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른 Jun 03. 2023

글로리와 해피니스 사이 그 어딘가

<영웅본색> (英雄本色, A BETTER TOMORROW(1986))

비장한 음악 소리와 함께 한 남성의 꿈이 짧게 지나가고, 이윽고 그 남자는 땀을 흘리며 요란하게 깬다. 그러고는 <영웅본색>을 보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알 법한, 선글라스를 낀 채 담배를 문 주윤발의 모습이 등장한다. 조직의 일원인 마크와 아호는 위조지폐로 수익을 내며 어둡다면 어둡고, 화려하다면 화려하게 생활한다. 조직을 이끄는 아호는 동생인 아걸에게 부끄럽지 않은 형이 되기 위해 어두운 과거를 뒤로 한 채 손을 씻으려 하지만, 마크는 의리와 우정을 오가며 뒷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자유로운 본인의 모습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홍콩 누아르의 대명사인 <영웅본색>은 네 인물을 번갈아 조명하면서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갈등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아걸과 아호, 그리고 재키와 마크는 비슷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금세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는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추구하고자 하는 신념이 글로리와 해피니스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걸은 과거의 영광을 누리던 형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아호의 그림자가 본인을 뒤덮고 있다고 생각해 형을 쉽게 용서하지 못한다. 물론 제 분수를 모르고 덤벼드는 아걸의 무모함은 잦은 답답함을 안기지만, 소년미 가득했던 풋풋한 그 시절의 장국영 하나로 모든 것이 용인된다. 마크는 아호와 호형호제하며 세계를 누비던 그 시절의 영광을 되찾길 원한다. 버버리 코트를 걸치고 통쾌하게 적을 무찔렀던 그때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 반면 재키와 아호는 아걸과 마크와는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재키는 아걸이 과거에서 벗어나 형을 용서하고 좋은 관계로 돌아가길 바란다. 아호 또한 조직의 리더로서의 화려함은 놓아두고 현재의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재키와 아호는 모두 과거에 얽매인 채 고통스러워하기보다 현재에서 길을 찾고 나아가는 개척자의 면모를 보인다. 글로리와 해피니스 사이를 방황하는 네 사람이 결국 행복해지기를 바랐던 것은 비단 필자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마크의 죽음이 짙은 허무함을 남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의 죽음이 형제가 예전으로 돌아가는 촉매제가 되었을지언정 모두가 행복할 수 있었던 방향은 아니었던 것 같아 아쉽다. 

복잡 미묘한 네 사람 사이의 관계들은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는 메인 테마곡으로 완성된다. 현악기의 우아함과 기품 혹은 관악기의 거칠면서도 강렬한 음색이 영웅본색의 매력을 더한다. 장국영의 ‘당년정(當年情)’은 한없이 유약한 아걸의 위태로움과 그런 애인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재키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선글라스를 쓰고 성냥개비를 문 비장한 마크의 총사위나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과거에 대한 속죄 사이에서 방황하는 처연한 아호의 모습을 대변할 때도 있다. 모든 관계 한가운데 서 있던 아걸의 목소리로 표현되기 때문에 관객의 심장을 더 저릿하게 만든다. 새 삶을 살고자 하는 형의 용기를 마주했던 아걸이 결국 아호에게 총을 건네고, 마침내 형을 용서할 용기를 내기까지 수많이 괴로워하고 고민했던 시간들이 당년정에 녹아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각 인물의 상황을 통해 그들이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신념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선택이 옳고 그른지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관조할 뿐이다. 마크의 죽음이 허무하더라도 그것이 본인의 선택이었고 본인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마무리였을 것이다. 마크는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신이라고 했다. 어쩌면 행복한 마무리는 아니었더라도 구질구질한 삶에서 벗어나 신념 위에서 마지막까지 본인의 뜻대로 행동했던 마크는 <영웅본색> 속 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색함과 촌스러움 가득한 낡은 영화이지만, 아직까지도 작품은 오래 회자되며 현재의 관객에게 낭만을 선사한다. 


Written by 나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