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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개 Apr 15. 2022

못다 한 노력의 고백

영화 <마르크스 캔 웨이트 Marx can wait> 리뷰

사랑의 기저에는 '이해'가 있다. 이해는 ‘앎’에서 시작한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아는 것.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으로 슬퍼하는지 아는 것. 그래서 앎은 사랑을 잉태시킨다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을 온전히 아는 것은 무척이나 고된 일이다. 끝없는 인내가 필요하고, 애정과 수고, 시간과 희생을 요한다.



영화 <마르크스 캔 웨이트>는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대상을 안다는 것, 그를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얼마나 큰 노력을 요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헤아리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우린 상대를 잘 안다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을 안다는 것의 기준은 너무나 얕고 불투명하다.




이 영화를 만든 마르코 벨로키오 자신 역시 존경받는 영화감독일 뿐 아니라, 그의 형은 영향력 있는 사회운동가로 벨로키오는 명망 있는 집안이었지만, 어느 가족이나 아픈 손가락인 구성원이 있다. 이 집안의 맏형은 정신병을 앓았고, 청각 장애가 있는 누이가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 그 누구도 마르코의 쌍둥이 동생인 카밀로의 마음이 시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르코는 젊은 나이에 스스로 삶을 포기한 카밀로의 행적을 되짚으며, 그동안 피해왔던 생의 숙제를 직면하기로 한다. 영화는 벨로키오의 가족과 주변 지인을 인터뷰하고, 카밀로가 남긴 사진과 필름과 함께 마르코의 영화 속 은유로 남아있는 그의 존재를 등장시킨다. 명석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달리, 학업생활을 힘겨워했던 쌍둥이 동생. 마땅한 직업과 진로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며, 젊은 나이에 영화로 성공한 마르코와 끝없이 비교할 수밖에 없었던 카밀로. 그가 생을 포기한 직접적인 원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생전 그를 깊이 알아가려는 노력을 다하지 못했다는 거장의 회한이 스크린을 통해 전달된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그를 피상적으로 아는 데에 그쳤다는 죄책감은 남은 가족 마음속에 깊은 자욱을 새겼다. 마르코 벨로키오는 다수의 전작을 비롯해 영화의 형식으로 죄책감과 상처를 수없이 고백한다.




영화 속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정의감만으로도, 신앙심만으로도, 또는 사회적인 업적이나 성공만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이야말로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원초적인 자리일 것이다. 사랑이 메마른 곳에서 각자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는 벨로키오 형제들의 말처럼, 현대 사회에서 주의 깊게 주변을 돌아보고 알아가고자 하는 노력은 쉽지 않다. 그들의 상처를 전면에 드러낸 영화는 비슷한 과제를 안고 있는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깊은 통찰과 여운을 전달한다.



영화 초반부는 한시에 태어난 마르코와 카밀로가 함께 성장하는 사진을 보여주지만, 말미에는 영원히 젊은 모습뿐인 그의 동생 카밀로와 어느덧 백발 노장이 되어버린 마르코의 사진이 대조된다. ‘마르크스 캔 웨이트 Marx can wait’라는 제목은, 먼저 떠나보낸 동생을 만날 때까지 그를 알아가고 이해하려는 못다 한 노력의 한 마디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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