶이 빠듯할수록 내 안에 부르짖음은 간절했고 은총은 늘 감사 가운데로 왔다. 두 아이의 유아세례 이후 첫 영성체와 견진성사까지 우리는 달랑 셋이었지만 하느님을 뒷배로 둔 든든한 시간을 보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처럼 성전에서 나는 씩씩한 행복을 누렸다.
나에게 새 힘이 되어주는 우군 아닌 아군이 늘었다.
사위의 영세에 대부 역할로 아들이 나섰다. 매형을 위해 먼저 고백성사로 준비하는 아들.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형제처럼 보이는 듬직한 두 아이가 한 사람은 영세자로 그리고 대부로 앞뒤로 앉은 모습에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으십시오.' 대부가 대자에게 주님의 빛을 전하는 순간부터 새로운 시작이다. 낡은 과거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빛을 따라 새 삶으로 가는 찰나에 우리가 함께 서서 노래한다. 노아의 새날이 언제나 맑음이길.
주말에는 복돌이의 유아세례일정이 잡혀있다. 교회의 가르침 대로 생후 한 달 전에 영세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더 없는 축복이다. 제 어미가 그랬듯 성전 뜰에서 무럭무럭 커가는 모습을 기대하며 나는 또 설렌다. 주말이면 스테파노로 태어날 내 손주 복돌아. 예수님처럼 네 어미처럼 하느님 사랑 듬뿍 받는 귀한 삶이길 할미가 손 모아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