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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Jul 23. 2022

잉카 에필로그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65

아리카의 코


마야의 칸쿤을 떠나 잉카의 도시 리마에 도착하면서 시작된 잉카의 땅 순례는 이곳 아리카를 마지막으로 끝난다. 볼리비아의 우유니에서 안데스를 넘어 들어온 잉카제국의 남단 아타카마 사막은 북쪽으로는 페루 나스카의 땅과 이어진다. 아리카에서 페루 국경까지는 100킬로미터 좀 넘는 거리이니 아리카는 칠레 최북단의 국경도시인 셈이다. 버스를 타고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에서 아리카까지 아타카마 사막을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면서 본 차창 밖의 풍경은 그저 황량한 모래와 소금 섞인 진흙 덩어리의 땅일 뿐이었다.


그러나 칠레가 남미 최부국이 된 것은 페루와 볼리비아로부터 이 황량한 아타카마 사막을 차지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19세기 후반 소위 태평양전쟁에서 칠레에 패배한 볼리비아는 태평양의 항구를 빼앗겼고 볼리비아의 동맹국 페루도 아리카를 비롯한 아타카마의 북부를 빼앗김으로써 사막 밑에 숨어있던 구리와 초산을 비롯한 많은 광물자원을 잃어버리고 남미의 빈국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이쯤에서 미리 말해두지만 어제의 바위그림 답사 이후 오늘부터의 여행을 보여줄 사진은 몽땅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이제부터의 여행기는 사진 없는 여행기가 될 수밖에 없음을 양해 바란다.>

  

나는 잉카의 땅에서의 마지막 날을 아리카 시내를 돌아다니며 페루의 땅이자 볼리비아의 땅이었고 지금은 칠레의 땅인 이 수난의 땅이 겪은 세월을 보고자 했다. 내가 묵었던 호스텔의 바로 뒤에는 아리카에서 가장 알려진 경관지인 모로 데 아리카가 있었다. 아리카 시내와 태평양의 망망대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를 겸한 공원이다. 스페인어 모로(morro)는 코라는 뜻이다. 아리카의 바닷가에서 모로 데 아리카를 보면 그것은 정말 코처럼 생겼다. 바닷가에 수직으로 100미터가 넘는 절벽이 우뚝 서 있는데 절벽은 바다 쪽으로 둥글게 튀어나와 있고 꼭대기는  마치 윗면이 평평한 모자를 쓴 것처럼 보였다. 절벽의 생김으로 보아 아리카 시의 코라고 해도 과히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아리카 시의 산 마르코스 대성당. 파리의 에펠탑을 설계한 구스타프 에펠이 설계한 성당으로 유명하다. 이 사진은 나의 여행에서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내가 묵은 호스텔은 모로 데 아리카로 올라가는 계단의 바로 밑에 있었는데 거기서 꼭대기 전망대까지 계단을 오르는 것도 그동안의 피로 때문인지 그리 쉽지 않았다. 꼭대기의 전망대가 있는 공원은 밑에서 볼 때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넓었다. 이 바다를 향하여 우뚝 선 언덕은 본래 아리카가 페루의 땅이었을 때 페루의 방어 요새였다. 올라와 보니 이곳은 정말 천혜의 요새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천혜의 요새 아리카의 코는 1880년 6월 7일 칠레의 공격을 받아 무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시 칠레가 자랑하는 천혜의 요새가 되었다. 그리고 보니 천혜의 요새라는 말은 얼마나 허망한 말인가? 곳곳에 과거의 전쟁을 알려주는 대포가 바다를 향해 설치되어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휑한 광장에 거대한 칠레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그 뒤로 무기 박물관이라고 이름 붙은 작은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의 정식 이름은 아리카 역사와 무기 박물관(Museo Histórico y de Armas de Arica)이다. 이 박물관은 바로 칠레가 1880년 아리카 전투를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박물관 안에는 칠레의 승리를 보여주는 전쟁기록화들이 있었고 당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무기들이 진렬 되어 있었다.


박물관을 나오면 뜨거운 햇볕이 무자비하게 공격해댔다. 몇 발자국 옮기면서 사방을 둘러봐도 어디 한 군데 마음 가는 데가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대포가  설치된 박물관 입구 벤치에 햇볕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은 몇 사람의 관람객이 앉아 있었는데 꼼짝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광장 한쪽에 거대한 예수상이 서 있었다. 스페인 사람이 간 곳 어느 곳이나 높은 언덕 꼭대기에는 빠짐없이 어마어마한 예수가 서 있었다. 저만하면 나 하나쯤 가려줄 그늘이 있을 것 같았다. 예수상은 예수보다 훨씬 크게 보이는 피라미드 위에 서 있었다. 피라미드는 사방  측면이 그림자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경사가 져 있었다. 예수님 덕 좀 볼까 했던 나의 기대는 사라져 버렸고 나는 땡볕 소나기를 그대로 맞으며 왔던 계단을 다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등 뒤에서 바람이 살짝살짝 스쳤다.


그러고 나서 어디를 다녔는지 별로 기억이 없다. 그동안의 피곤이 아리카의 코에서 나의 몸을 녹초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아마 어디선가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었을 것이다. 밤 12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간 것은 9시나 되어서였다.


잉카 에필로그


카메라 백팩을 둘러매고 옷과 잡동사니가 든 보스턴백을 수하물로 부쳤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탑승구 근처 빈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시끌벅적한 칸쿤 공항에서 멕시코를 떠나면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감회에 젖어들었다.


마야가 멕시코 및 중앙아메리카의 고대 문명을 통칭하는 말이 되어버린 것처럼 잉카 역시 남미 고대 문명을 일컫는 대표적인 말로 자리 잡았다. 잉카문화의 중심은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 일대와 티티카카 호수의 연안에 있는 볼리비아의 티와나쿠라고 볼 수 있으나 오늘날 확인된 잉카문화의 분포지역은 북쪽으로는 에콰도르, 남쪽으로는 칠레 수도 산티아고가 있는 칠레 중남부에까지 걸치고 있다. 잉카제국은 안데스 산맥의 중심에서 서쪽으로 매우 넓은 지역을 통합한 대제국의 이름이었다. 이로 보면 남미 서부의 고대문화를 잉카문화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크게 무리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잉카제국의 역사는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겨우 100년 정도에 불과하다. 중미와 남미의 고대문화는 스페인 사람들이 대서양을 건너 들어오는 16세기 중엽에 일거에 중단되고 말았다. 아마도 지금 잉카라는 말로 남미 고대문화를 표현하게 된 것은 스페인 사람들의 침략으로 무너진 것이 잉카제국이었던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잉카 이전의, 선사시대에서 15세기 전반까지 잉카의 땅에 존재했던 문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엄청난 역사의 시간 끝에 얹힌 잉카라는 나라 이름으로 그 이전을 포괄하는 역사와 문화 전체를 규정해도 좋은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더군다나 유럽 사람들은 남미의 역사를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밟은 시기를 기준으로 해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 스페인이 중남미를 점령하기 이전은 소위 프리콜럼비안(precolumbian)이라는 한마디로 퉁치고 넘어간다.


잉카 문화를 낳았다고 전하는 티티카카 호수. 태양의 섬에서 바라 본 달의 섬이다.


마야라는 말로 중미의 고대 문명을 총괄하여 부르게 된 것도, 또 잉카라는 말로 안데스 일대의 남미 고대문화를 총괄하여 부르게 된 것도 모두 이 지역을 침략해 들어온 유럽인들에 의해서라는 것은 멕시코시티에 발을 디딘 이후 계속 품어온 생각이었다. 지금 멕시코나 중남미의 적지 않은 학자들이 자신들의 고대 역사와 문화 연구에 종사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 지역을 연구하는 학자의 대부분은 유럽인들이다. 이것은 중남미의 역사와 문화가 유럽인의 시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매우 요원한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리마에 도착해서 볼리비아의 라파스를 거쳐 칠레의 아리카까지 오면서 도시의 중심지마다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성당과 중심광장의 한 복판을 차지한 동상들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들어와 수천 년의 전통을 지켜가며 자리 잡아 온 토착인들의 신전을 헐어내고 대성당을 지었고 그 앞에는 잉카를 멸망시킨 인물의 동상이나 아니면 스페인 식민통치자를 몰아낸 독립영웅들의 동상들이 있었다.


내가 잉카의 땅을 밟아 오면서 새롭게 든 생각의 하나는 소위 남미의 독립영웅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남미 땅의 첫 기착지 리마에서 처음 가지게 되었다. 정복자 피사로의 무덤이 있는 리마 대성당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독립영웅 산 마르틴 장군의 동상은 묘한 콘트라스트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산 마르틴도 피사로와 다름없는 스페인 사람이었다. 그의 독립운동은 남미에서의 스페인 사람끼리의 주도권 다툼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지금 볼리비아의 국명으로까지 남게 된 소위 남미의 해방자로 불리는 시몬 볼리바르나 무리요 역시 마찬가지다.


라파스 시내 무리요 광장에 서 있는 볼리비아 독립 영웅 무리요 장군 동상


그래서 그들은 어느 한 국가의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 그 당시는 지금 같은 국가도 국경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스페인의 영토일 뿐이었다. 그래서 볼리바르 같은 사람은 볼리비아의 독립영웅이자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등을 산 마르틴과 연합하여 독립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운동은 원주민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남미 여러 나라의 국경선은 이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으로 구별되거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나누어진 생활권 등과는 관계없다. 페루의 푸노에서 볼리비아의 코파카바나로 연결된 도로를 걸어서 넘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 국경선이 이곳에서 수천 년 살아오던 케추아족이나 아이마라족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지금 남미 여러 나라의 국경선은 스페인의 통치기간에 만들어진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세력 재편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불합리한 역사의 결과는 지금 남미 국가 간의 국경분쟁으로 남아 있다.


스페인이 침략해 들어오기 이전의 잉카와 또 잉카 이전의 문화들을 보면서 나는 놀라고 감탄하기를 거듭했다. 나스카의 땅그림이나 아리카의 땅그림들의 존재를 보면서 사람들의 머릿속이란 정말 경이롭다는 생각도 했다. 나흘에 걸친 마추픽추까지의 잉카 트레일을 걸으면서 잉카인들이 남겨놓은 안데스의 산중 문화의 일단에 놀라기도 했다. 시유스타니의 석탑 형태의 옛 무덤들이나 티와나쿠의 어마어마한 고대 문명의 세계, 그리고 아타카마 사막의 땅그림과 바위그림도 정말로 남미의 존재를 새롭게 깨닫게 해 준 유적들이었다.


그러나 페루나 볼리비아에서 볼 수 있었던 현재 살아 있는 남미의 원주민들의 삶과 문화를 칠레에 들어와서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안데스의 동쪽에서 볼 수 있었던, 원색 옷을 입은 원주민들의 모습을 서쪽에서는 볼 수 없었다. 칠레는 그냥 백인의 나라였다. 아타카마 사막에서도 원주민의 역사나 문화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산맥 하나 넘었을 뿐인데 두 세계는 너무 달랐다.


칠레의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에서 본 안데스 산맥


이 글을 쓰는 도중 나는 '화이트 온 화이트'라는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보게 되었다. 20세기 초 칠레 남부의 눈 덮인 하얀 땅에 하얀 피부색의 백인들이 들어온다. 그들은 그 땅에 살던 원주민들을 사슴 사냥하듯 사냥을 한다. 그것은 그들의 땅을 빼앗거나 이익을 쟁취하기 위한 것도 아닌 그냥 재미로 하는 글자 그대로의 사냥이다. 그들의 총에 쓰러진 원주민 시체에 발을 올려놓고 총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그 영화를 보고 나는 칠레의 도시에서 원주민들의 모습을 본 일이 없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칠레에서 내가 본 원주민과 관련된 풍경은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의 어느 변두리 학교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뿐이었다. 이키케에서도 아리카에서도 원주민들의 살아있는 문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아리카를 떠나면 나는 칠레의 최남단인 푼타 아레나스에서 내릴 것이다. 그곳은 어쩐지 이곳보다 훨씬 더 남미의 냄새를 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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